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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산정(山頂)에서

오작교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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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890, 산 위에 올라와 오늘로 사흘째가 된다. 물론 홀홀단신 내 그림자만을 데리고 올라왔다. 휴대품은 비와 이슬을 가릴 만한 간소한 우장과 체온을 감싸줄 침낭, 그리고 며칠분의 식량과 그걸 익혀서 먹을 취사도구.

    산에서 사는 사람이 다시 산을 오른다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로 산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적이 미치지 않은 보다 그윽한 산을 찾아 오르고 싶은 것이다. 새삼스레 등산을 하기 위해서거나 산상의 기도를 위해서가 아니다. 무슨 수훈(垂訓)을 내리기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한 꺼풀 한 꺼풀 훨훨 벗어 버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떨치고 나서게 된 것.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보다 더 투명해지고 싶어서, 더욱 더 단순해지고 싶어서 산정에 오른 것이다.

    칠월 보름에서 추석 전까지 산사(山寺)는 가장 한적하다. 안거의 긴장이 풀린 무중력 상태. 떠날 사람들은 모두 썰물처럼 떠나가고 남을 사람만 듬성듬성 남는다. 그 남은 사람들도 하루 이틀 자취를 감추는 일이 잦다. 그것은 어쩌면 바람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던 사람들도 설렁설렁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어디론지 훌쩍 길을 떠나 버린다. 가을바람에는 그런 이상한 마력이 있는 모양인가? 말짱하던 초록빛 오동잎도 하룻밤 사아에 뚝하고 떨어진다.

    나도 그 바람소리에 흔들려 털고 일어나, 더 올라갈 데가 없는 데까지 올라왔다. 살아도 살아도 철이 안 드는 풋풋한 머시매들의 기질, 바람결에 민감한 영원한 나그네들. 해마다 이맘때면 연중행사처럼 나는 혼자서 불쑥 산 위에 올라와 며칠씩 지내다가 내려가곤 한다. 벌써 5, 6년째 되풀이되고 있는 계절적인 행사다.

    첫째 날 오후, 산정에 올라와서는 먼저 머문 자리를 마련했다. 해마다 새 자리를 잡는다. 금년의 나는 지난해의 내가 아니므로 그 자리도 또한 새로운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억새밭에 자리를 잡았다. 산 위에는 벌써 억새꽃이 은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나서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십 리 밖으로 첩첩이 쌓인 아득한 산 너머로 기우는 일몰을 지켜보면서, 우주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장엄한 빛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이 가시자 삽시간에 여기저기서 별들이 돋아났다. 산 위에서 보는 별들은 훨씬 또렷하다. 어떤 별은 글썽글썽 눈물을 머금은 듯 한 그런 모습도 하고 있다. 사람들의 눈매도 그렇듯이. 별밤에 혼자서 할일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낮은 목소리로 하다가 나중에는 목청껏 부르게 되었다. 별들이 내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이 노래 저 노래를 들추다가 끝에 가서는 ‘봉선화’만을 되풀이해 불렀다.

    지난 여름 담 밑에 쓸쓸히 피어 있는 봉선화를 보고, 그를 달래주기 위 노래를 불러주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눌 밑에 선 봉선호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여기까지 부르면 내 마음에는 까닭 없는 슬픔이 배인다. 밤이 깊도록 봉선화만을 불렀다. 배가 고파서 더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부르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둘째 날 새벽, 저 아래 골짝에서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오싹 한기가 들었다. 동이 트자 골짝에 자욱이 서려 있는 하얀 안개, 발아래 안개를 거느린 높은 산봉우리들은 마치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다. 안개 위에 떠 있는 산들은 한결 신비스럽고 의연하다.

    이런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으니 문득 내가 산신령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하계(下界)에 내려가지 말고 이대로 선 채 산신령이라도 되어 버릴까. 그러나 할일이 없는 산신령은 너무 무료해서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낮에는 마른 바람소리에 귀를 맡기고 어슬렁어슬렁 능선을 거닐면서 살아온 자취를 더듬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니 그 한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삶의 빛깔이요 무게일 것이라고 생각이 모아졌다.

    둘째 날 밤에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풀벌레 소리에 입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간밤에는 되지도 않은 내 목청으로 이 풀벌레들을 놀라게 했겠구나. 자연의 소리는 조금도 방해되거나 시끄럽지 않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는 같은 사람으로서도 듣기가 역겨운데 자연의 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다. 그것은 그 자체가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도 우주적인 조화 속에서는 인간일 수 있지만, 그 조화를 개드리면 비인간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이다.

    첫째 날 밤에는 밤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하계의 불빛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무리를 이룬 불빛은 인간의 촌락. 별처럼 깔려 있는 마을의 불빛들. 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사라지면 저 불빛 가운데 하나도 꺼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저 불빛이 빛나고 있다면 그 지붕 밑에 웃음꽃이 피어 있는 것이고, 희미하게 떨고 있다면 누군가 근심 걱정에 잠겨 있는 것이 된다. 저 불빛마다 더욱 밝게 빛날 때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보다 빛나게 될 것이다. 이ㄸ금 산짐승들이 서걱서걱 억새밭으로 지나가는 소리를 ㅣ들으면서, 산도 밤에는 잠이 드는구나 싶었다.

    셋째 날인 오늘, 인간들이 버리고 간 비닐봉지며 깡통과 휴지를 주우면서, 산(자연)의 품에 안견서도 그 은혜를 모르는 고약한 버릇들에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짐승은 쉬어간 자취를 남기지 않는데 사람은 그 흔적을 남기려 한다. 이제 사람들은 짐승한테도 배워야 하도록 되었다. 사람들은 자연 앞에서까지 덜된 오만을 부리려고 한다. 누가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신문이나 방송 등 보도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복’이란 말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 잠시 어떤 산의 정상에 깃발을 꽂고 그걸 증명하기 위한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산을 정복한 것이 되는가? 단 30분도 못 버티고 엉금엉금 이어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데, 정복이라니 이 얼마나 허황하고 무엄한 소리인가. 산이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여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산을 오를 수는 있어도 정복할 수는 절대로 없다.

    옛사람의 시를 내 목소리로 읊으면서 초가을 산정의 마른 바람 소리를 듣는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천리 밖을 보려는가
다시 더 높이 오르게.
(83. 10)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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