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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뿌리를 내려다 볼 때

오작교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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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열흘 남짓 산거(山居)를 비우고 떠돌아다니다 돌아오니 가을빛이 기울고 있었다. 집 뒤는 단풍이 들었다가 이울기 시작이고 앞산 마루에는 벌써 나목(裸木)들이 드러나 있다. 세월은 우리가 딴눈을 파는 사이에도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간다.

    채전밭에는 무우와 배추, 그리고 갓이 그새 실하게 자라 올랐다. 무우는 허연 종아리를 무릎 위까지 드러냈고 배추는 속이 많이 찼다. 이 채전밭을 내려다볼 때 나는 좀 부끄러워진다. 김장을 갈아 떡잎이 자라오를 만하면 꿩들이 내려와 심술을 부리듯이 헤집어 놓는 바람에 해마다 어지간히 속이 상하곤 했다. 그리고 밤으로는 산토끼들이 와서 김장밭을 망쳐놓기 일쑤였다. 언젠가 산 너머 농막에 가봤더니 채전밭 둘레에 철망을 쳐놓았었다. 옳지, 나도 철망을 사다가 쳐놓으면 되겠구나 속으로 새겨두었다.

    지난 가을 광주에 나가 철물점에서 철망을 사와 쳐 두었다. 50미터 한 말에 만원이래서 사왔는데, 펼쳐보니 20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농사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장에서 사다 먹는 편이 경제적으로 따지면 훨씬 이익이다. 하지만 가꾸는 재미는 돈으로 셈할 수 없으니 값비싼 농사를 짓는다.

    그전 같으면 김장밭이 볼품이 없었을 텐데 올해는 철망 덕분에 제대로 된 것 같다. 철망 밖에 갈아놓은 아욱 한 두렁은 밤마다 토끼가 와서 질서정연하게 차곡차곡 모조리 뜯어 먹었다. 그야말로 씨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먹어 치운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음인지 모란밭 곁에 갈아놓은 케일까지 입을 대기 시작했었다.

    큰절에서 농감이 올라와 말하기를, 밤에 라디오를 켜 놓으면 짐승들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대로 라디오를 켜놓고 지켜보았더니, 첫날밤은 왔다가 그래도 가벼렸다. 둘째 날 밤은 공연한 소리임을 알았음인지 뜯어 먹고 간 흔적을 이튿날 아침에 알 수 있었다.

    채소를 가지고 짐승과 다투는 내 자신을 돌아보니,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려고 했다. 에라, 먹으면 먹었지 채소 좀 가지고 영악스런 사람이 되어서야 쓰겠느냐 싶어 생각을 거두어 들였다.

    짐승도 염치가 있었던지 그 뒤로는 별로 입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염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사람처럼 염치없는 동물이 또 어디 있을까. 적어도 요즘 세상에서 사람에게 예의염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이 시대의 우리 모두가 안면신경이 무디어져버린 것인가.

    높이 두자밖에 안 된 울타리를 토끼나 꿩이 마음만 내면 얼마든지 뛰어넘고 날아들 수 잇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물론 일부에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몇 길이나 되는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고 잠가놓은 자물쇠도 부숴가면서 도둑질을 한다. 어디 그뿐인가. 도둑을 보고 강도하고 했다고 해서, 돌아서다 말고 ‘내가 절도지 어디 강도냐?’고 도둑이 도리어 대들면서 큰소리치는 세태가 아닌가.

    하기야 자기 분수도 모르는 큰 도둑들이 남의 자리에 버젓이 걸터앉아서 큰소리치는 세상이니, 좀도둑들이 하는 것쯤은 애교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말은 사회정의가 어떻고 해쌓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는 아직도 부정부패와 지능적인 비리가 활개를 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좀도둑들이 성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얼마 전 산소통까지 메고 들어가 은행 금고를 털려고 하다가 시간이 모자라 그만 중단하고 나오면서, 장내를 어질러 놓아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겼다는 도둑의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도둑들에게서 한 가닥 예의와 염치와 그리고 여유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의 우리 조상들은 땅에다 금만 그어 놓아도, 혹은 새끼만 둘러쳐 놓아도 침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손인 현대인들은 두꺼운 벽도 깨뜨려가면서 자기것 가져가듯 버젓이 도둑질을 한다. 두자밖에 안 된 울타리의 질서를 지킬 줄 아는 토끼나 꿩 같은 들짐승에게 오늘의 우리는 엎드려 배워야 할 것 같다.

    빈 집에 돌아오면 누가 반겨주는가. 내 암자에서는 새와 나무들이 나를 반가이 맞아준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궁금했음인지 암자 둘레에 사는 새들은 내가 들어서면 뭐라고 재잘거리면서 내 둘레를 풀풀 날아다닌다. 기와지붕 틈에서도 짹짹거리며 아는 체를 한다. 날짐승도 길이 들면 서로를 알아보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처럼 제멋대로 자란 청청한 나무들이 나를 반겨준다. ‘나처럼 제멋대로 자랐다’는 표현은 얼마 전에 나를 따라와 뜰의 나무들을 전정해 주고 간 운문사의 학인 혜만의 말이다. 향나무건 후박나무건 전혀 손질을 안 해주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자란 것이다.

    한 그루 한 그루 내 손수 심어서 가꾼 나무들이므로 나무라 할지라도 유정(有情)이 된 것. 유정이건 무정(無情)이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곁에서 지켜보고 쓰다듬고 보살펴 준 인연으로 해서 우리는 정이 든 것이다.

    나 같으면 아까워서 손도 못 댈 가지들을 혜만이는 나무를 위해서라면 서 싹둑싹둑 잘라 내었다. 곁에서 보고 있을 때는 내 팔 한 쪽이 잘려 나가는 것처럼 아프기까지 했는데, 전정을 마치고 보니 수형(樹型)이 제대로 잡히고 가지가 덜 빽빽해서 보기에도 그전보다 나아졌다.

    이번에 뜰에 서 있는 나무 중에서 편백과 똘감나무와 후박 한 그루는 베어 내었다. 기른 정으로 보면 차마 못할 일이었지만, 뜰의 공간을 위해 하는 수 없이 정원사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나무도 제 설 자리에 못 서면 저렇듯 베어지는구나 싶었다. 아래채 앞이 그전에는 왠지 좀 답답했는데, 이번에 편백 세 그루를 없애고 보니 훤칠하게 트여 잔디밭이 훨씬 넓어졌다.

    나무의 전정 일을 지켜보면서, 우리들의 복잡한 일상생활에서도 불필요한 곁가지는 미련 없이 잘라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얽히고설킨 곁가지 때문에 삶의 줄기가 제대로 펼쳐질 수 없다면 한때의 아픔을 이기고서라도 용단을 내어 절단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주관적인 틀에 박힌 고정관념부터 잘라 내야 한다. 자신이 삶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춰보지 않고서는 전체의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고, 어디에 걸려서 앓고 있는지 되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삶이 어제의 삶보다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인지도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후박 잎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은행잎도 자기 발치에 수북이 누워 있다.

    꽃하고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벚나무 잎새도 어제까지 내려다보던 그 발부리에 쌓여 있다. 낙엽귀근(落葉歸根), 잎이 지면 뿌리로 돌아간다. 어느새 12월, 하루 한때라도 자기 삶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야 할 계절 앞에 또 마주섰다.

(85. 12)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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