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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이야기

오작교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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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아침부터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대나무들이 고개를 드리우고, 간밤에 핀 달맞이꽃도 후줄근하게 젖어 있다. 이런 날을 극성스런 쇠찌르레기(새)도 울지 않고, 꾀꼬리며 밀화부리, 뻐꾸기, 산까치, 불새, 휘파람새 소리도 뜸하다.

    어제 해질녘, 비가 올 것 같아 장작과 잎나무를 좀 들였더니 내 몸도 뻐근하다. 오늘이 산중 절에서는 삭발 목욕날. 아랫절에 내려가 더운 물에 목욕을 하고 왔으면 싶은데, 내려갔다 올라오면 길섶의 이슬에 옷이 젖을 것이고 또 땀을 흘려야 할 걸 생각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솥에 물을 데워 우물가 욕실에서 끼얹고 말까보다.

    숲속에서 살다보면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기분도 상쾌하여 사는 일 자체가 즐겁지만, 비가 오거나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심신이 더불어 무겁고 저조하다. 숲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새나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있는 유정(有情)들이라 사람이나 짐승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때로는 서로 정을 나누며 가까이 하다가도, 발걸음이 뜸해지면 까맣게 잊은 채 관계의 줄이 느슨해진다.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마련이니까.

    며칠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 여섯 시면 어김없이 부엌에 내려가 아침 공양을 끓여먹는데, 그날은 하던 번역 일을 한 꼭지 마저 하고 내려가려고 시간을 좀 늦추게 되었다. 여섯 시 반쯤 되어 누가 덧문을 두들기었다. 이른 아침에 웬 놈이 또 찾아왔는가 싶어 마루로 나가 덧문을 열었더니, 다람쥐란 녀석이 뽀르르 덧문에서 내려 깡충 뛰어 갔다.

    아침마다 똑같은 시간에 문을 열다가 그날 아침은 좀 늦었더니, 숲속의 한 식구인 다람쥐가 웬일인가 싶어 문을 두들긴 것이다. 창고에 놓아둔 밥밀콩을 지붕 밑 환기통으로 드나들면서 야금야금 죄다 먹더니, 그 밥값을 하느라고 나를 부른 것인가. 이토록 영특하고 귀여운 다람쥐를 대한민국에서는 외화획득에 눈이 어두워 가죽을 벗겨 팔아먹은 적이 있다.

    그 전날 일을 고되게 하고 나면 어쩌다 깊은 잠에 빠져 예불시간이 늦어질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잠결에 누가 ‘스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벌떡 깨어난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분명히 들리는 소리. 그것은 아마 누구에게나 따르고 있는 ‘수호천사’의 소리일 것이다.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자아의 분신(分身) 같은 존재. 그러나 삶에 질서가 없거나 무디어지면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정신이 맑고 마음이 투명해야 자기 분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따금 장끼가 홰를 치면서 큰 소리로 울어대는 때가 있다. 도 누가 올라오는가 싶어 밖에 나가 보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 장끼 말이 나온 김에 꿩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겨울철이면 숲속에 먹이가 시원찮아서인지 꿩들이 많이 뜰 가에 내려와 어정거린다. 처음에는 먹이(주로 콩)를 뿌려 주어도 저만큼서 바라보기만 하지 선뜻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몸을 비켜주면 그때에야 와서 주워 먹는다. 사람을 못 믿어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조금씩 길을 들이다 보면 까투리(암꿩)는 내 발부리에 와서까지 마음 놓고 쪼아 먹는다. 그러나 장끼는 여전히 바라보고만 있다. 어쩌다 밖에 나가 며칠 만에 돌아오면 나를 보자마자 까투리들은 우르르 몰려든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 애들 먹이부터 먼저 뿌려 주어야 한다.

    이런 꿩들이 며칠 동안 안 보이게 되면 몹시 궁금하다. 혹시 매한테 채여가지나 않았는가, 혹은 다른 짐승한테 물려가지나 않았는가 싶어서다. 한동안 까투리고 장끼고 전혀 보이지 않더니, 요 며칠 전에 대숲 속에서 병아리만한 새끼 꿩들이 대여섯 마리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동안 알을 품느라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여름철에는 숲속에 먹이가 많으니 뜰에는 잘 안 온다. 이따금 장끼 소리만 들여올 뿐.

    숲속에서도 인간의 도시에서처럼 이따금 비정한 약육강식이 벌어진다. 그때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아주 다급하게 들린다. 하루는 해가 기울고 어스름이 내릴 무렵 채소밭에서 풀을 매고 있는데, 우물 쪽 나무 위에서 새들이 아주 다급하게 짹짹거리었다. 웬일인가 싶어 호미를 든 채 그쪽으로 가 보았더니, 매가 한 마리 날아와서 새 새끼들을 채가려고 노리고 있는 참이었다.

    “엑키놈! 썩 안 물러갈래?” 하고 크게 고함을 쳤더니 매는 날아갔다. 그때 본 일인데 다람쥐가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이웃의 위급함에 그도 한몫 거들면서 짹짹거렸던 모양이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들면서 짹짹거릴 때는 쇳소리가 난다.

태산목꽃
    안개비가 이제는 굵은 빗줄기로 바뀌었다. 안개는 저 아래 골짜기에 머물러 있다. 이런 빗속에서도 태산목에는 꽃 한 송이가 새로 피어났다. 내 눈에는 나무에 피는 꽃 중에서 이 태산목꽃이 가장 정결하고 기품이 있고 좋은 향기를 지닌 것 같다.

 

꽃 이파리 하나가 꽃술을 우산처럼 받쳐 들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생명의 신비 앞에 숙연해진다. 일단 피어나기로 작정한 이상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지라도 피고야 마는 꽃의 생태에서, 게으른 사람들은 배울 것이 많다.

    위채 부엌문 위에서는 요즘 말벌이 집짓기에 한창이다. 아침에 보니 벌써 작은 호박덩이만하게 지어 놓았다. 한 주일쯤 전 집을 짓는 걸 처음 목격하고 더 커지기 전에 떼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재작년에도 저 말벌 때문에 나도 몇 차례 쏘이고 나그네들도 더러 쏘인 일이 있었다. 남의 집에 붙여 사는 처지에 주인도 몰라보고 쏘다니, 그 소행이 괘씸해서 집을 헐러버렸었다. 아, 그랬더니 집을 잃어버린 벌들은 며칠 동안 집 자리를 맴돌면서 떠나갈 줄을 몰랐다. 그 정상이 측은해서 마음에 걸렸었다.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거슬리고 또 쏘일까봐 일지기 뜯어버려야겠다고 벼르다가, 애써 집을 짓는 걸 보고 어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벌들한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얘 벌들아, 나하고 약속을 하자. 너희들이 나를 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쏘지 않는다면, 집짓고 사는 것을 묵인하겠다. 그러나 만약 그전처럼 주인이건 나그네건 한 사람이라도 쏘게 되면 그날로 즉시 철거하게 될 것이다. 알아들었지?”

    언어의 길이 다르니 내 말을 못 알아들을지라도,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으니 내가 한 말 뜻은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이런 약속의 사실이 활자화되기까지 했으니,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나도 끝까지 책임을 질 것이다.

    이제는 도 토끼 이야기를 할 차례다. 작년에도 케일 밭에 무단 침입하는 토끼를 물리치기 위해, 밤에 등불을 켜고 라디오를 켜놓았지만 소용이 없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먹이를 가지고 지미승과 다투는 일이 부끄럽게 생각되어 포기하고 말았었다.

    장마가 들기 시작한 어느 날, 큰절 일꾼이 우중인데도 케일 모종을 가져와 심어 주었다. 올해는 봄씨앗을 뿌리고 나서 둘레에 망을 쳐두었다. 그런데 잎이 뜯어 먹을 만큼 자라니 밤이면 또 토기들이 망 밑으로 기어들어와 뜯어 먹고 부러뜨려 놓았다. 망 밑에 들을 주워다 눌러 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고심하던 중인데, 하루는 대낮에 토끼가 망 안으로 들어왔다가 포식을 하고 나가려던 참에 인기척을 듣고 제풀에 놀라 들어온 구멍을 잊어버렸다. 이리 뛰고 저리 부딪치면서 어쩔 바를 몰랐다. ‘엑키놈!’ 하고 호통을 치니 더욱 놀라서 날뛰었다. 가가스로 망을 헤치고 달아난 뒤로는 아직까지 얼씬거리지 않는다. 짐승도 크게 놀라야 정신이 나는 모양이다.

    몹시 추웠던 한해 겨울, 눈까지 잔뜩 내려 쌓인 밤이었다. 그때는 덧문이 없던 시절이라 외풍이 심해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뒷문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해서 문을 열자 풀쩍 잿빛 산토끼가 한 마리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깜짝 놀랐었다. 춥고 배고파서 한 산중에 사는 이웃을 찾아온 손님을 혼연히 맞이했다. 광에서 고구마를 내다가 주었다. 하룻밤 재워서 보낸 일이 있다.

(86. 8)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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