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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풍물(風物)을 지키라

오작교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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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얼마 후, 시골에서 닷새마다 한번씩 서는 장을 없애겠다는 말이 당국에 의해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 이유인즉 시골의 장이 비능률적이고 낭비가 심하다고 해서이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었다. 없앨 것을 없애지, 시골 사람들의 ‘만남의 자리’까지 없애겠다니 될 말인가. 장날이면 소용되는 물건만 사고파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친지들을 만나 막혔던 회포를 풀기도 하고, 새로운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리고 농사일과 아들달의 혼사가지도 그 장날에 익히는 수가 더러 있다.

    그러니 자은 단순한 상품거래의 장소가 아니라, 훈훈한 인정의 마당이 되기도 한다. 다행히 반대여론 때문에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민중의 오랜 뿌리가 한족밖에 모르는 성급한 발상에 의해 뽑힐 뻔했었다.

    나는 으리으리한 백화점이나 상품의 사열장 같은 슈퍼마켓보다는 시골장이나 도시 뒷골목의 노점 같은 데서 물건을 사는 일이 훨씬 즐겁다. 장이나 노점은 좀 어수선하고 너절하긴 하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사람의 따뜻한 정이 오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기로 찍어내는 셈보다는 사람의 손과 머리로 셈을 하다 보면 그 셈에 인정이 배어 여유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뭣보다도 장터나 노점에서는 생의 활기가 넘치고 있어 사는 기쁨을 함께 나누어가질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능률과 편의주의로 인해 어디를 가나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다. 음료수를 사 마시려면 무표정한 가게 앞에 서서 짤칵짤칵 동전을 집어넣어야 하고, 고궁에 들어가 구경을 하려고 해도 역시 넙죽넙죽 돈을 먹는 기계 앞에 홀로 서서 동전을 넣어주고 단추를 눌러야 한다.

    날이 갈수록 사람이 기댈 만한 자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기계와 마주 대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기계처럼 표정을 잃고 굳어져만 간다. 이런 양상이 이른바 선진국의 실상이라면, 나는 차라리 서투르고 어수룩한 미개인의 대열에 서고 싶다. 미개인에게는 문명인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인간의 청정한 속뜰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웃나라의 문명 비평가쯤 되는 사람의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거린 적이 있다. 그는 세계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볼 만큼 보았는데, 질서정연한 도시는 있어도, 인정이 없는 것을 보고 아주 우울했었다고 한다. 잿빛 질서 속에 사람이 기댈 여백이 없더라는 것.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와서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돌아보고 나서 비로소 어떤 출구와 가능성을 찾았다는 것이다. 우리 시장에는 선진국의 도시에서와 같은 질서는 없었지만, 그 대신 생의 활기로 넘치고 있어, 그걸 보고 있는 자신도 힘이 나더라는 것이다. 비좁은 길목에 물건을 펼쳐 놓았다가 짐을 실은 손수레가 지나가면 잠시 비켰다가 다시 펼쳐놓고 하는 장면을 보면서, 한국인의 낙천적이면서 꺾일 줄 모르는 강인한 잠재력 앞에, 이게 바로 사람이 살고 있는 현장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차디찬 질서만 있고 생의 활기가 없는 도시라면 우리는 거기를 인간의 도시라고 부를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무질서보다는 질서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질서만을 따르다 보면 그 획일적인 잿빛 질서의 그늘 아래서 우리들의 팔팔한 삶이 시들 위험이 따른다. 차디찬 질서가 이미 벽에 부딪힌 정지 상태라면, 생의 활기는 미래지향적인 싱싱한 잠재력이다.

    그러므로 잘 다져진 질서보다는 조금은 혼잡하고 엉성하더라도 생의 활기 쪽이 우리 앞날을 보다 밝고 건강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좁은 땅에 4천만이나 모여서 사는데 어떻게 한결같을 수 있을 것인가.

    요 근래에 들어 우리는 곧잘 ‘세계 속의 한국’을 내세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어설프게 들리던 이 말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을 보아도 우리 국력이 그만큼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와 우리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세계 속의 한국이란, 한국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세계의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세계적인 조화를 이루자는 뜻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국적인 특수성마저 버리고 세계의 흐름에 그대로 모방하고 추종해야 한다면 그것은 죽도 밥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구미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적인 상황’으로 인해 인간의 기본적인 군리마저 수시로 유보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 어째서 그 밖의 일은 선진국을 그대로 닮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너무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 같다. 인정과 풍습이 다르고 문화ㅗ아 역사적인 배경이 다른 우리가 어째서 남의 시선에 따라 이리 쏠리고 저리 기울어져야 한단 말인가. 남에게 보여주더라도 우리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를 올바로 이해시키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안으로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남의 눈을 의식하는 법인데, 우리도 이제는 촌티 나는 그런 허세에서 그만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싶다. 우리도 이제는 우리 나름의 자존과 긍지를 지닐 때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인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 지그상의 모든 선진국은 하루아침에 선진국으로 뛰어오른 것이 아니다. 그네들의 형편에 맞도록 차근차근 착실하게 쌓아올린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우리 정부가 내세우는 ‘선진조국’의 이상은 분단조국의 통일과 함께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우리 겨레의 공통된 염원이다. 그 같은 염원은 시절인연에 따라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이지 성급하게 서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루어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열매가 익기까지는 사계절의 질서가 따르는 법이다. 우리 겨레의 기상은 86년 이후에도, 88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 존속되면서 줄기차게 뻗어나갈 것이다. 조급하게 서두르는 일 치고 그 결과가 온전한 것을 우리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우리들은 정부행사에 적극 협조할 것을 약속합니다. 행사 전날에만 지시하여 주시면 노점을 벌이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서울 시청 앞에서 이런 표지를 들고 호소하고 있는 노점상인들을 보고 나는 누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라의 체면도 좋지만 당상에 닥칠 노점상인들과 거기에 딸린 수많은 가족들의 생계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의로운 민주복지사회’를 이루려면 한때 남의 눈에 잘 보이기보다는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의 간절하고 절박한 의사도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노점은 시들어가는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런 기능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계당국에서는 알아야 한다.
(83. 7. 27)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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