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記
도서명 | 산방한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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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솔을 옷이 흠뻑 젖어 찾아온 20대의 청년을 보자 선뜻 출가 희망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긴장된 표정과 말이 없는 그의 거동에서 ‘전과자’인 나는 그가 찾아온 까닭을 곧 감지할 수 있었다.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몇 밤을 지새우면서 햄릿의 고뇌를 치렀을 것이다. 그러던 끝에 일도양단(一刀兩斷), 집을 박차고 뛰쳐나왔으리라. 출가의 동기는 각자의 생활환경에 따라 다를지라도 생나무 가지를 찢는 듯 한 그 고통만은 누구나 거의 비슷하게 겪게 마련이다. 스스로 사주팔자를 바꾸지 않을 수 없도록 절실하고 절박한 물음 앞에 마주섰을 테니까.
나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길인가?
이런 원초적인 물음 앞에 20대의 투명한 감성(感性)은 앓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안일과 타성과 인습 등 회색의 흐름에 자기 자신을 차마 내던져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거듭거듭 태어나고 싶어서, 끝없는 인간성정을 위해 자신의 궤도(軌度)를 본질적으로 수정하고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20대 출가할 무렵에도 우주고(宇宙苦)를 혼자서만 치은 것같이 여겨진다.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회답도 없는 물음을 토했던가. 카인의 후예들이 날뛰던 동족상잔의 저 6·25, 모든 질서와 가치의식이 뒤죽박죽 흩어져버린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가.
그 무렵 어떤 친구들은 바다를 건너가기만 하면 신천지가 전개될 줄 알고 그저 밀항(密航)에만 들떠 있었다. 우리는 몇 차례나 가난한 학생의 처지에서 주머니를 털어가며 송별연을 베풀었던지. 또 어떤 친구는 그 우주고를 이기지 못해 생애를 스스로 반납해버리기도 했었다. 남들은 말짱한데 어째서 우리들은, 우리 친구들은 그런 고뇌를 겪어야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크느라고 홍역들을 호되게 치렀던 모양이다.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게 되지 나는 온갖 시름에서 일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출가수도의 길을 택한 그때의 내 심정은 그 후 산에 들어와 읽은 것이지만, 소설 <광장(廣場)>에 나오는 이명준과 비슷한 것이었다.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해 가다가 그 중립에서조차 바다로 뛰어내린 그런 심정. 그러나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인생을 스스로 포기해버리지 않고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은 생명의 요구에 따른 점이다.
그래서 출가를 말할 때 도피가 아니라 추구라고 한다.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고 적극적인 생명의 추구라는 것. 내 인생을 그 누구도 어떻게 해줄 수 없기 때문에 내 의지로써 스스로 구축하고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똑같이 집을 나온 사실을 가지고 출가(出家)라 하고 가출(家出)이라고 하는 것은 추구냐 도피냐에 달린 것이다.
집을 떠나오기 전 내가 망설였던 일은 책 때문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독자(獨子)인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길러주었을 것이다.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책더미 앞에서 나는 또 생나무 가지를 찢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서너 권쯤은 몸에 지니고 싶어 이 책을 뽑았다가 다시 꽂아 놓기를 꼬박 사흘 밤을 되풀이 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책 몇 권을 가지고도 이러는데, 정든 처자권속을 두고 나오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능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결국 세 권을 뽑아 짐을 꾸렸지만 산에 들어와 보니 모두가 시시하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집에서 몸만 빠져나온 것을 가리켜 출가라고 할 수는 없다. 온갖 집착과 모순과 갈등과 타성의 집에서도 미련 없이 빈손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크게 버리지 않고는 크게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출가를 가리켜 ‘커다란 내버림’이라고 한다. 모든 소유와 고정관념과 인습과 같은 비본질적인 데서 벗어나야 비로소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당당한 자유인, 즉 출격장부(出格丈夫)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 수행자는 한 번의 출가만으로는 출가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승단(僧團)도 하나의 중생계(衆生界)이므로 그 안에도 온갖 세속적인 모순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이런 외부적인 모순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자기 내면의 모순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와 같은 안팎의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거듭거듭 출가를 해야 한다.
그러니 출가란 끝이 없는 탈출이요, 수도생활이란 일종의 장애물 경주와 같다.
며칠 전 빗속에 찾아온 그 젊음이 어떻게 그 출가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과의 갈등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날이 들면 아랫절에 한번 내려가 봐야겠다.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몇 밤을 지새우면서 햄릿의 고뇌를 치렀을 것이다. 그러던 끝에 일도양단(一刀兩斷), 집을 박차고 뛰쳐나왔으리라. 출가의 동기는 각자의 생활환경에 따라 다를지라도 생나무 가지를 찢는 듯 한 그 고통만은 누구나 거의 비슷하게 겪게 마련이다. 스스로 사주팔자를 바꾸지 않을 수 없도록 절실하고 절박한 물음 앞에 마주섰을 테니까.
나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길인가?
이런 원초적인 물음 앞에 20대의 투명한 감성(感性)은 앓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안일과 타성과 인습 등 회색의 흐름에 자기 자신을 차마 내던져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거듭거듭 태어나고 싶어서, 끝없는 인간성정을 위해 자신의 궤도(軌度)를 본질적으로 수정하고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20대 출가할 무렵에도 우주고(宇宙苦)를 혼자서만 치은 것같이 여겨진다.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회답도 없는 물음을 토했던가. 카인의 후예들이 날뛰던 동족상잔의 저 6·25, 모든 질서와 가치의식이 뒤죽박죽 흩어져버린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가.
그 무렵 어떤 친구들은 바다를 건너가기만 하면 신천지가 전개될 줄 알고 그저 밀항(密航)에만 들떠 있었다. 우리는 몇 차례나 가난한 학생의 처지에서 주머니를 털어가며 송별연을 베풀었던지. 또 어떤 친구는 그 우주고를 이기지 못해 생애를 스스로 반납해버리기도 했었다. 남들은 말짱한데 어째서 우리들은, 우리 친구들은 그런 고뇌를 겪어야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크느라고 홍역들을 호되게 치렀던 모양이다.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게 되지 나는 온갖 시름에서 일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출가수도의 길을 택한 그때의 내 심정은 그 후 산에 들어와 읽은 것이지만, 소설 <광장(廣場)>에 나오는 이명준과 비슷한 것이었다.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해 가다가 그 중립에서조차 바다로 뛰어내린 그런 심정. 그러나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인생을 스스로 포기해버리지 않고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은 생명의 요구에 따른 점이다.
그래서 출가를 말할 때 도피가 아니라 추구라고 한다.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고 적극적인 생명의 추구라는 것. 내 인생을 그 누구도 어떻게 해줄 수 없기 때문에 내 의지로써 스스로 구축하고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똑같이 집을 나온 사실을 가지고 출가(出家)라 하고 가출(家出)이라고 하는 것은 추구냐 도피냐에 달린 것이다.
집을 떠나오기 전 내가 망설였던 일은 책 때문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독자(獨子)인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길러주었을 것이다.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책더미 앞에서 나는 또 생나무 가지를 찢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서너 권쯤은 몸에 지니고 싶어 이 책을 뽑았다가 다시 꽂아 놓기를 꼬박 사흘 밤을 되풀이 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책 몇 권을 가지고도 이러는데, 정든 처자권속을 두고 나오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능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결국 세 권을 뽑아 짐을 꾸렸지만 산에 들어와 보니 모두가 시시하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집에서 몸만 빠져나온 것을 가리켜 출가라고 할 수는 없다. 온갖 집착과 모순과 갈등과 타성의 집에서도 미련 없이 빈손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크게 버리지 않고는 크게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출가를 가리켜 ‘커다란 내버림’이라고 한다. 모든 소유와 고정관념과 인습과 같은 비본질적인 데서 벗어나야 비로소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당당한 자유인, 즉 출격장부(出格丈夫)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 수행자는 한 번의 출가만으로는 출가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승단(僧團)도 하나의 중생계(衆生界)이므로 그 안에도 온갖 세속적인 모순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이런 외부적인 모순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자기 내면의 모순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와 같은 안팎의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거듭거듭 출가를 해야 한다.
그러니 출가란 끝이 없는 탈출이요, 수도생활이란 일종의 장애물 경주와 같다.
며칠 전 빗속에 찾아온 그 젊음이 어떻게 그 출가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과의 갈등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날이 들면 아랫절에 한번 내려가 봐야겠다.
(1978. 9)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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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이 공간에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의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오랜 동안을 빈 공간으로 방치한 죄스러움이 있습니다.
저 역시 '출가'를 하는 마음으로 정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