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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도 좀 읽읍시다

오작교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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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산방한담
    며칠 전 순천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였다. 내 옆자리에 앉은 고등학교 3학년생이 시집(詩集)을 펼쳐들고 열심히 읽는 걸 보고, 나는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시(詩)를 읽는다는 당연한 이 사실이 새삼스레 기특하고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 오늘의 우리들은 너무 메말라버린 것이다.

    더구나 입시지옥의 문 앞에 들어선 고3짜리 학생이 시험공부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시(詩)를 읽는 걸 보니, 그가 얼마나 대견하고 믿음직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는 청마(靑馬)의 <행복>을 읽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러고 보니 내 자신도 시를 읽은 지가 꽤나 오래 되었다. 그날 그 학생 덕분에 다락에서 시집을 꺼내들고 밤이 깊도록 등불 아래서 두런두런 시를 읽고 있으니, 빡빡하던 감성(感性)에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시(詩)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시인의 관조(觀照)가 독자적인 리듬을 통해 우리 마음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리듬은 물론 정제된 언어의 구성으로 울려온다. 그리고 그 낱낱의 언어는 시인에 의해 선택되고 창조된 것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은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의 연설문에서가 아니라, 시인들에 의해 빛을 발한다. 눈이 있는 자 그림을 고보 귀가 열린 자 음악을 들을 수 있듯이, 말과 글을 알고 감성이 투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시의 세계에 닿을 수 있다. 우리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TV를 시청하듯이 시를 읽은 것도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다.

    ‘시를 읽으면 품성(品性)이 맑게 되고 언어가 세련되며 물정(物情)에 통달되니 수양과 사교 및 정치생활에 도움이 된다.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은 마치 바람벽을 대한 것과 같다.’ 공자의 말이다.

    예전에는 시인(詩人)이라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식인이 곧 시인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정치인들이나 경제인 혹은 학자들이나 지식인들한테서는 옛사람들이 지녔던 그런 멋과 풍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항상 긴장된 상태에서 어떤 목표 달성을 위해 차디찬 숫자(數字)만을 열심히 외우고 있을 뿐이다. 어찌 그들만 이겠는가. 우리 모두가 숫자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우리들은 지성(知性)과 의지(意志)로는 제법 호기를 부리고 있지만 인간이 본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감성(感性)은 너무도 팍팍하게 메말라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환경 자체가 비정서적이고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감성이 결핍된 인격은 온전한 인격일 수 없다.

    우리 시대에 동양 최대의 운동 경기장이 세워지고, 무슨무슨 회관과 기념관이 건립되고, 우뚝우뚝 고층빌딩이 솟아오르는 것은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좋은 시가, 문학이, 예술이 창조되는 일은 그보다 훨씬 값지고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다. 육체의 힘의 국력이라면 정신력은 보다 큰 국력이 될 것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을 쓰고 있으면서 세계의 언어시장에 민족의 서사시(敍事詩) 한 편 내 놓은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우리가 만든 상품과 노동력은 세계 시장을 넘나들면서도 정신문화의 소산인 언어예술은 이렇다 할 진출이 없다는 말이다.

    곰곰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육체의 힘과 기(技)를 겨루는 국제경기에서 그 순위와 메달에 그토록 집착하는 그런 관심과 열의와 재력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만이라도 진정한 문예진흥(文藝振興)을 위해 기울인다면 그 결과는 곧 달라질 것이다. 도난 뿌려준다고 해서 문학과 예술이 진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금(基金)과 함께 표현의 자유와 발표의 기회를 근본적으로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양식 있는 표현의 자유가 그 어디에도 방해받음 없이 누려질 때 겨레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슬기는 마음껏 날개를 펴 진정으로 문학과 예술이 진흥되고, 그것이 모든 시민의 것으로 생활화되어 마침내는 민족의 자질까지 드높이게 될 것이다.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그 잠재력을 시로써 드러내고 또한 그걸 읽음으로써 삭막한 세태에서 오염된 우리들의 혼을 맑힐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입에서 시가 외워지고 공무원이나 사무원들의 메모지에 몇 줄의 시가 적히며 밭가는 농부와 공장 근로자의 호주머니에도 시집이 들어 있고 주부들의 장바구니에도 싱그러운 봄나물과 함께 산뜻한 시집이 들어 있다면, 그래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라도 그걸 펼쳐들고 낮은 목소리로 읽는다면 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물기가 돌고 아름답고 정다워질 것이다. 이 팍팍하고 막막한 세상에서 무엇에 쫓기지만 말고 영혼의 음악인 시도 좀 읽으면서 운치 있게 살아갈 일이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밑을 뚫어도
물위에 흔적조차 없다
   야보 선사의 《금강경 송(金剛經頌)》에서 옮긴 한 구절.
(1983. 3. 10)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2011.01.18 (17:24:31)
[레벨:29]id: 오작교
 
 
 

무에 그리도 바쁜 것이 많은지,

허겁지겁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설'을 쇠지 않았으니 아직은 새해가 아니다"라는 엉뚱한 생각만 하면서......

 

오랜만에 글 하나 올리면서 말이 좀 많지요?

 
(210.204.44.5)
  
2011.01.21 (23:22:47)
[레벨:6]해바다
 
 
 
  불립문자들 / 김영찬 

 

 

  세상엔 그토록 복잡한 언어가 많지만

 

  통/번역이 별도로 안 필요한 언어들은 따로 있네

  ㅡ나뭇잎 살랑살랑語

  출퇴근길 전동차의 뚜르르 뚜뚜~ 목떨림어

  ㅡ달맞이꽃 조용한 속눈썹웃음語

 

  비밀도 아닌데 내 귀에 대고 소곤거리길 좋아하는

  西然이의 간질간질語

 

  아빠아~, 귀뚜라미가 혼자 옷장에 숨어있어

  그렇구나!

  귀뚤이語도 채록해둬야지

 

  낮잠 깬 낮달이 하암~ 뭔 얘기들이야, 함함함~ 하암~

  귀 찢어지는 하품語로 말참견 끼어드네

 

 

시인이 빚어내는 언어는 곱고 아름다워야 하고

희망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쓸수는 없겠지요.

시 한 편을 읽어서 나에게 위로가 된다면

희망이 아니어도 용기를 주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에게 정서를 주고 서정을 심어주는 글이라면 그게 곧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는 글이겠지요.

시인보다 글을 더 잘 쓰십니다.

감사히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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