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바람이 개이면
도서명 | 산방한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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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바람이 몹시 휘몰아치고 있다. 앞마루에 비가 들이치고 창문에도 이따금씩 모래를 뿌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섬돌 윙에 벗어놓은 신발을 들여놓으려고 밖에 나갔더니 대숲은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날 내 산거(山居)는 그야말로 폭풍의 언덕. 재미가 없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만 성이 가신다. 부엌에 끓여 먹으러 들어가기도 싫다. 숲속에서 지저귀던 새소리도 끊어지고 비바람소리만 심란하게 들릴 뿐, 내 생애가 이런 날 만이라면 나는 허락받은 나머지 세월을 미련 없이 반납하고 기꺼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때일 뿐, 변함없이 한결같이 지속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이다. 흐린 날이 있으니 개인 날이 있고, 궂은 세월이 있는 그 대가로 좋은 세월이 있을 수 있다. 산상의 맑은 햇살과 툭 트인 전망을 내다보려면 오늘 같은 폭풍우도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햇볕과 온기를 받아들이려면 천둥과 번개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니까.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려면 귀찮은 진딧물도 보아야 하듯이.
오늘처럼 비바람이 거센 날은 망망한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나 다름없는 산중. 언젠가 낯선 나그네가 찾아와 스님은 이런 산중에서 무슨 재미로 혼자서 사느냐고 묻던 말이 이런 날은 새삼스레 되살아난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그렇다, 사람이니 사는 재미가 있어야겠지. 무슨 재미로 사는지 아직도 잘은 모르지만, 조그만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면서 내 식대로 살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지극히 선한 것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큰절에 내려가 여럿이 어울려 살면 힘들이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도 있다. 끼니 걱정 땔감 걱정 안 해도 되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여럿이 지내면 얻어먹는 것도 낫고,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적당히 처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여럿 가운데 끼게 되면 내 식대로 살 수 없는 제약이 따른다. 뭣보다도 홀로 있을 때의 그 적적(寂寂)하고 홀가분한 맛을 누릴 수가 없다. 적적함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발가벗은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그리고 홀로 지내면 여럿 속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일이 없다. 홀로 사는 일이 힘든 줄 알면서도, 불쑥불쑥 찾아드는 무례한 불청객들 때문에 때로는 번거롭고 귀찮고 짜증이 나면서도 굳이 떨어져 사는 것은, 내 취향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홀로 있을 때 순수한 내가, 온전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부분의 나밖에 존재할 수 없다.
또 홀로 사는 이유를 굳이 대라면, 좀 위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종교적인 소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는 이반이 착하디착한 동생 알료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살아가는 동안은 죽으라는 법이 없으니 앓을 만큼 앓아주면 낫는 기쁨이 따른다. 이 덧없는 몸뚱이 가지고 항시 성하기를 바랄 수야 있겠는가. 앓은 때 비로소 건강을 헤아리게 되고, 혹사하던 몸을 한때나마 좀 쉬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일장일단(一長一短), 무슨 일에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고, 선이 있으면 그 그늘에 악도 있게 마련이다. 흔히 우리들은 좋은 쪽만을 취하고 좋지 않은 쪽은 모른 체하거나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다.
대가 없이 거저 받아 쓸 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크고 작건 간에 값을 치루지 않고 공짜로 차지하거나 누릴 수는 없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자기 몫의 문제를 지니고 산다. 권력을 쥔 사람은 그 나름의 불안이 노상 그림자처럼 따를 것이고, 권력에 밀려난 사람은 또한 그 나름의 불만이 불안 대신 가슴에 고여 있을 것이다.
《열반경》성행품(聖行品)에 보면 이런 설화가 나온다.
얼굴이 예쁘고 화사하게 차려 입은 한 여인이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주인은 반기며 묻는다.
“당신은 누구시지요?”
여인은 수줍어하면서 “공덕천(功德天)이어요”라고 대답한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가는 데마다 그 집에 복을 준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그 여인을 집안으로 정중히 맞아들여 향을 사르고 꽃을 뿌려 공양한다.
밖을 보니 또 한 여인이 문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추한 얼굴에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주인은 기분이 언짢아 “당신은 누구요?”라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그녀는 쇳소리가 나는 음성으로 “흑암천(黑暗天)이라 해요”라고 대답한다.
“무슨 일로 왔소?”
“나는 가는 데마다 그 집에 재앙을 뿌리지요”
주인은 화를 벌컥 내면서 당장 물러가라고 고함을 친다. 그러자 그녀는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
“조금 전에 당신이 반기면서 맞아들인 이는 우리 언니인데, 나는 항상 언니와 같이 살아야 할 신세랍니다. 나를 쫓아내면 우리 언니도 나를 따라올 것입니다.”
주인은 얼굴이 예쁜 공덕천 여인에게 그 사실을 물으니 그렇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나를 좋아하려면 우리 동생도 함께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시도 떨어져서는 못 사니까요.”
주인은 두 여인을 다 내쫓아버렸다고 경전을 기록하고 있다.
일장일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래서 묘미가 있다. 이 비바람이 개이면 다시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온 대지에 쏟아질 것이다.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이런 날 내 산거(山居)는 그야말로 폭풍의 언덕. 재미가 없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만 성이 가신다. 부엌에 끓여 먹으러 들어가기도 싫다. 숲속에서 지저귀던 새소리도 끊어지고 비바람소리만 심란하게 들릴 뿐, 내 생애가 이런 날 만이라면 나는 허락받은 나머지 세월을 미련 없이 반납하고 기꺼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때일 뿐, 변함없이 한결같이 지속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이다. 흐린 날이 있으니 개인 날이 있고, 궂은 세월이 있는 그 대가로 좋은 세월이 있을 수 있다. 산상의 맑은 햇살과 툭 트인 전망을 내다보려면 오늘 같은 폭풍우도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햇볕과 온기를 받아들이려면 천둥과 번개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니까.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려면 귀찮은 진딧물도 보아야 하듯이.
오늘처럼 비바람이 거센 날은 망망한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나 다름없는 산중. 언젠가 낯선 나그네가 찾아와 스님은 이런 산중에서 무슨 재미로 혼자서 사느냐고 묻던 말이 이런 날은 새삼스레 되살아난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그렇다, 사람이니 사는 재미가 있어야겠지. 무슨 재미로 사는지 아직도 잘은 모르지만, 조그만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면서 내 식대로 살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지극히 선한 것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큰절에 내려가 여럿이 어울려 살면 힘들이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도 있다. 끼니 걱정 땔감 걱정 안 해도 되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여럿이 지내면 얻어먹는 것도 낫고,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적당히 처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여럿 가운데 끼게 되면 내 식대로 살 수 없는 제약이 따른다. 뭣보다도 홀로 있을 때의 그 적적(寂寂)하고 홀가분한 맛을 누릴 수가 없다. 적적함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발가벗은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그리고 홀로 지내면 여럿 속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일이 없다. 홀로 사는 일이 힘든 줄 알면서도, 불쑥불쑥 찾아드는 무례한 불청객들 때문에 때로는 번거롭고 귀찮고 짜증이 나면서도 굳이 떨어져 사는 것은, 내 취향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홀로 있을 때 순수한 내가, 온전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부분의 나밖에 존재할 수 없다.
또 홀로 사는 이유를 굳이 대라면, 좀 위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종교적인 소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는 이반이 착하디착한 동생 알료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숨어 있어야만 할 필요가 있어. 그 인간이 조금이라도 얼굴을 드러냈다가는 사랑 같은 건 당장 날아가 버리고 마는 법이니까.”작년 여름 장마철에는 허리가 아파 몹시 고생한 적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입이 떡떡 벌어질 만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진땀이 났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끓여 먹으러 부엌에 들어가야 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우물이나 변소길 다니기가 참으로 불편했었다. 그러나 이런 일도 홀로 사는 그 적적하고 홀가분함에 대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라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살아가는 동안은 죽으라는 법이 없으니 앓을 만큼 앓아주면 낫는 기쁨이 따른다. 이 덧없는 몸뚱이 가지고 항시 성하기를 바랄 수야 있겠는가. 앓은 때 비로소 건강을 헤아리게 되고, 혹사하던 몸을 한때나마 좀 쉬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일장일단(一長一短), 무슨 일에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고, 선이 있으면 그 그늘에 악도 있게 마련이다. 흔히 우리들은 좋은 쪽만을 취하고 좋지 않은 쪽은 모른 체하거나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다.
대가 없이 거저 받아 쓸 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크고 작건 간에 값을 치루지 않고 공짜로 차지하거나 누릴 수는 없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자기 몫의 문제를 지니고 산다. 권력을 쥔 사람은 그 나름의 불안이 노상 그림자처럼 따를 것이고, 권력에 밀려난 사람은 또한 그 나름의 불만이 불안 대신 가슴에 고여 있을 것이다.
《열반경》성행품(聖行品)에 보면 이런 설화가 나온다.
얼굴이 예쁘고 화사하게 차려 입은 한 여인이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주인은 반기며 묻는다.
“당신은 누구시지요?”
여인은 수줍어하면서 “공덕천(功德天)이어요”라고 대답한다.
“무슨 일을 하시나요?”
“가는 데마다 그 집에 복을 준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그 여인을 집안으로 정중히 맞아들여 향을 사르고 꽃을 뿌려 공양한다.
밖을 보니 또 한 여인이 문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추한 얼굴에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주인은 기분이 언짢아 “당신은 누구요?”라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그녀는 쇳소리가 나는 음성으로 “흑암천(黑暗天)이라 해요”라고 대답한다.
“무슨 일로 왔소?”
“나는 가는 데마다 그 집에 재앙을 뿌리지요”
주인은 화를 벌컥 내면서 당장 물러가라고 고함을 친다. 그러자 그녀는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
“조금 전에 당신이 반기면서 맞아들인 이는 우리 언니인데, 나는 항상 언니와 같이 살아야 할 신세랍니다. 나를 쫓아내면 우리 언니도 나를 따라올 것입니다.”
주인은 얼굴이 예쁜 공덕천 여인에게 그 사실을 물으니 그렇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나를 좋아하려면 우리 동생도 함께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시도 떨어져서는 못 사니까요.”
주인은 두 여인을 다 내쫓아버렸다고 경전을 기록하고 있다.
일장일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래서 묘미가 있다. 이 비바람이 개이면 다시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온 대지에 쏟아질 것이다.
(1982. 4)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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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건 때를 따라 선하게 변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