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속에서
도서명 | 산방한담 |
---|
겨울비가 내린다. 눈이 와야 할 계절에 비가 내린다. 메마른 바람소리만 듣다가 소곤소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도 촉촉이 젖어드는 것 같다. 이런 날 산방(山房)에서는 좌선이 제격이다.
덤덤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니까. 선(禪)의 명제인 화두(話頭)고 뭐고 다 놓아버린 채 빈 마음으로 귀를 열어놓는다. 자연의 질서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에 묻은 때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날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음 없이 적적히 앉아 있으면 그대로가 존재의 기쁨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도 이 자연의 소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모순과 갈등으로 부침(浮沈)하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놓은 것이므로 자연처럼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가 없다.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니고 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강요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에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빼앗고 허문다. 자연은 요구대로 다 내어준다. 대지는 이래서 인간의 어머니. 엄마의 품에 안기면 어린애의 마음이 아늑해지듯이, 자연에 기대고 있으면 그저 편안하고 넉넉할 뿐이다.
현대문명의 해독제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어온 자연이어야 한다. 그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만인에게 자연처럼 영원한 귀의처(歸依處)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평생을 두고 수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계절이 내린 고마운 뜻을 몇 번이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가. 어디 계절만이겠는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날에 대해서, 혹은 순간순간에 대해서, 그 의미를 몇 번이나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돌아오는 봄과 여름과 가을, 겨울을 우리는 기약할 수 없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니 순간순간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고맙게 받아쓸 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일터에서 내 인생을 꽃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다면 내일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겨울비가 내린다. 내일이 소한(小寒)인데 봄비 같은 보슬비가 내린다. 숲에는 안개가 자욱이 서려 있다.
겨울새들이 감나무에서 지저귄다. 이 잔잔한 평화를 나는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얼마 전 파리에 사는 방혜자 씨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아들 시몽에게 <금강경> 녹음한 것을 들려주었더니, 그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
“엄마, 난 저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주 텅 비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빈 상태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사막이 텅 빈 것같이 보이지만 수억의 모래알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이요…….”
엄마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채소를 썰어주면서 하는 이런 말이 부엌 안을 환하게 해주더라는 것이다.
기특한 생각이다. 맑고 투명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는 듣는 마음도 또한 맑고 투명하게 울려준다. 텅 빈 마음이기 때문에 메아리가 울린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항아리에서 오히려 어떤 충만을 느끼듯이.
진공 묘유(眞空妙有)! 텅 빈 그 속에 무한한 잠재력이 나래를 편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이 풍성해진다. 이 넉넉하고 풍성한 마음이 우리 눈을 밝게 한다. 이 마음이 우리를 창조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일상의 우리들은 사소한 일이나 물건, 혹은 사람에게 얽히어 고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이 무엇엔가 집착을 할 때, 그것이 우리들의 자유를 얽어매는 사슬이 되어 자기실현(自己實現)을 방해한다. 그러다가 일도양단(一刀兩斷), 한 생각 크게 돌이키고 났을 때의 그 홀가분함을 우리는 크고 작은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은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쓸 줄 알려면 우선 공정관념의 늪에서 벗어나 텅 비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려면 무엇엔가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쓸데없는 대화를 피해야 한다. 홀로 있으면서 발가벗은 자기 세계를 철저히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명의 소리는 우리 마음을 자꾸 흩트려 놓으면서 어지럽힌다. 거기에는 생명의 질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완벽한 생명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듣는 마음을 정결하게 맑혀주고 편하게 가라앉혀 준다.
자연의 소리는 굳이 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만이 아니다. 더 원천적인 자연의 소리는 내 마음에서 울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마음이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을 관(觀)이라고 한다.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정진(精進)이 일산의 온갖 행위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그는 아무리 막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살지라도 결코 제정신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저것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문명의 연당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옷을, 거짓과 허상의 옷을 너무 겹겹이 걸치고 있다.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먹는다. 음식뿐 아니라 지식과 정보와 오락이며 취미를 취사선택할 줄을 모른다. 분별과 이유가 많고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지저분하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지닌 팔팔하고 생기에 넘친 본래의 건강을 잃게 된 것. 현재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온 것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다.
진짜로 좋은 약은 약국에서 파는 값비싼 약이 아니라, 저마다 본래의 건강에 눈뜨는 일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알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본래의 건강을 되찾으려면 안으로 더욱 가난해져야 한다. 그래야 분수 밖의 요구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내적 가난을 통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고, 그런 가난 속에서만 모순과 갈들을 극복할 수 있다.
겨울비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니 더욱 가난해지고 싶다. 온갖 소유의 얽힘에서 벗어나 내 본래의 모습을 통째로 드러내고 싶다.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덤덤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니까. 선(禪)의 명제인 화두(話頭)고 뭐고 다 놓아버린 채 빈 마음으로 귀를 열어놓는다. 자연의 질서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에 묻은 때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날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음 없이 적적히 앉아 있으면 그대로가 존재의 기쁨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도 이 자연의 소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모순과 갈등으로 부침(浮沈)하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놓은 것이므로 자연처럼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가 없다.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니고 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강요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에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빼앗고 허문다. 자연은 요구대로 다 내어준다. 대지는 이래서 인간의 어머니. 엄마의 품에 안기면 어린애의 마음이 아늑해지듯이, 자연에 기대고 있으면 그저 편안하고 넉넉할 뿐이다.
현대문명의 해독제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어온 자연이어야 한다. 그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만인에게 자연처럼 영원한 귀의처(歸依處)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평생을 두고 수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계절이 내린 고마운 뜻을 몇 번이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가. 어디 계절만이겠는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날에 대해서, 혹은 순간순간에 대해서, 그 의미를 몇 번이나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돌아오는 봄과 여름과 가을, 겨울을 우리는 기약할 수 없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니 순간순간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고맙게 받아쓸 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일터에서 내 인생을 꽃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다면 내일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겨울비가 내린다. 내일이 소한(小寒)인데 봄비 같은 보슬비가 내린다. 숲에는 안개가 자욱이 서려 있다.
겨울새들이 감나무에서 지저귄다. 이 잔잔한 평화를 나는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얼마 전 파리에 사는 방혜자 씨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아들 시몽에게 <금강경> 녹음한 것을 들려주었더니, 그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
“엄마, 난 저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주 텅 비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빈 상태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사막이 텅 빈 것같이 보이지만 수억의 모래알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이요…….”
엄마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채소를 썰어주면서 하는 이런 말이 부엌 안을 환하게 해주더라는 것이다.
기특한 생각이다. 맑고 투명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는 듣는 마음도 또한 맑고 투명하게 울려준다. 텅 빈 마음이기 때문에 메아리가 울린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항아리에서 오히려 어떤 충만을 느끼듯이.
진공 묘유(眞空妙有)! 텅 빈 그 속에 무한한 잠재력이 나래를 편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이 풍성해진다. 이 넉넉하고 풍성한 마음이 우리 눈을 밝게 한다. 이 마음이 우리를 창조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일상의 우리들은 사소한 일이나 물건, 혹은 사람에게 얽히어 고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이 무엇엔가 집착을 할 때, 그것이 우리들의 자유를 얽어매는 사슬이 되어 자기실현(自己實現)을 방해한다. 그러다가 일도양단(一刀兩斷), 한 생각 크게 돌이키고 났을 때의 그 홀가분함을 우리는 크고 작은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은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쓸 줄 알려면 우선 공정관념의 늪에서 벗어나 텅 비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려면 무엇엔가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쓸데없는 대화를 피해야 한다. 홀로 있으면서 발가벗은 자기 세계를 철저히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명의 소리는 우리 마음을 자꾸 흩트려 놓으면서 어지럽힌다. 거기에는 생명의 질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완벽한 생명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듣는 마음을 정결하게 맑혀주고 편하게 가라앉혀 준다.
자연의 소리는 굳이 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만이 아니다. 더 원천적인 자연의 소리는 내 마음에서 울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마음이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을 관(觀)이라고 한다.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정진(精進)이 일산의 온갖 행위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그는 아무리 막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살지라도 결코 제정신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저것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문명의 연당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옷을, 거짓과 허상의 옷을 너무 겹겹이 걸치고 있다.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먹는다. 음식뿐 아니라 지식과 정보와 오락이며 취미를 취사선택할 줄을 모른다. 분별과 이유가 많고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지저분하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지닌 팔팔하고 생기에 넘친 본래의 건강을 잃게 된 것. 현재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온 것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다.
진짜로 좋은 약은 약국에서 파는 값비싼 약이 아니라, 저마다 본래의 건강에 눈뜨는 일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알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본래의 건강을 되찾으려면 안으로 더욱 가난해져야 한다. 그래야 분수 밖의 요구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내적 가난을 통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고, 그런 가난 속에서만 모순과 갈들을 극복할 수 있다.
겨울비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니 더욱 가난해지고 싶다. 온갖 소유의 얽힘에서 벗어나 내 본래의 모습을 통째로 드러내고 싶다.
(1983. 2)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