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나뭇단처럼 가벼웠던 몸
도서명 | 오두막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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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다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나와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 돌아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외동손자인 나를 한 번 보고 눈을 감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불전에 향을 살라 명복을 빌면서 나는 중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린 시절을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이다. 내게 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할머니의 팔베개 위에서 소금장수를 비롯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지만 실컷 듣고 나서도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밑천이 다됐음인지, 긴 이야기 해주랴 짧은 이야기 해주랴고 물었다. ‘긴 이야기’라고 하면 ‘긴 긴 간짓대’로 끝을 냈다. 간짓대란 바지랑대의 호남 사투리다. ‘그러면 짧은 이야기’ 하고 더 졸라대면 ‘짧은 짧은 담뱃대’로 막을 내렸다.
외동아들인 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나섰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선뜻 나서서 기꺼이 해드렸다. 일제 말엽 담배가 아주 귀할 때 초등학생이 나는 혼자서 10리도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 담배를 구해다 드린 일도 있다.
내가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니를 따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가게에서는 덤으로 경품을 뽑도록 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뽐은 경품은 원고지 한 묶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발시계도 탈 수 있었는데 한 묶음의 종이를 들고 아쉬워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고지 칸을 메꾸는 일에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성은 김해 김씨이고 이름은 금옥. 고향은 부산 초량. 그래서 그런지 부산에 처음 가서 초량을 지나갈 때 그곳이 아주 정답게 여겨졌다.
지금 내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소재는 할머니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낳아 길러주신 우리 어머니보다 내가 그리는 어머니의 상, 즉 모성이 수호천사처럼 늘 나를 받쳐주고 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는 데 지당한 말씀이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는 그 그늘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다.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이제는 어쩔 도리 엇이 식구들은 거지가 될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잔칫날처럼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을 보고 식구들은 깜짝 놀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당신 정신 나갔소?” 하고 화를 낸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에게 즐거움이 필요한 때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에요.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행복이 필요한 때예요. 잠자코 잡숫기나 하세요.”라고 말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일이 없지만 참으로 슬기롭고 어진 어머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나라 안이 온통 초상집 같은데, 이와 같은 어머니들의 지혜와 마음 씀이 크게 작용한다면 이 위기를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미국에서 파리로 건너간 아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몇 끼를 굶은 끝에 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급한 전보를 친다.
<굶어 죽어가요, 아들.>
어머니로부터 즉시 회신이 도착한다.
<굶어라, 엄마.>
이 회신을 받아본 순간 아들은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까지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어머니에게 의존해 오던 나약한 그 끄나풀이 한순간에 끊어진 것이다. 그는 마침내 혼자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뒷날 어머니는 그때 일을 두고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굶어 죽어간다는 네 전보를 받고 정말 견디기 어려웠단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네 자신으로서 성장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었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셨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 중인 채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사 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내 손에 꼬깃꼬깃 접은 돈을 쥐어주었다. 제멋대로 자란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상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주를 했다.
두 번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 뵈었다 동생이 직장을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머니도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직접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드렸다. 어머니는 혼자 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 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두고 생각게 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였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 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結制 - 승가의 안거 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 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영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
나는 친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
그해 겨울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 돌아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외동손자인 나를 한 번 보고 눈을 감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불전에 향을 살라 명복을 빌면서 나는 중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린 시절을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이다. 내게 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할머니의 팔베개 위에서 소금장수를 비롯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지만 실컷 듣고 나서도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밑천이 다됐음인지, 긴 이야기 해주랴 짧은 이야기 해주랴고 물었다. ‘긴 이야기’라고 하면 ‘긴 긴 간짓대’로 끝을 냈다. 간짓대란 바지랑대의 호남 사투리다. ‘그러면 짧은 이야기’ 하고 더 졸라대면 ‘짧은 짧은 담뱃대’로 막을 내렸다.
외동아들인 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나섰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선뜻 나서서 기꺼이 해드렸다. 일제 말엽 담배가 아주 귀할 때 초등학생이 나는 혼자서 10리도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 담배를 구해다 드린 일도 있다.
내가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니를 따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가게에서는 덤으로 경품을 뽑도록 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뽐은 경품은 원고지 한 묶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발시계도 탈 수 있었는데 한 묶음의 종이를 들고 아쉬워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고지 칸을 메꾸는 일에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성은 김해 김씨이고 이름은 금옥. 고향은 부산 초량. 그래서 그런지 부산에 처음 가서 초량을 지나갈 때 그곳이 아주 정답게 여겨졌다.
지금 내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소재는 할머니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낳아 길러주신 우리 어머니보다 내가 그리는 어머니의 상, 즉 모성이 수호천사처럼 늘 나를 받쳐주고 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는 데 지당한 말씀이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는 그 그늘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다.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이제는 어쩔 도리 엇이 식구들은 거지가 될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잔칫날처럼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을 보고 식구들은 깜짝 놀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당신 정신 나갔소?” 하고 화를 낸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에게 즐거움이 필요한 때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에요.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행복이 필요한 때예요. 잠자코 잡숫기나 하세요.”라고 말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일이 없지만 참으로 슬기롭고 어진 어머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나라 안이 온통 초상집 같은데, 이와 같은 어머니들의 지혜와 마음 씀이 크게 작용한다면 이 위기를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미국에서 파리로 건너간 아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몇 끼를 굶은 끝에 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급한 전보를 친다.
<굶어 죽어가요, 아들.>
어머니로부터 즉시 회신이 도착한다.
<굶어라, 엄마.>
이 회신을 받아본 순간 아들은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까지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어머니에게 의존해 오던 나약한 그 끄나풀이 한순간에 끊어진 것이다. 그는 마침내 혼자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뒷날 어머니는 그때 일을 두고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굶어 죽어간다는 네 전보를 받고 정말 견디기 어려웠단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네 자신으로서 성장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었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셨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 중인 채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사 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내 손에 꼬깃꼬깃 접은 돈을 쥐어주었다. 제멋대로 자란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상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주를 했다.
두 번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 뵈었다 동생이 직장을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머니도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직접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드렸다. 어머니는 혼자 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 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두고 생각게 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였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 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結制 - 승가의 안거 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 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영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
나는 친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