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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억훈(訓)

오작교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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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오두막 편지
    가을이 저물어가니 초암(艸庵)에도 일손이 바쁘다. 산중의 외떨어진 암자에서 모든 이릉ㄹ 혼자서 해치우려면 두 다리와 양손으로는 늘 달린다. 겨울철에 땔 나무를 미리 마련하고, 도량을 손질하고, 또 추워지기 전에 김장도 해야 할 것이다. 이래서 추승구족(秋僧九足)이란 말이 나온 듯싶다.

   몸은 고단하지만 내 식대로 살 수 있으므로 그런대로 살아갈 만하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살면 이런 일은 나누어 가볍게 치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어울리고 싶지 않다. 어울려 보아도 별 소득이 없었으니까.

   출가 이래 나는 줄곧 대중이 많은 큰절에서만 살아왔는데, 그러다 보니 근년에 이르러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많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잔소리꾼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한곳에 모여 사는 것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화합해 살자는 데 그 뜻이 있겠지만, 잔소리는 자타(自他)가 함께 싫다. 그리고 요즘 승단의 분위기는 전통적인 승가정신이 계승되도록 되어가고 있지 않다. 어차피 홀로 뛰쳐나왔으니 또한 홀로 떨어져 나오면 그만인 것. 출가 수행승의 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길이다.

   먹고 사는 것이 정말 작은 일이 아니다. 자취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먹는 일이 즐겁기보다는 귀찮게 여겨질 때가 많다. 먹지 않으면 병들어 쓰러질 테니 우선 그걸 면하기 위해 담아두는 것이다. 그리고 남기면 변하므로 먹어치우는 것이지, 누가 혼자 먹기 위해 부지런을 떨고 창의력을 발휘할 것인가. 잘 얻어먹으려면 흥청거리는 도시의 절간에 주저앉으면 된다.

   산에 들어와 나는 식탁을 맨 먼저 만들었다. 방안에서 바리를 펴고 공양을 하려니까 몇 번씩 드나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부엌에서 먹으려면 식탁이 필요했다. 헌 판자쪽을 모아 조리대로도 쓸 수 잇게 식탁을 만들고, 의자는 참나무 장작으로 맞추어 놓았다. 이런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려니 문득 ‘빠삐용’의 처지가 떠올라 ‘빠삐용 식탁’이라고 이름 붙였다. 끝없이 탈출하려는 사나이, 불의와 억압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는 무한한 시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었지…….

   내 빠삐용 식탁 앞에는 이런 글씨가 씌어 있다. ‘먹이는 간단명료하게’ - 말하자면 내 암자의 부엌훈(訓)인 셈, 산승의 생활에 간단명료한 것이 어디 부엌일뿐 이랴만, 적어도 먹는 일에만은 번거롭고 싶지 않아 낙서해 놓은 것. 어쩌다 가짓수가 많은 식탁을 대하면 생각이 흐트러져 맛을 잃게 되는 게 우리네 식성이다.

   친구들은 내 간단명료한 ‘먹이’를 보고 건강을 염려하지만, 건강이란 반드시 먹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지리산에서 한해 겨울을 아무런 부식도 없이 순전히 소금과 간장만으로, 그것도 하루 한 끼만을 먹으면서 지낸 건강한 경력을 나는 가지고 있다. 명색 수도승이란 주제에 먹을 것 다 먹고, 자고 싶은 잠 다 자면서 어떻게 수도를 한단 말인가. 우리 같은 부류들에게는 현재의 식사로도 고맙고 과할 뿐이다.

   날씨가 추우면 부엌에 들어가기가 머리 무겁다. 이런 내 처지를 염려하여 해인사에 있는 한 도반(道伴)은 밥 지어 줄 공양주를 한 사람 보내주겠다 했지만, 먹이뿐 아니라 사는 것도 간단명료히 홀가분하게 살고 싶어 모처럼의 호의를 사양하고 말았다.
<1977 . 1>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2012.10.26 (14:22:56)
[레벨:4]천일앤
 
 
 

부엌...

오랫만에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부억ㅋ에 들어가는 일이 참 번거로운 1인입니다.

직장생활에 바빠 늘 뒤로 밀쳐지는데 사실 젤로 앞장서서 들러줘야 하는 부분인데 말입니다.

한 끼라도 빠져서도 안되고 더 먹어서도 안되고 딱 하루 세 번 먹는걸 원칙으로 하고 삽니다.

그런데 남편과 마주 앉아 먹는 일이 참으로 드물다 보니 아이도 멀리 타지로 떠나 보내고

혼자 식탁에서 어이 챙겨 먹을 수 있는지요...

산사에서 지나가는 새와 더불어 먹기라도 한다면야 정겹기라도 할터인데...

누구...나와 같이 밥 드실분? 하고 물어 볼 수도 없구..

요즈음 이 같은 부엌문화가 쏠쏠 할 꺼라 생각되네요.^^

간단 명료하게 홀가분하게 사는 방법 없을까요??

 
(115.94.149.220)
  
2012.10.26 (16:34:58)
[레벨:29]여명
 
 
 

먹이는 간단 명료....그런데요

이나이 되니 그리 먹으니 금시 배고파 지더라구요 ㅎㅎㅎ

빠삐용식탁....

절박함..삶의 절규... 그려 봅니다.

 
(1.231.236.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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