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山頂)에 떠오른 아침 햇살이 눈부십니다. 겨울 숲처럼 까칠한 재소리가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찬바람이 숲을 울리더니 오늘은 잠잠합니다.
이곳 조계산은 단조로운 산이면서도 바람이 많습니다.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는 가랑잎을 휘몰아가는 바람소리 때문에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곤 했지요. 저 아래 골짜기에 자리 잡은 큰절은 덜하지만, 5리 남짓 올라와 있는 우리 불일암(佛日庵)은 안계(眼界)가 트인 대신 늘 바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겨울철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바람속리에서 나는 문득문득 내 근본을 확인하는 수가 있습니다.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정착함이 없이 흘러 다니는 바람, 늘 움직임으로써 살아가는 바람, 바람은 멈추면 죽습니다. 그것은 바람이 아니지요.
구도(求道)의 길도 바람 같은 것이 아닐까요? 끝없이 찾아 나서는 데서 생(生)의 의미를 거듭거듭 다지는 도정(道程). 날마다 좋은 날(一日是好日)이란 말도 있듯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는 새날이어야지, 그날이 매양 그날이라면 늪에 갇힌 물처럼 썩게 마련입니다. 물도 바람처럼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운수(雲水)라는 말에는 매인 데 없이 홀가분하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산다는 뜻보다도, 늘 살아서 움직이라는 데에 본질적인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출가 수행자가 산으로 돌아와 기대고 있는 것도 날이 날마다 ‘좋은 날’을 마련하려는 뜻에서이지, 안일을 탐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편하고 한가함은 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시정(市井)에서 산으로 돌아올 그 무렵에는, 몇 해를 두고 모자라던 잠이나 수풀에 묻혀 실컷 자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요. 그런데 막상 초암(艸庵)을 짓고 살아보니 그럴 수가 없더군요. 그것은 적어도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태평성세라면 몰라도 늘 맞서 있는 현실이 아닙니까. 불의와 의가, 악과 선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증오와 사랑이··· 외부적인 현실도 현실이지만 내 안에서 맞서 갈등하고 있는 내면의 현상도 극복되고 정리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산에 돌아와 살면서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얼마만한 기능과 잠재력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원시적인 상태 속에 투신해 보았습니다. 먹고 사는 게 어떤 것인가를 알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서투르고 어설픈 것도 세월이 흐르니 자리가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관계를 전지(剪枝)하는 이른 내 자신의 출리(出離)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어떤 악조건 아래서라도 홀로 살 수 있는 힘을 길렀습니다.
산에는 맑은 이웃이 있습니다. 무심한 나무들이 있고, 다람쥐와 꿩과 노루와 토끼 같은 선한 것들이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줍니다. 암자 둘레에 자생하고 있는 대숲과 난초와 차나무들이 내 일상에 물기를 보태줍니다.
이따금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우편물을 어느 손이 검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가 살고 잇는 이 시대의 공기를 산에서 사는 내가 혹시 망각이라도 할까 봐, 나를 깨우쳐주기 위해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 땅에 뿌리박기 위해서라면 어떤 도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네의 처지 아닙니까.
이제는 또 점심을 지어야 할 시간이군요. 며칠 전에 읽은 법문(法門)을 되새기면서 사연을 막을까 합니다.
한 스님이 백장 선사에게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선사는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
홀로 ‘대웅봉’에 앉았노라 는 이 사실이 그 어떤 일보다도 기특한 일이라는 뜻이지요.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대웅봉에 의젓이 정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風塵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새해는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좋은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1977 . 1>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求道.....그리고 道程
또 스님의 맑은 이웃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