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
도서명 | 서 있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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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밖에를 좀 다녀왔으면 싶은데 선뜻 엄두가 나질 않는다. 미적미적 미루는 내 게으른 성미 탓도 없지 않지만, 가고 오면서 치러야 할 그 곤욕 때문에 오늘도 주저앉고 말았다.
곤욕이란 다른 게 아니라 버스 안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음이다. 운전사나 안내원한테는 그것이 미감(未感)을 일으키게 하는 예술이요,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일는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견딜 수 없는 시끄러움이다.
어느 누가 음악과 만담의 효용을 모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미구 계속될 때에는 그대로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요즘은 공해(公害)란 말이 너무 흔해빠져 언어공해를 가져올 지경이지만, 소음처럼 견딜 수 없는 공해는 또 없을 것이다.
출근길에 버스를 타보면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훤히 알 수 있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제1장부터 소음 속에 매몰된다. 만원 버스가 방향을 바꾸거나 갑자기 정거할 때 우리들 영원한 입석자(立席者)들은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갈잎처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안내원이 신호삼아 차를 두들겨대는 소리며 낡은 엔진에서 울리는 굉음(轟音), 머리 위 스피커에서 고래고래 쏟아지는 라디오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우리들을 몹시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한다.
사실 현대인들은 생각할 겨를을 거의 빼앗겨가고 있다. 인간만의 특수한 속성인 그 생각을 출근길에서부터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일터에서는 일에 쫓기느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고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누워버리거나 아니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기계장치가 또 생각을 못하게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이 기껏 생각할 수 있는 기회란 아침저녁 출근 시간뿐이다. 그런데 이 출퇴근 시간에조차 그 소음 때문에 생각할 수 없으니 우리들의 골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더 말할 것도 없이 텅텅 빌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골이 빌 때, 시쳇말을 빌어서 시정인(市井人)의 골이 빌 때, 범속한 동질화를 위해서는 더없이 다행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 인생을 창조적인 삶으로 연소(燃燒)해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운수업은 서비스업이다. 그렇다면 타고 가는 사람들의 뜻이 받아 들여져야 한다. 타는 사람들의 돈으로 바퀴가 굴러가고, 천정의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그 소리도 사실은 승객들이 낸 요금의 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타고 가는 승객들이 무관심하거나 입 벌려 말하기가 귀찮으니까 내버려두는 것이다. 운전사나 안내원은 아무 말이 없는 걸 보고, 자기네가 틀어대는 그 소음에 다들 공감하는 걸로 착각, 더욱더 볼륨을 올린다. 이런 일이 어찌 차 안에서 뿐일까 마는 이 ‘무관심’과 ‘말하기 귀찮음’이 결국 우리들을 멍들게 하고 골을 비게 한다.
시민의식이란 게 바로 이런 조그만 일에서부터 움터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우리들의 뜻을 펼쳐가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지, 운전사나 안내원을 귀찮게 하기 위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운전사나 안내원들은 사실 날마다 무리한 노동을 하고 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종일 차에서 흔들리면 온갖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길이란 피곤을 가중시키는 소음이 아니라 고요일 것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씨와 따뜻한 눈길일 것이다.
라디오 장치가 되어 있는데도 틀지 않고 가는 차를 타게 되면, 새삼스레 그 차의 운전사와 안내원에게 친화력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장거리 여행으로 고속버스라도 탈 경우에는 반드시 카스테레오가 없는 회사의 차를 골라 탄다. 택시를 탈 때에는 방향을 알리기 전에 라디오부터 꺼달라고 한다. 내가 아는 몇 사람들한테서도 그런다는 말을 듣고 내 괴벽만은 아닌 듯싶었다.
좀 허튼소리지만, 내 사주팔자에 이변이라도 생겨 조그만 왕국의 군주가 된다면, 나는 그날로 모든 버스의 운전사와 안내원을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국립 음악원 같은 데에다 편입시킬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로 새로운 운전사와 안내원의 소임을 맡게 할 것이다. 그러면 차타기나 먼 여행이 얼마나 유쾌할 것인가.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곤욕이란 다른 게 아니라 버스 안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음이다. 운전사나 안내원한테는 그것이 미감(未感)을 일으키게 하는 예술이요,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일는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견딜 수 없는 시끄러움이다.
어느 누가 음악과 만담의 효용을 모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미구 계속될 때에는 그대로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요즘은 공해(公害)란 말이 너무 흔해빠져 언어공해를 가져올 지경이지만, 소음처럼 견딜 수 없는 공해는 또 없을 것이다.
출근길에 버스를 타보면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훤히 알 수 있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제1장부터 소음 속에 매몰된다. 만원 버스가 방향을 바꾸거나 갑자기 정거할 때 우리들 영원한 입석자(立席者)들은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갈잎처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안내원이 신호삼아 차를 두들겨대는 소리며 낡은 엔진에서 울리는 굉음(轟音), 머리 위 스피커에서 고래고래 쏟아지는 라디오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우리들을 몹시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한다.
사실 현대인들은 생각할 겨를을 거의 빼앗겨가고 있다. 인간만의 특수한 속성인 그 생각을 출근길에서부터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일터에서는 일에 쫓기느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고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누워버리거나 아니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기계장치가 또 생각을 못하게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이 기껏 생각할 수 있는 기회란 아침저녁 출근 시간뿐이다. 그런데 이 출퇴근 시간에조차 그 소음 때문에 생각할 수 없으니 우리들의 골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더 말할 것도 없이 텅텅 빌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골이 빌 때, 시쳇말을 빌어서 시정인(市井人)의 골이 빌 때, 범속한 동질화를 위해서는 더없이 다행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 인생을 창조적인 삶으로 연소(燃燒)해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운수업은 서비스업이다. 그렇다면 타고 가는 사람들의 뜻이 받아 들여져야 한다. 타는 사람들의 돈으로 바퀴가 굴러가고, 천정의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그 소리도 사실은 승객들이 낸 요금의 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타고 가는 승객들이 무관심하거나 입 벌려 말하기가 귀찮으니까 내버려두는 것이다. 운전사나 안내원은 아무 말이 없는 걸 보고, 자기네가 틀어대는 그 소음에 다들 공감하는 걸로 착각, 더욱더 볼륨을 올린다. 이런 일이 어찌 차 안에서 뿐일까 마는 이 ‘무관심’과 ‘말하기 귀찮음’이 결국 우리들을 멍들게 하고 골을 비게 한다.
시민의식이란 게 바로 이런 조그만 일에서부터 움터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우리들의 뜻을 펼쳐가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지, 운전사나 안내원을 귀찮게 하기 위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운전사나 안내원들은 사실 날마다 무리한 노동을 하고 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종일 차에서 흔들리면 온갖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길이란 피곤을 가중시키는 소음이 아니라 고요일 것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씨와 따뜻한 눈길일 것이다.
라디오 장치가 되어 있는데도 틀지 않고 가는 차를 타게 되면, 새삼스레 그 차의 운전사와 안내원에게 친화력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장거리 여행으로 고속버스라도 탈 경우에는 반드시 카스테레오가 없는 회사의 차를 골라 탄다. 택시를 탈 때에는 방향을 알리기 전에 라디오부터 꺼달라고 한다. 내가 아는 몇 사람들한테서도 그런다는 말을 듣고 내 괴벽만은 아닌 듯싶었다.
좀 허튼소리지만, 내 사주팔자에 이변이라도 생겨 조그만 왕국의 군주가 된다면, 나는 그날로 모든 버스의 운전사와 안내원을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국립 음악원 같은 데에다 편입시킬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로 새로운 운전사와 안내원의 소임을 맡게 할 것이다. 그러면 차타기나 먼 여행이 얼마나 유쾌할 것인가.
<1975 . 3>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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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