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은 제비꽃답게
도서명 | 서 있는 사람들 |
---|
한평생 수학(數學)이 좋아서 그것만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수학자가 있다. 그는 숫자에서 미의식(美意識) 같은 것을 느낄 정도로 그 길에는 통달한 사람이다. 연구실에서 풀리지 않던 문제가 산을 오르거나 바닷가를 산책하는 무심한 여가에 문득 풀리는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한 그는 가끔 동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네는 지겹지도 않아서 평생을 두고 수학만을 그렇게 연구하는가? 자네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인류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때마다 그 수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고 했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건 제비꽃으로선 알 바가 아니라네.”
어떻게 들으면 아주 무례한 소리로도 들리지만, 그의 대답은 그만큼 자신과 신념에 넘쳐 있다. 그 꽃이 그 꽃답게만 핀다면 한두 송이를 피어가지고도 봄의 온 들녘을 술렁거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제비꽃이 제비꽃답게 피지 못하고 개나리처럼 핀다거나 혹은 벚꽃처럼 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정말 보아줄 수 없는 꼴불견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제비꽃만의 이변이 아니라 봄의 비극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기 빛깔을 지니고 살기가 정말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개인의 신념이나 개성이 둘레로부터 도전을 받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조준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도도히 흐르는 획일(劃一)의 강물에 휩쓸려 끝없이 표류해야 할 운명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 한때는 무관(無冠)의 제왕이노라고 제법 호기를 뽐내던 신문을 비롯하여, 그 사촌격인 주간지와 라디오, 텔레비전 등 이와 같은 대중 매체들이 우리들에게 획일적인 속물이 되어달라고 몹시도 보채대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빛깔을 빼앗고 얼을 앗아간다. 사고의 힘과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마약 같은 힘을 가지고 그 안에서만 허우적거리게 한다. 따라서 맹목적이고도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 신념을 갖기란 어렵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우리들은 서로 닮아간다. 주택단지의 집들처럼 그놈이 그놈 같기만 하다. 동작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범속하게 동질화되어 간다. 이쯤 되면 고유명사는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일련번호나 보통명사로서 우리들의 호칭을 대신해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러나 행인지 불행이지, 인간은 범속한 그 일상성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생명의 전개, 즉 창조적인 활동을 원한다. 모험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자기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욕구이다. 단 하나인 목숨도 희생해가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것은,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에서일까? 물론 우리는 산을 보고 산을 오른다. 그러나 산이 나를 불러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산을 오르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힘, 그것이 곧 살아 있는 생명력이다.
우리들의 창조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 많은 이웃들과 함께 얽혀 살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보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살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더기로 공포 발효된 새 법의 조문을 외워두어야 하고, 지식과 정보를 배당받으려고 비싼 값을 치르면서, 비인간적인 경쟁을 수없이 겪으면서 좁은 문을 뚫고 모여든다.
이건 누구나 느낌직한 일이지만, 나는 책가게에 들를 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 많은 지식과 정보 자료 앞에 압도당한다. 그토록 엄청나게 쌓여 있는 정보를 어떻게 다 소화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기가 질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중 몇장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왜소해진다. 그리고 조금 우울하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얼마만한 지식이 필요할까.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수록 좋을 것 같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유용하게 쓰이고 대우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따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지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때로는 과다한 지식이 인간을 매몰시킨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본래부터 따지기를 좋아한다. 그 가운데서도 지식인은 더욱 분별하고 사량(思量)하기를 좋아한다. 이유가 많은 동물이어서 단순 소박하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도리어 자승자박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이 말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하게 분별하고 있느냐의 뜻이다. 그와 같은 외부의 지식에만 의존할 때 우리는 자기 언어와 사유를 박탈당한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접촉의 과소(過少)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다에서 인간적으로 소외감을 갖게 된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는 나그네가 된다. 파우스트의 비유를 들출 것도 없이, 회색의 이론에 묻혀 생명의 나무가 시들고 있다.
그럼 안다는 것이 인간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지식이 인간을 형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까. 산스크리트어의 비즈냐나(Vijnana)는 인식(認識)을 가리킨 말이다. 어원으로 보면 아는 것을 쪼갠 것, 즉 분별의 지식이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지(分別智)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이 분별지는 인격과 직접 관계가 없다. 그저 아는 것만을 뜻할 뿐이다.
일직부터 인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지식을 분별 망상이라 해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 대신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지의 세계를 추구하고, 또한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무분별이란,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을 가리킴이 아니고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쪼개고 하는 분별 망상을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프라즈냐(prajna)란 지혜를 가리킨 말인데, 아는 것을 ‘가설한다’ ‘통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혜를 무분별자라고도 한다. 이 지혜는 인격과 직결된 것이므로 거기에는 행동과 책임이 따른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끝없는 빛, 즉 지혜라고 불전(佛典)에서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3
9세기 중국의 선승으로 위산이란 분이 있었다. 그의 어록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승가(僧家)의 발심수행자(發心修行者)에게 교재로 쓰일 만큼 널리 알려졌다. 그의 문하에 키가 7척이나 되고 총명과 재주가 비상하게 뛰어난 향엄이란 학인(學人)이 있었다. 위산은 향엄이 법기(法器)임을 한눈에 알아내고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을 떠나서 너의 본래 면목(面目)에 대하여 한마디 말해 보아라.”
향엄을 이리 생각하고 저리 따지면서 몇 마디 대답해 보았지만, 스승은 모두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가지고 다니던 여러 가지 책들을 꺼내어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고 들은 것을 젖혀놓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 위산 앞에 나아가 가르쳐주기를 청한다. 그러나 위산은
“내가 말하는 것이 내 소견이지, 그게 너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
라고 한다. 향엄이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아 가졌던 책을 다 불살라 버리고 홀로 수행하던 끝에 그 본래 면목을 깨닫게 된다.
창백한 지식인, 무력한 지식인이란 말을 우리들은 가끔 듣는다. 향엄은 곧 오늘의 우리다. 평소에는 온 세상을 주름잡듯 큰소리 떵떵 치던 그 지식인이 어떤 상황 앞에서는 찍소리 못하고 비슬비슬 주저앉는 것이다. 막상 그 행동이 요구될 대 그는 움츠러들고 만다. 지식이 이런 것이라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것이 인격과 별개인 것을 우리는 이런 데서도 찾아낼 수 있다.
따지고 쪼개는 분별에서는 지혜로운 행동이 나올 수 없다. 용기 있고 바람직한 행동은 이론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작용은 신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신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분별의 지식에서가 아니라 무분별의 지혜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을 형성하는 근원적인 요소는 회색의 이론인 지식이 아니라, 퍼내어도 퍼내어도 샘솟듯 솟아나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하려면 지혜에로까지 심화되고 승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형성의 기초교육 기관을 학교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 학교 교육의 맹점은 지식이 전달에만 안주하고 있는 점이다. 교육이란 어원을 살펴보면, 처넣은 것이 아니라 끌어내는 것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교육의 요체는 지식의 전달에 있지 않고 지혜의 계발(啓發)에 있다는 말이다. 메마르고 차디찬 정보의 교환에 그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호간에 인격이 교류될 수 없다. 옛날과는 달리 사제 간의 길이 단절되어버린 것도 바로 이 점에 그 원인이 있다.
스승의 그림자까지 밟기를 주저했던 그 시절엔 스승이 그만큼 절대적이고 존엄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식을 파는 일에 그쳐버린 오늘날의 관계는 마치 계약 노동자의 사이처럼 돼버린 것이다. 한 학기에 얼마를 내고 몇 시간짜리 지식과 정보를 얻어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계약 기간일지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그림자의 실체까지도 밟고 올라선다. 이러한 바탕에서 오늘의 인간은 형성되기 때문에 냉혹한 사회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들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스승의 상(像)을 꼽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 아직도 그분들이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은 많은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서가 아니다. 크고 있는 우리에게 개안(開眼)의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자국을 통해 우리 안에 접혀 있던 지혜의 날개를 펼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스승의 상은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들 자신을 조명해 주고 있다. 스승의 인격이 내 안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교육인가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 같은 스승의 상을 통해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지식이 지혜로 심화되려면 거기에는 어떤 여과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일상을 객관화하여 반성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순수한 집중을 통해서 생의 밀도 같은 것을 의식하는 일이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각하는 일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와 같은 원초적인 물음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부의 정보에서 벗어나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우리들이 홀로 있다는 것은 온전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과다한 접촉으로 인해 홀로 있는 시간을 거의 잃어버린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밀(密)에서 툭 트인 허(虛)를 익힐 필요가 있다. 무심한 경지가, 순수의식의 상태가 아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 있음은 보랏빛 외로움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당당한 인간실존이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순수해진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궁리(窮理)한다. 가장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깊은 것을 들여다보게 되고, 높은 것에 눈을 주게 된다. 또한 사람이 홀로 있을 때는 죽음이라든가 영원 같은 비일상적인 것을 헤아리게 된다. 저만치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본다. 껍질에서 알맹이를 찾는다. 그래서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은 텅 빈 데에 오묘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텅 비우지 않고는 새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자기 생명의 우물을 고이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입차문내(入此門內)하려면 막존지해(莫存知解)하라’고 타이른다.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즉 진리의 세계에 들어오려면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새 눈이 열릴 수 잇다는 간절한 당부다.
이와 같은 여과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자기의 무게와 존재의미를 자각한다.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창조적인 자기 생명을 전개할 수 있다.
4
우리의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 본질적인 스승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인간의 책임과 긍지가 있을 것 같다. 외부의 것은 사람이나 사물을 막론하고 나에게 다만 자극을 줄 뿐, 그것을 긍정적으로나 혹은 부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일도 소중하지만,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닐 때는 선뜻 버리고 돌아설 수도 있어야 한다. 사실 찾는 일보다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되풀이되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한 인간의 생애는 유일한 것이고 존엄한 것이라고 우리는 교과서와 그 밖의 지식에서 얻어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시시하게 살아버릴 수가, 아무렇게나 죽어버릴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일종의 자기연소 같은 것, 남이 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훨훨 타서 재가 되는 것이다.
유일하고 존엄하다는 인간 존재가 오늘처럼 비인간화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범속한 동질화의 강물에 둥둥 떠서 획일의 바다로 끝없이 표류해 가고 있다.
우리가 동물이 아니고 인간인 것은 회심(回心)할 줄 아는 데에 그 갈래가 있을 것이다. 그릇된 줄 알았을 때 선뜻 고칠 수 있는 바로 그 점이다. 그리고 회심의 고비에서 새로운 눈을 뜨는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보니, 어떤 지명인사가 살기 좋다는 미국으로 아주 살러 가버렸다는 기사를 읽고 같은 겨레의 입장에서 섭섭하고 조금은 괘씸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서 아주 가버린 줄 알았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그분이 돌아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3등표를 가지고 1등 칸에 앉아 있는 기분이어서 더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는 회심할 줄 안 인간이었다. 그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주위의 눈이 두려워 혹은 체면 때문에 시들어버리는 경우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한 행위를 가리켜 경솔하다고 탓할 사람도 있겠지만, 누가 뭐라 하건 그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자기답게 살려고 하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제비꽃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숨쉬고 있는 오늘의 대기는 제비꽃으로 하여금 자꾸만 제비꽃답게 피지 못하도록 작용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동일 품종의 꽃으로만 닮으라고 밤낮으로 보채대는 것이다. 우리들의 정원에 똑같은 꽃만 핀다고 가상할 때 우리들의 눈과 손길은 저절로 멀어지고 말 것이다. 모든 꽃들이 그 꽃답게 피어날 때 그 꽃밭은 장엄한 교향악의 조화를 이룰 것이다. 사계절을 두고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얼마나 좋겠는가.
<1973 . 3>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공유
0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오늘 첨 가입한 신인 입니다.
30년전 군대를 가서 서울 한복판 에서 군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힘든 훈련을 받고 군용트럭을타고 북악산 정상 팔각정에서 쥬스한잔 마시고 북악산에서 생활 하는데 하루는 유명한 요정을 구경 시켜준다고 선임이 대리고 나섰는데 삼청각과 대원각이었읍니다.
대원각위의 펌프장에 올라서면 대원각이 한눈에 보이지요.
밤이 되면 그많은 아가씨들이 색동옷을 입고 가야금을 타고 우리에겐 그시절 과연 여기가 서울장안 이구나를 읽깨워 주었죠.
세월이 지나 삼청각 대원각도 시대가 지나니 대원각이 길상사라는 절이 되었네요 .
올봄 옛추억을 더듬어.길상사를 갔는데 .건물등 크게 변한것이 없데요
참 그시절 많던 생동옷 아가씨들은 어데를 가고 까까머리 스님들만 게시니 .참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