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에 출가 수도하겠다고 들어왔던 사람이 오늘 아침 하산(下山)을 했다. 그의 말인즉, 일이 고되어 견딜 수가 없으니 내려가야겠다는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들지 말라고 했으니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생활이 솔바람소리나 들으면서 한가롭게 지내는 걸로 알았던 모양이다. 놀고먹을 수 없다는 것이 수도생활의 기본적인 태도인 걸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대중들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시간에는 빠짐없이 일터에 나와 다 같이 일을 하는 것이 승가(僧家)의 시퍼런 불문율이다. 하지만 나이 많은 노스님들이 일하는 것을 젊은 스님들은 딱하게 여긴다. 그만 들어가 쉬시라고 권해도 듣지 않는다. 어느 날 그런 노스님의 연장을 감추어버린다. 연장이 없으면 일터에 나올 수 없으니까. 노스님이 일터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젊은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식사 때인 공양(供養) 시간에도 노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그날은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먹을 자격이 없어서였다는 것.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이것은 승가의 보편적인 생활윤리다.
승가에서는 특히 처음 출가한 행자(行者)들에게 궂은일을 많이 시킨다. 그들을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통해 인욕(忍辱)하고 정진하라는 뜻에서다. 누구나 겪은 바지만 몸에 배지 않을 일로 몇 차례 코피를 쏟아야 한다.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뛰쳐나온 사람에게 공허하고 사변적인 이론이란 사실상 무력한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통해서 새로운 이치(眞理)를 터득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인간이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마솥을 한자리에서 아홉 번이나 갈아 건 행자가 있었다. 그는 솥을 걸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을 기울여 솥을 걸고 쇠손으로 곱게 흙을 발랐다. 스승이 와서 보고 잘못 걸렸으니 뜯어서 다시 걸라고 한다. 잘못 걸린 것 같지 않은데 다시 걸라고 하니 그 뜻을 거역할 수 없어 무너뜨리고 다시 건다. 이번에는 솥이 기울어졌으니 반듯하게 걸라는 것이다. 그는 묵묵히 다시 솥을 건다.
이렇게 하기를 아홉 번이나 했다. 대개의 경우라면 두어 번 걸었다가 욕지거리라도 해주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솥을 거는 동안 울컥울컥 치미는 화를 안으로 삭이면서 인욕이 무엇인지를 몸소 배웠고, 그 일을 통해서 스승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동시에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뒷날 이 인연으로 구정 선사(九鼎禪師)가 되어 묵묵히 솥을 걸던 그 의지력으로써 많은 감화를 끼친다.
출세간(出世間)에서 일상적인 행동을 떠나 수도가 따로 있을까. 경전을 연구하고 참선(參禪)하는 것도 결국은 모순과 갈등으로 얽히기 쉬운 우리들의 일상(日常)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라는 말은 이를 뒷받침한다.
일에 서툴거나 게으른 사람이 기도나 그 밖의 수행을 올바르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똑같은 그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에서 이치를 배우고, 이치를 일로써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수행자의 길이다.
<1973 . 10>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샘터) 中에서......
일하는 자는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