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겪는 일인데, 그때마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야릇한 기분에 부푼다. 시내에 나갔다가 우리 연못의 금붕어를 생각하여 비스킷 같은 걸 사들고 가게를 나설 때, 마음 한구석에 맑은 샘물이 흐른다. 세상에서는 이런 걸 가리켜 부성애(父性愛)라 하는지 모르지만….
금붕어들은 내 그림자만 보아도 우르르 몰려든다. 전에는 사람을 보면 피해 달아났는데 빵부스러기를 주면서부터 길이 든 것이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하루에 두어 차례씩, “애들아 모여라, 밥 먹자아”하고 부른다. 먹이를 흩어주면 뽀금뽀금 고 귀여운 입으로 잘들 먹는다. 이렇게 해서 그 애들은 나의 가족이 돼버린 것이다.
연못가에 설 때마다 잔잔한 기쁨이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사람끼리도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만 맺어질 것 같다. 관계이전에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서로가 무연(無緣)한 타인. 그가 넘어지건 굶주리건, 그의 시력이 원시이건 근시이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서로가 낯을 익히고 가벼운 미소를 짓고, 조금씩 속엣 말을 나누게 되면 그대부터는 관심이 달라진다.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한다. 그전까지는 주민등록증 같은 데나 기재될 그저 그런 지명(地名)이 친구가 거기서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로지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 고장은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정다운 동네로 바뀌어버린다. 지금 그곳은 바람이 불까, 비가 내릴까, 혹은 달이 돋았을까, 이처럼 그쪽의 날씨에까지 마음 쓰게 되는 것이다. 관계를 맺어놓으면 이와 같이 우리들 자신을 끝없이 확산(擴散)시킨다.
생 떽쥐베리는 <인간의 대지>에선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 아이가 벽에 기대어 소리 없이 울고 있다. 그 애의 울음을 달래어 이지러진 그 얼굴에 다시 웃음을 피어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평생을 두고 내 기억 속에서 울음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애가 우는 걸 내가 보았기 때문에 울음을 달래 의무와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때 내가 그 애의 울음을 보았을 것인가. 이웃이란 나누어 가진다는 뜻.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우리는 이웃이 된다. 이웃으로 해서 인간의 존재가 새롭게 확인되는 것이다.
벙긋벙긋 꽃 같은 미소를 머금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소녀가 있다. 우리는 그 미소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일찍이 그 소녀와 낯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손을 뻗쳐도 닿을 길이 없다. 관계 이전의 사람들은 이렇듯 서로가 다다를 수 없는 먼 거리에 내던져진 것이다. 꽃 같은 미소의 비밀은 그 누구도 넘어다볼 수 없는 것. 그것은 오랜 참을성과 예절로 맺어진 사람들끼리만 지닐 수 있는 은밀한 연둣빛 뜰이다.
우리가 때로 이 시대를 슬퍼하는 것은 저마다 문을 굳게 닫아걸고 절연(絶緣) 상태에서 안주하려는 흐름 때문이다. 우는 아이를 보고도 달랠 줄을 모른다. 자기 집 아이가 아니라고 고개를 돌려 스적스적 지나가버린다. 그런 우리들의 입가에서는 은밀한 그 미소가 사라져간다.
이래서 오늘 우리들은 모두가 혼자다.
<1973 . 10>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샘터) 中에서......
우리가 이시대를 슬퍼하는것은 저마다 문을 굳게닫아걸고
절연 상태에서 안주 하려는 흐름 때문 이다 이래서 우리는
모두가 혼자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