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하는 겁니까?”
이 말은 신문을 통해서 우리들 귀에 전해진 어떤 사형수의 피맺힌 애원이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사형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어째서 그 물음이 아직까지도 내 귓속의 귀에 울리고 있는 것일까.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그는 오랏줄에 묶이어 낯선 방으로 안내된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따라나선 그는 집행관이 인정심문 끝에, “최후로 할 말은 없는가?”라고 묻자 “집행하는 겁니까?”라고 힘없이 반문한다. 회한(悔恨)의 눈물로 옷자락을 적시면서 스물둘, 젊은 나이에 교수대의 이슬로 자라졌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의 사형 집행이 전해지던 날, 살기(殺氣)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천진스런 그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지난여름, 영화 <암흑가의 두 사람>을 보고 나와, 마냥 걸어서 절에까지 돌아오던 그런 심경이었다. 이와 같이 교수대에서 목매달려 죽어간 사람이 물론 그 하나만은 아니다. 추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던 수많은 사실들을 그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제정신을 잃고 본의 아니게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착각이나 흥분상태에서 저질러진 과실이다. 제정신이 돌아오면 모두가 한결같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속죄의 길을 찾는다. 그런데 오늘의 법률은 속죄하여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인류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현대이지만 형벌에 대해서만은 원시사회나 다름이 없다. 살인자는 살인을 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장 합리적이요 이성적인 법률에 의해 집행되는 사형제도는 곧 보복살인과 다름이 없는 셈이다.
사형 집행으로 일은 다 끝나는 것일까.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원한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원한은 오로지 사랑이 힘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속죄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처형된 한 많은 그 넋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데 이 같은 죽음에 돌을 던지 어떤 신문의 만평(漫評), ‘한번밖에 집행 못하다니…’라는 활자를 보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뿐인 육신에 그럼 몇 번이나 집행을 해야 한단 말인가. 휴머니즘의 맹점이 바로 이런 데 있을 것이다. 인간 본위의 사랑에는 늘 대립과 증오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만 살 수 있으면 된다는,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그 생각이 문제인 것이다.
현대인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 낚시나 사냥을 한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오락이요 취미이겠지만, 물고기나 숲속의 동물 편에서는 절박한 생사의 문제다. 여가를 선용한다면서 남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는 일은 분명 여가의 악용이 아닐 수 없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는 이런 맹점이 있다.
그러나 생명 본위의 사고에는 대립과 증오가 없다. 모두가 같은 생명의 부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별이 없는 절대 평등한 사랑을 자비(慈悲)라고 한다. 사람은 이 자비를 통해서만 비로소 만물 가운데서 영장(靈長)이 될 수가 있다.
“집행하는 겁니까?”
이 말은 한 사형수의 말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살고 싶어 외친 피맺힌 절규요, 깊은 뿌리에서 울려나온 우주의 소리다.
<1975 . 3>
글출처 : 서 있는 사람들(샘터) 中에서......
어느 사형수의 집행하는겁니까 이야기
감명깊게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