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읽은 것인가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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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책의 해’라고 해서 언론매체들은 전에 없이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얼마나 책을 등지고 살기에 따로 ‘독서주간’을 마련해야 하고 ‘책의 해’까지 선정해야 하는가. 독서를 한낱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는 풍토이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취미란 본업 외에 재미로 좋아하는 일을 가리킨다. 청소부나 농부가 독서를 취미로 여기고 있다면 이건 말이 된다. 청소부나 농부의 본업은 쓸고 치우는 일과 농사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이나 진리를 실현하려는 탐구자가 독서를 취미로 여기고 있다면 이건 말이 안 된다. 본업을 등진 소리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육신의 건강을 지탱하기 위해 먹는 이 식사를 취미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도 함께 깃들어 있다. 육신의 주림은 음식으로 다스릴 수 있지만, 정신의 주림은 무엇으로 다스리는가. 탐구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들의 정신은 잡초로 우거진 황량한 폐전이 되고 말 것이다.
흔히 받는 질문으로, 불교를 알려면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느냐이다. 무릇 종교의 세계는 책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 입문자들에게는 책이 손쉬운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책에만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지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책(종교적인 이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경전이나 종교적인 이론은 사실 공허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무엇을 거쳐 아는 것은 기억이지 앎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안 것을 내가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신앙인은 여우언하고 참된 것을 찾지만, 학자들은 그 해석을 찾는다. 우리들의 삶에는 해석이 필요치 않다. 삶은 몸소 사는 일과 스스로 체험하는 일과 순간순간 누려야 할 일들이다. 이래서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신비다. 종교적인 이론은 그 어떤 종파의 것일지라도 생동하는 삶에서 벗어난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 공허한 말의 덫에서 뛰쳐나와 스스로 당당하게 살 줄 알아야 한다.
《장자(壯者)》 외편 천도(天道)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군주인 환공(桓公)이 방안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수레를 만드는 목수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문득 망치와 끌을 놓고 일어서더니 환공에게로 와서 물었다.
“좀 여쭈어보겠습니다.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의 말씀이다.”
목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 성인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오래 전에 죽었지.”
그러자 목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말했다.
“한낱 수레를 만드는 목수인 주제에 네가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나불거리는 거냐. 네가 지금 한 말에 대해서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하비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수레를 만드는 목수가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일에서 터득한 경험으로 미루어 말한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쉽게 빠져 버립니다. 또 덜 깎으면 조여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게 아주 정밀하게 손을 놀려야 합니다. 그래야 바퀴가 제대로 맞아 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짐작할 뿐 말로는 어떻게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요령을 심지어 제 자식 놈한테조차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식 놈 역시 저한테서 배우지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일흔이 넘도록 저는 제 손으로 수레바퀴를 깎고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분명하게 깨달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고스란히 전ㅅ하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으시는 그 글이 그들이 뒤에 남기고 간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권위를 앞세우는 군주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사물의 이치를 통달한 목수 쪽이 훨씬 현명하다. 수레를 만드는 그는 밥벌이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에 종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목수의 개체적인 삶이 인간이 지향하는 전체적인 삶에 합일된 것이다. 고귀한 성인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책속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한낱 그 사람이 남긴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말은 살아 있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열매를 맺기 어렵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참선을 하건 염불을 하건 혹은 기도를 하건 남을 돕는 일을 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그 뿌리인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의 눈치나 살피면서 형식적으로 혹은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하는 채 해가지고는 억만 년을 지내더라도 뿌리내릴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는 오로지 두 길이 있다.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명상과 이웃에게 나누는 자비의 실현이다. 그것은 곧 지혜의 길이요 헌신의 길이다.
우리가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값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 속에서 길을 찾으라.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육신의 건강을 지탱하기 위해 먹는 이 식사를 취미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도 함께 깃들어 있다. 육신의 주림은 음식으로 다스릴 수 있지만, 정신의 주림은 무엇으로 다스리는가. 탐구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들의 정신은 잡초로 우거진 황량한 폐전이 되고 말 것이다.
흔히 받는 질문으로, 불교를 알려면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느냐이다. 무릇 종교의 세계는 책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 입문자들에게는 책이 손쉬운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책에만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지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책(종교적인 이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경전이나 종교적인 이론은 사실 공허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무엇을 거쳐 아는 것은 기억이지 앎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안 것을 내가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신앙인은 여우언하고 참된 것을 찾지만, 학자들은 그 해석을 찾는다. 우리들의 삶에는 해석이 필요치 않다. 삶은 몸소 사는 일과 스스로 체험하는 일과 순간순간 누려야 할 일들이다. 이래서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신비다. 종교적인 이론은 그 어떤 종파의 것일지라도 생동하는 삶에서 벗어난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 공허한 말의 덫에서 뛰쳐나와 스스로 당당하게 살 줄 알아야 한다.
《장자(壯者)》 외편 천도(天道)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군주인 환공(桓公)이 방안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수레를 만드는 목수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문득 망치와 끌을 놓고 일어서더니 환공에게로 와서 물었다.
“좀 여쭈어보겠습니다.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의 말씀이다.”
목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 성인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오래 전에 죽었지.”
그러자 목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말했다.
“한낱 수레를 만드는 목수인 주제에 네가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나불거리는 거냐. 네가 지금 한 말에 대해서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하비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수레를 만드는 목수가 말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일에서 터득한 경험으로 미루어 말한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쉽게 빠져 버립니다. 또 덜 깎으면 조여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게 아주 정밀하게 손을 놀려야 합니다. 그래야 바퀴가 제대로 맞아 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끝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짐작할 뿐 말로는 어떻게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요령을 심지어 제 자식 놈한테조차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식 놈 역시 저한테서 배우지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일흔이 넘도록 저는 제 손으로 수레바퀴를 깎고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분명하게 깨달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고스란히 전ㅅ하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으시는 그 글이 그들이 뒤에 남기고 간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권위를 앞세우는 군주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사물의 이치를 통달한 목수 쪽이 훨씬 현명하다. 수레를 만드는 그는 밥벌이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에 종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목수의 개체적인 삶이 인간이 지향하는 전체적인 삶에 합일된 것이다. 고귀한 성인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책속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한낱 그 사람이 남긴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말은 살아 있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열매를 맺기 어렵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참선을 하건 염불을 하건 혹은 기도를 하건 남을 돕는 일을 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그 뿌리인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의 눈치나 살피면서 형식적으로 혹은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하는 채 해가지고는 억만 년을 지내더라도 뿌리내릴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는 오로지 두 길이 있다.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명상과 이웃에게 나누는 자비의 실현이다. 그것은 곧 지혜의 길이요 헌신의 길이다.
우리가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값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 속에서 길을 찾으라.
1993. 3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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