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밤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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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한해가 끝나는 섣달 그믐날, 지나온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오늘밤처럼 멋지고 호사스런 그믐밤은 내 생애에서 일찍이 없었다. 이 오두막에 들어와 머문 지 꼬박 아홉 달이 되는데, 특히 이 겨울철이 내게는 고마운 시절이다.
오늘 아침도 영하 13도가 넘었다. 닷새째 강추위. 그래서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군불을 지핀다. 기온이 내려갈수록 불은 잘 들인다. 한동안은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보다 아궁이로 거슬러 나오는 연기가 많아 애를 먹었는데, 아궁이의 이맛돌을 낮추고 굴뚝 밑을 파내어 그 위에 굴뚝을 세웠더니 그 뒤부터는 순순히 잘 들인다.
영하의 날씨지만 바람기 없이 햇볕이 나면 한결 포근하게 느껴진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면서 오두막 안팎을 쓸고 닦았다. 향로에타고 남은 향끌텅이도 걸러 받았고 난초분에 물도 듬뿍 주었다. 휴지통에 쓰레기도 말끔히 치우고, 아궁이에 쌓인 재를 쳐내고 장작을 한 아름 지폈다. 그리고 마루방에 있는 난로에도 재를 치고 불쏘시개와 땔감을 미리 넣어두었다.
방에 들어와 언 몸을 녹이느라 아랫목 방석 밑에 발을 넣고,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었더니 스르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창호에 비친 햇살이 엷어져 있었다.
출출한 김에 차를 한잔 마셨다. 오전에 녹차를 마셨으니, 이번에는 홍차를 마시기로 했다. 인도 다질링에서 나온 부드럽고 향기로운 차다. 나는 오후 늦게나 밤에 홍차를 마시면 머리가 맑아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지만, 오늘은 밤이 깊도록 맑은 정신으로 지내고 싶어 일부러 홍차를 마셨다.
홍차는 그 빛깔과 맛이 여느 차와는 다른 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릇도 아주 얇고 희 고급스런 잔이 어울린다. 홍차에는 레몬을 한쪽 넣거나 혹은 코냑 두어 방울 떨어뜨리면 향기롭게 마실 수 있다. 소프트 케이크를 곁들이면 더욱 좋겠지만, 이 산중이 어디라고.
이제는 저녁 먹은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다른 때 같으면 해 떨어지기 전에 일찍 저녁을 먹고 치우는데, 오늘은 이것저것 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늦데 괴었다. 뭘 먹을까 하다가 이미 물에 불려놓은 떡살이 눈에 띄어 떡국을 끓여 먹기로 했다. 저녁은 간편하고 가볍게 먹는 것이 내 전래의 식성이다.
‘티 라이트(Tea light)’로 쓰이는 초를 흰 사발에 담아 몇 군데 켜놓았다. 난로에 불도 지폈다. 식탁에는 수선화가 담긴 유리컵을 올려놓았다. 이쯤 되면 풍악이 울려야 제격이리라. ‘소리통’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넣었다. 월광과 열정과 고별이 함께 녹음된 것.
자, 이만하면 어느 재벌이나 제왕의 식탁만 못하겠는가. 짐승스럽게 음식만 퍼먹는 게 아니라. 빛과 소리와 향기를 함께 음미하면서 조촐한 삶의 운치를 누리는 것이다. 혼자서 먹을 때일수록 더러는 이런 품격과 호사가 필요하다. 먹는 일도 그날 하루 삶의 한 몫이기 때문에 주유소에서 기름 담듯이 할 수가 없다. 더구나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 같은 밤임에랴.
며칠 전에 들추어본 고려시대 원감 충지 스님의 시가 떠오른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듣고 있으면 스위스의 제네바 수현이네 집이 떠오른다. 재작년 늦가을 유럽 나그넷길에 빨래 거리를 잔뜩 가지고 수현이네 집을 찾아갔었다. 수현이네 아버지 김창엽 님은 외교관으로 그때 유엔 우리 대표부에 근무 중이었는데, 음악을 아주 좋아해서 나그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박하우스의 연주로 오랜만에 귀에 익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나는 문득 베토벤을 다시 만난 감동을 받았었다. 그동안 나는 잡스런 음악에 귀를 어지럽히며 외도를 했구나 하는 자책이 뒤따랐었다.
수현이네 아버지를 따라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인터라켄을 거쳐 ‘융프라우 요흐’를 다녀올 때도 차 안에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와 소피 뮤터의 협연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를 감미롭게 들었었다. 만년설에 뒤덮인 해발 3,454고지의 청랭한 알프스의 정기와 산상의 눈부신 햇살이 베토벤의 영혼과 어울려 나그네 가슴을 한껏 부풀게 했다.
그때 받은 베토벤에 대한 감동으로 안개의 도시 뮌헨에 들르자마자 박하우스의 연주로 소나타 전집과 소피 뮤터가 협연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콤팩트디스크로 구했었다.
좋은 음악은 무디어지거나 녹슬기 쉬운 인간의 감성을 맑고 투명하게 다스려준다. 진짜 예술가는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나누어주는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불멸의 혼이다. 이래서 인생은 덧없고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했는가.
출가 수행승에게는 마음 붙여 몸담아 사는 곳이 제 집이요 제 고향이다. 명절이라고 해서 찾아 나설 집과 고향이 따로 있지 않다. 세월 밖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육신의 나이 또한 헤아리지 않는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갈 뿐이다.
거처만 하더라도 기댈 만하면 인연 따라 기대어 산다. 세상에서처럼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천하가 다 내 것이 아니면서도 또한 내 것일 수 있다. 구름이나 물처럼 흐르다가 잠시 멈추어 쉰다. 내 것을 지니게 되면 집착의 늪에 갇혀 흐름을 멈춘다. 그때는 이미 구름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이래서 수행자는 다른 말로 운수(雲水)라고도 한다.
무슨 인연으로 나는 이 산골의 오두막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묵은 둥지를 떠나 새롭게 시작한 오늘의 삶을 고마워한다. 언젠가는 이 껍데기도 벗어버리고 훨훨 뿌리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인생의 그 섣달 그믐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아무 미련도 없이 나그네 길을 훌쩍 떠나듯 그렇게 다음 생으로 떠나고 싶다.
나는 20년 남짓 홀로 사는 일에 이골이 나서, 이런 외떨어진 산중에서 홀로 지낼 때가 가장 홀가분하다. 내 삶이 가장 충만할 때가 바로 이런 격리된 환경에서다. 물론 홀로 지내는 데는 여러 가지 불편과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한데 모여 살면서 서로 아옹다옹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중생놀음에 견주면, 그 어떤 불편과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무리를 지어 어울려 살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없지 않지만,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시시콜콜한 일에 시간을 탕진하고 신경을 소모하는 일이 너무 아깝다.
나는 내 삶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 누구도 닮지 않으면서 내 식대로 살고자 한다. 자기 식대로 살려면 투철한 개인의 질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질서에는 게으르지 않음과 검소함과 단순함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도 포함된다. 그리고 때로는 높이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그 같은 삶의 리듬도 뒤따라야 한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개체의 삶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섣달 그믐밤에 너무 된소리를 했는가?
오늘 아침도 영하 13도가 넘었다. 닷새째 강추위. 그래서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군불을 지핀다. 기온이 내려갈수록 불은 잘 들인다. 한동안은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보다 아궁이로 거슬러 나오는 연기가 많아 애를 먹었는데, 아궁이의 이맛돌을 낮추고 굴뚝 밑을 파내어 그 위에 굴뚝을 세웠더니 그 뒤부터는 순순히 잘 들인다.
영하의 날씨지만 바람기 없이 햇볕이 나면 한결 포근하게 느껴진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면서 오두막 안팎을 쓸고 닦았다. 향로에타고 남은 향끌텅이도 걸러 받았고 난초분에 물도 듬뿍 주었다. 휴지통에 쓰레기도 말끔히 치우고, 아궁이에 쌓인 재를 쳐내고 장작을 한 아름 지폈다. 그리고 마루방에 있는 난로에도 재를 치고 불쏘시개와 땔감을 미리 넣어두었다.
방에 들어와 언 몸을 녹이느라 아랫목 방석 밑에 발을 넣고,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었더니 스르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창호에 비친 햇살이 엷어져 있었다.
출출한 김에 차를 한잔 마셨다. 오전에 녹차를 마셨으니, 이번에는 홍차를 마시기로 했다. 인도 다질링에서 나온 부드럽고 향기로운 차다. 나는 오후 늦게나 밤에 홍차를 마시면 머리가 맑아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지만, 오늘은 밤이 깊도록 맑은 정신으로 지내고 싶어 일부러 홍차를 마셨다.
홍차는 그 빛깔과 맛이 여느 차와는 다른 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릇도 아주 얇고 희 고급스런 잔이 어울린다. 홍차에는 레몬을 한쪽 넣거나 혹은 코냑 두어 방울 떨어뜨리면 향기롭게 마실 수 있다. 소프트 케이크를 곁들이면 더욱 좋겠지만, 이 산중이 어디라고.
이제는 저녁 먹은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다른 때 같으면 해 떨어지기 전에 일찍 저녁을 먹고 치우는데, 오늘은 이것저것 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늦데 괴었다. 뭘 먹을까 하다가 이미 물에 불려놓은 떡살이 눈에 띄어 떡국을 끓여 먹기로 했다. 저녁은 간편하고 가볍게 먹는 것이 내 전래의 식성이다.
‘티 라이트(Tea light)’로 쓰이는 초를 흰 사발에 담아 몇 군데 켜놓았다. 난로에 불도 지폈다. 식탁에는 수선화가 담긴 유리컵을 올려놓았다. 이쯤 되면 풍악이 울려야 제격이리라. ‘소리통’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넣었다. 월광과 열정과 고별이 함께 녹음된 것.
자, 이만하면 어느 재벌이나 제왕의 식탁만 못하겠는가. 짐승스럽게 음식만 퍼먹는 게 아니라. 빛과 소리와 향기를 함께 음미하면서 조촐한 삶의 운치를 누리는 것이다. 혼자서 먹을 때일수록 더러는 이런 품격과 호사가 필요하다. 먹는 일도 그날 하루 삶의 한 몫이기 때문에 주유소에서 기름 담듯이 할 수가 없다. 더구나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 같은 밤임에랴.
며칠 전에 들추어본 고려시대 원감 충지 스님의 시가 떠오른다.
날마다 산을 봐도
볼수록 좋고
물소리 노상 들어도
들을수록 좋다
저절로 귀와 눈
맑게 트이니
소리와 및 가운데
평안이 있네
볼수록 좋고
물소리 노상 들어도
들을수록 좋다
저절로 귀와 눈
맑게 트이니
소리와 및 가운데
평안이 있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듣고 있으면 스위스의 제네바 수현이네 집이 떠오른다. 재작년 늦가을 유럽 나그넷길에 빨래 거리를 잔뜩 가지고 수현이네 집을 찾아갔었다. 수현이네 아버지 김창엽 님은 외교관으로 그때 유엔 우리 대표부에 근무 중이었는데, 음악을 아주 좋아해서 나그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박하우스의 연주로 오랜만에 귀에 익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나는 문득 베토벤을 다시 만난 감동을 받았었다. 그동안 나는 잡스런 음악에 귀를 어지럽히며 외도를 했구나 하는 자책이 뒤따랐었다.
수현이네 아버지를 따라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인터라켄을 거쳐 ‘융프라우 요흐’를 다녀올 때도 차 안에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와 소피 뮤터의 협연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를 감미롭게 들었었다. 만년설에 뒤덮인 해발 3,454고지의 청랭한 알프스의 정기와 산상의 눈부신 햇살이 베토벤의 영혼과 어울려 나그네 가슴을 한껏 부풀게 했다.
그때 받은 베토벤에 대한 감동으로 안개의 도시 뮌헨에 들르자마자 박하우스의 연주로 소나타 전집과 소피 뮤터가 협연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콤팩트디스크로 구했었다.
좋은 음악은 무디어지거나 녹슬기 쉬운 인간의 감성을 맑고 투명하게 다스려준다. 진짜 예술가는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나누어주는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불멸의 혼이다. 이래서 인생은 덧없고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했는가.
출가 수행승에게는 마음 붙여 몸담아 사는 곳이 제 집이요 제 고향이다. 명절이라고 해서 찾아 나설 집과 고향이 따로 있지 않다. 세월 밖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육신의 나이 또한 헤아리지 않는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갈 뿐이다.
거처만 하더라도 기댈 만하면 인연 따라 기대어 산다. 세상에서처럼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천하가 다 내 것이 아니면서도 또한 내 것일 수 있다. 구름이나 물처럼 흐르다가 잠시 멈추어 쉰다. 내 것을 지니게 되면 집착의 늪에 갇혀 흐름을 멈춘다. 그때는 이미 구름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이래서 수행자는 다른 말로 운수(雲水)라고도 한다.
무슨 인연으로 나는 이 산골의 오두막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묵은 둥지를 떠나 새롭게 시작한 오늘의 삶을 고마워한다. 언젠가는 이 껍데기도 벗어버리고 훨훨 뿌리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인생의 그 섣달 그믐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아무 미련도 없이 나그네 길을 훌쩍 떠나듯 그렇게 다음 생으로 떠나고 싶다.
나는 20년 남짓 홀로 사는 일에 이골이 나서, 이런 외떨어진 산중에서 홀로 지낼 때가 가장 홀가분하다. 내 삶이 가장 충만할 때가 바로 이런 격리된 환경에서다. 물론 홀로 지내는 데는 여러 가지 불편과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한데 모여 살면서 서로 아옹다옹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중생놀음에 견주면, 그 어떤 불편과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무리를 지어 어울려 살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없지 않지만,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시시콜콜한 일에 시간을 탕진하고 신경을 소모하는 일이 너무 아깝다.
나는 내 삶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 누구도 닮지 않으면서 내 식대로 살고자 한다. 자기 식대로 살려면 투철한 개인의 질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질서에는 게으르지 않음과 검소함과 단순함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도 포함된다. 그리고 때로는 높이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그 같은 삶의 리듬도 뒤따라야 한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개체의 삶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섣달 그믐밤에 너무 된소리를 했는가?
1993. 3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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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스님답게 사시다가 스님답게 가셨지요.
스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구도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