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
달력 위의 3월은 산동백이 꽃을 피우고 있지만, 내 둘레는 아직 눈 속에 묻혀 있다. 그래도 개울가에 나가보면 얼어붙은 그 얼음장 속에서 버들강아지가 보송보송한 옷을 꺼내 입고 있다.
겨울산이 적막한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거기 새소리가 없어서일 것이다. 새소리는 생동하는 자연의 소리일 뿐 아니라 생명의 흐름이며 조화요 그 화음이다. 나는 오늘 아침, 겨울산의 적막 속에서 때아니 새소리를 듣는다. 휘파람새와 뻐꾸기와 박새, 동고비, 할미새와 꾀꼬리, 밀화부리, 산비둘기 그리고 소쩍새와 머슴새와 호반새 소리에 눈감고 숨죽이고 귀만 열어놓았다.
어제 시내를 다녀오는 길에 한 노보살님한테서 받은 선물을 오늘 아침에 풀어보니, 어떤 조류학자가 숲과 들녘과 섬을 다니면서 채록한 ‘한국의 새’ 소리들을 출판사에서 펴낸 녹음 테이프였다.
눈 속의 오두막에서 녹음으로 된 새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별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감흥이 일었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소리, 거기에 곁들인 아름다운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문득 초록이 우거진 숲에서 풋풋한 숲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다. 그리고 맑은 햇살이 비낀 숲속의 오솔길에 청초한 풀꽃과 푸른 이끼가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상상력이란 일찍이 자신이 겪은 기억의 그림자일 것이며, 아직 실현되지 않은 희망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고 좋은 상상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어둡고 불쾌한 상상력은 우리들을 음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생각이나 상상력도 하나의 업(業)을 이루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이름 봄에, 여수에서 배를 타고 남해의 외딴 섬 백도를 다녀온 일이 있다. 백도는 지저분한 사람들에 의해 아직은 더럽혀지지 않은 천연의 아름다운 무인고도다. 이 백도를 다녀오는 길에 시간이 있어, 거문도의 등대와 그곳으로 가는 길목의 동백꽃을 보기 위해 등성이 길을 올랐었다.
그때 문득 밀화부리소리가 들려 귀가 번쩍 띄었다. 동백꽃 아래서 뜻 아니 밀화부리소리를 들었을 때 어찌나 반가웠는지 마냥 가슴이 설렜다. 육지의 산에서는 오뉴월이 되어야 들리는 새소리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그날 하루의 삶에 그지없이 고마워했다.
오늘 아침 이 새들의 목청을 녹음으로 들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밀화부리와 휘파람새소리는 얼핏 들으면 비슷한 데가 있지만, 자세히 귀기울여보면 휘파람새는 밀화부리에 비해 성량이 빈약한 데다 조금은 딱딱하고 그 울림의 끝이 약하다. 밀화부리는 그 목청에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것 같은 아주 음률적인 소리를 띠고 있다.
또 한 가지 배운 것은, 숲에 신록이 번질 무렵 그 새소리는 가까이서 늘 들으면서도 이름은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그 새가 하나는 ‘검은등뻐꾸기’이고 다른 하나는 ‘벙어리뻐꾸기’라는 걸 알고 반가웠다.
영롱한 구슬이 도르르 구르는 것 같은 호반새소리를 듣고 있으니, 불일암의 오동나무가 떠오른다. 호반새는 부리와 발과 깃털 할 것 없이 몸 전체가 붉은 색을 띤 여름 철새다. 초입의 그 오동나무에는 새집이 네 개나 아래서 위로 줄줄이 뚫려 있는데, 초여름이 되면 딱따구리가 새끼를 치기 위해 부리로 쪼아 뚫어 놓은 구멍이다. 그런데 번번이 이 호반새가 와서 남이 애써 파놓은 집을 염치없이 차지하고 집주인 행세를 한다. 사람으로 치면 뻔뻔스런 집도둑인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목청만은 들을 만하다.
남녘에는 지금쯤 매화가 피어나겠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꼬리를 까불까불하면서 할미새가 자주 마당에 내려 종종걸음을 친다. 할미새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매화 소식이 궁금하다.
승주 선암사의 매화가 볼 만하다. 돌담을 끼고 늘어선 해묵은 매화가 그곳 담장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고풍스런 자태가 의연하고 기품 있는 옛 선비의 기상을 연상케 한다. 묵은 가지에서 꽃이 피어나면 그 은은한 향기가 나그네의 발길을 아쉽게 한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교수 한분은, 해마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부인을 동반하고 남도의 매화를 보러 간다. 그리고 그 길에 우리 불일암에 들러 밤이 깊도록 매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꽃을 사랑하고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우리들 자신도 얼마쯤은 꽃이 되어갈 것이다. 광양 어디엔가 수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는 드넓은 농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올 봄에 한번 가보고 싶다. 할미새소리를 듣다가 그 연상 작용으로 매화에 이끌리고 말았다.
영 너머에선 듯 아득히 뻐꾸기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뻐꾸기소리는 듣는 사람의 가슴에 어떤 아득함을 심어주는 것 같다. 밝고 명랑한 꾀꼬리소리는 귀로 들이고, 무슨 한이 밴 것 같은 뻐꾸기소리는 가슴으로 들린다. 밤에 우는 소쩍새의 목청이 차디찬 금속성을 띤 금관악기의 소리라면,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목청은 푸근한 달무리가 아련하게 감도는 목관악기의 소리일 것이다.
꾀꼬리의 목청은 여럿이서 들을 때 더욱 즐겁고, 뻐꾸기는 혼자서 벽에라도 기대고 들을 때가 좋다. 남도의 산에서는 해마다 5월 5,6일경이면 어김없이 꾀꼬리와 뻐꾸기가 잇따라 찾아온다. 처음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반가운지, 마치 앞산 마루에 막 떠오르는 보름달을 대하는 그런 반가움이다. 꾀꼬리소리는 가까이서 들을수록 좋고, 뻐꾸기는 아득하게 멀리서 들리는 소리가 더 어울린다.
오랜 전 춘원의 글에서 읽은 듯싶은데, 일갓집 처녀 아이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몸져누워 꼬치꼬치 말라간다. 어느 날 들여다보러 갔더니 그 아이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더란다.
“아저씨, 저는 죽으면 뻐꾸기가 되어 이산 저산으로 날아다니면서 내 한을 노래할래요….”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릴 적에 읽었던 이 말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산비둘기는 또 무슨 한이 있어 저리도 서럽게 서럽게 우는고. 흐느끼듯 우는 산비둘기소리를 들으면 내 가슴에까지 그 서러움이 묻어오는 것 같다.
우리 곁에서 새소리가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메마를 것인가. 새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생명이 살아서 약동하는 소리를 자연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그런데 이 새소리가 점점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새가 깃들이 않는 숲을 생각해 보라. 그건 이미 살아 잇는 숲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기와 그 화음을 대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삶 또한 크게 병든 거나 다름없다.
세상이 온통 입만 열면 하나같이 경제 경제 하는 세태다. 어디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가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행복의 소재는 여기저기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그런데 행복해질 수 있는 그 가슴을 우리는 잃어가고 있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겨울산이 적막한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거기 새소리가 없어서일 것이다. 새소리는 생동하는 자연의 소리일 뿐 아니라 생명의 흐름이며 조화요 그 화음이다. 나는 오늘 아침, 겨울산의 적막 속에서 때아니 새소리를 듣는다. 휘파람새와 뻐꾸기와 박새, 동고비, 할미새와 꾀꼬리, 밀화부리, 산비둘기 그리고 소쩍새와 머슴새와 호반새 소리에 눈감고 숨죽이고 귀만 열어놓았다.
어제 시내를 다녀오는 길에 한 노보살님한테서 받은 선물을 오늘 아침에 풀어보니, 어떤 조류학자가 숲과 들녘과 섬을 다니면서 채록한 ‘한국의 새’ 소리들을 출판사에서 펴낸 녹음 테이프였다.
눈 속의 오두막에서 녹음으로 된 새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별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감흥이 일었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소리, 거기에 곁들인 아름다운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문득 초록이 우거진 숲에서 풋풋한 숲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다. 그리고 맑은 햇살이 비낀 숲속의 오솔길에 청초한 풀꽃과 푸른 이끼가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상상력이란 일찍이 자신이 겪은 기억의 그림자일 것이며, 아직 실현되지 않은 희망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고 좋은 상상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어둡고 불쾌한 상상력은 우리들을 음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생각이나 상상력도 하나의 업(業)을 이루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이름 봄에, 여수에서 배를 타고 남해의 외딴 섬 백도를 다녀온 일이 있다. 백도는 지저분한 사람들에 의해 아직은 더럽혀지지 않은 천연의 아름다운 무인고도다. 이 백도를 다녀오는 길에 시간이 있어, 거문도의 등대와 그곳으로 가는 길목의 동백꽃을 보기 위해 등성이 길을 올랐었다.
그때 문득 밀화부리소리가 들려 귀가 번쩍 띄었다. 동백꽃 아래서 뜻 아니 밀화부리소리를 들었을 때 어찌나 반가웠는지 마냥 가슴이 설렜다. 육지의 산에서는 오뉴월이 되어야 들리는 새소리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그날 하루의 삶에 그지없이 고마워했다.
오늘 아침 이 새들의 목청을 녹음으로 들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밀화부리와 휘파람새소리는 얼핏 들으면 비슷한 데가 있지만, 자세히 귀기울여보면 휘파람새는 밀화부리에 비해 성량이 빈약한 데다 조금은 딱딱하고 그 울림의 끝이 약하다. 밀화부리는 그 목청에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것 같은 아주 음률적인 소리를 띠고 있다.
또 한 가지 배운 것은, 숲에 신록이 번질 무렵 그 새소리는 가까이서 늘 들으면서도 이름은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그 새가 하나는 ‘검은등뻐꾸기’이고 다른 하나는 ‘벙어리뻐꾸기’라는 걸 알고 반가웠다.
영롱한 구슬이 도르르 구르는 것 같은 호반새소리를 듣고 있으니, 불일암의 오동나무가 떠오른다. 호반새는 부리와 발과 깃털 할 것 없이 몸 전체가 붉은 색을 띤 여름 철새다. 초입의 그 오동나무에는 새집이 네 개나 아래서 위로 줄줄이 뚫려 있는데, 초여름이 되면 딱따구리가 새끼를 치기 위해 부리로 쪼아 뚫어 놓은 구멍이다. 그런데 번번이 이 호반새가 와서 남이 애써 파놓은 집을 염치없이 차지하고 집주인 행세를 한다. 사람으로 치면 뻔뻔스런 집도둑인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목청만은 들을 만하다.
남녘에는 지금쯤 매화가 피어나겠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꼬리를 까불까불하면서 할미새가 자주 마당에 내려 종종걸음을 친다. 할미새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매화 소식이 궁금하다.
승주 선암사의 매화가 볼 만하다. 돌담을 끼고 늘어선 해묵은 매화가 그곳 담장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고풍스런 자태가 의연하고 기품 있는 옛 선비의 기상을 연상케 한다. 묵은 가지에서 꽃이 피어나면 그 은은한 향기가 나그네의 발길을 아쉽게 한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교수 한분은, 해마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부인을 동반하고 남도의 매화를 보러 간다. 그리고 그 길에 우리 불일암에 들러 밤이 깊도록 매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꽃을 사랑하고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우리들 자신도 얼마쯤은 꽃이 되어갈 것이다. 광양 어디엔가 수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는 드넓은 농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올 봄에 한번 가보고 싶다. 할미새소리를 듣다가 그 연상 작용으로 매화에 이끌리고 말았다.
영 너머에선 듯 아득히 뻐꾸기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뻐꾸기소리는 듣는 사람의 가슴에 어떤 아득함을 심어주는 것 같다. 밝고 명랑한 꾀꼬리소리는 귀로 들이고, 무슨 한이 밴 것 같은 뻐꾸기소리는 가슴으로 들린다. 밤에 우는 소쩍새의 목청이 차디찬 금속성을 띤 금관악기의 소리라면,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목청은 푸근한 달무리가 아련하게 감도는 목관악기의 소리일 것이다.
꾀꼬리의 목청은 여럿이서 들을 때 더욱 즐겁고, 뻐꾸기는 혼자서 벽에라도 기대고 들을 때가 좋다. 남도의 산에서는 해마다 5월 5,6일경이면 어김없이 꾀꼬리와 뻐꾸기가 잇따라 찾아온다. 처음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반가운지, 마치 앞산 마루에 막 떠오르는 보름달을 대하는 그런 반가움이다. 꾀꼬리소리는 가까이서 들을수록 좋고, 뻐꾸기는 아득하게 멀리서 들리는 소리가 더 어울린다.
오랜 전 춘원의 글에서 읽은 듯싶은데, 일갓집 처녀 아이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몸져누워 꼬치꼬치 말라간다. 어느 날 들여다보러 갔더니 그 아이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더란다.
“아저씨, 저는 죽으면 뻐꾸기가 되어 이산 저산으로 날아다니면서 내 한을 노래할래요….”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릴 적에 읽었던 이 말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산비둘기는 또 무슨 한이 있어 저리도 서럽게 서럽게 우는고. 흐느끼듯 우는 산비둘기소리를 들으면 내 가슴에까지 그 서러움이 묻어오는 것 같다.
우리 곁에서 새소리가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메마를 것인가. 새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생명이 살아서 약동하는 소리를 자연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그런데 이 새소리가 점점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새가 깃들이 않는 숲을 생각해 보라. 그건 이미 살아 잇는 숲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기와 그 화음을 대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삶 또한 크게 병든 거나 다름없다.
세상이 온통 입만 열면 하나같이 경제 경제 하는 세태다. 어디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가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행복의 소재는 여기저기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그런데 행복해질 수 있는 그 가슴을 우리는 잃어가고 있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1993. 4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공유
0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아침에 새소리에 눈을 뜨고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뒷곁에서 지저기는 새소리들을 들으며 아침을 연다.
우리곁에서 새소리들이 사라진다면 너무 삭막 할것 같다.
우리집 뒷마당에는 이름모를 새들이 매일와서 떠들며 놀다간다.
그소리에 나의 마음이 맑아지는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