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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두 얼굴

오작교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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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여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마루에서 지냈다. 밤에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방을 쓰지 않았다. 천장이 낮고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은 여름을 지내기에는 답답하다.

   나 혼자서 사는 오두막이라 남의 시선이 없어 정장을 할 필요가 없다. 헐렁한 속옷 바람으로 맨발로 지내니 내 몸과 마음 또한 자연 그대로였다. 원래 우리 몸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사람끼리 한데 어울려 살다보니 남의 눈을 의식하고 필요 이상으로 겹겹이 걸치게 된 것이다.

   산을 내려올 때 양말을 신고 정장을 하면 이내 답답함을 느낀다. 온몸의 살갗이 숨 막혀 한다. 오두막으로 돌아오자마자 훨훨 벗어버리고 나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문명과 자연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심신이 함께 실감한다.

   나는 아직도 이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다음 어딘가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집을 한 채 짓고 싶다. 사람이 살기에 최소한의 공간이면 족하다. 흙과 나무와 풀과 돌 그리고 종이만으로 집의 자재를 삼을 것이다. 흙벽돌을 찍어 토담집을 짓고,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면 더 바랄 게 없다. 지붕은 물론 억새나 볏짚, 아니면 산죽으로 덮으면 된다. 일보는 집(정랑)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그것도 또한 흙집으로 지을 것이다.

   방은 구들을 놓고 재래식 종이 장판에 지선암에서 순 딱으로 만든 ‘영담한지’로 도배를 할 것이다. 마루에는 넓은 들창을 달아 밝게 하고 바람과 달빛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야겠지. 토담집일지라도 천장은 높아야 한다.

   그래야 실내공기를 맑게 유지할 수 있다. 방도 물론 창을 큼직하게 달아 밝게 할 것이다. 밝은 창 아래 조촐한 서탁을 두고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몇 권의 책, 그리고 방석 한 장이면 된다. 벽에는 아무것도 걸거나 치장하지 않고 텅 빈 벽으로 무한한 정신공간을 삼을 것이다.

   마루는 할 수 있으면 우물마루로 하여 나무와 마루의 품격을 살리고 싶다. 마루 끝에 나무로 짠 의자를 하나 놓아두고 무료하면 거기에 앉아 책도 읽고 솔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할 것이다.

   부엌은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도록 하고, 부뚜마가에는 크지 않은 무쇠솥을 걸어 익히거나 끓게 한다. 한쪽에 칸을 막아 간소하게 주방시설을 하고 싶다. 거기에 대나무로 홈통을 이어서 시냇물의 한 줄기가 지나가도록 하면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무방할 것이다.

   아, 나는 이렇게 꿈을 지니고 있다. 이런 내 꿈이 금생에 이루어질지 아니면 내생에나 가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꿈이 설사 희망사항에 그친다 할지라도 지금 나는 풋풋하게 행복하다.

   불일암에서 살 때부터 정갈하고 넓은 마루가 그리웠는데, 곤지암에 있는 보원요의 넓은 마루를 보고, 우리네 주거 공간에서 마루가 얼마나 시원한 몫을 하는지 새삼스레 헤아리게 되었다. 그 마루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우리는 모임을 가지고 있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은 주로 파리 길상사 후원회 회원들인데, 회비 명목으로 돈만 거두기가 그래서 경전을 교재로 하여 내가 강론을 해오고 있다.

   그 마루의 둘레는 이 집의 주인인 김기철 님이 빚어서 구워낸 백자 항아리며, 연잎을 주제로 한 그릇들이 있어 정갈한 마루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놓은 그릇이 오늘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맑고 아름답고 의젓하기까지 한 모습에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 것과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요즘 조용히 읽히고 있는 수상집 <꽃은 흙에서 핀다>의 산실이 바로 이 마루임을 밝혀두고 싶다.

   내 오두막의 둘레는 지난해처럼 노란 마타리꽃이 피어나고 있다. 산바람에 하늘거리는 마타리꽃은 가을의 입김을 머금고 있다. 꽃이 피어나기 전에는 마치 기장조 같은 모습인데 꽃이 피어나면 밤하늘에 은하수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꽃모양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확대경을 통해 보면 비록 작은 꽃이지만 꽃 하나하나가 그대로 하나의 우주라는 생각이 든다. 꽃도 작은 꽃이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이 오두막에 와 지내면서 문득문득 두 스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내가 20년 가까이 조계산에 사는 동안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수님들과 접촉이 있었다. 자칭 무엇을 깨달았다는 큰스님을 비롯해서 풋중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수많은 스님들과 한 산중에서 마주하고 지내기 한두 철이 아니지만 거개가 추상적인 군중의 얼굴이다. 그런데 그 많은 얼굴들 가운데서 유달리 두 얼굴이 내 기억의 언저리에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그들 삶의 모습이 그만큼 내게 인상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스님의 이름은 혜담. 그 나이 지금쯤 50의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송광사 선원에서 10년 가까이 지낸 스님인데 육신의 나이와는 관계없이 순수하고 부지런했다. 아름다움을 알고 탐구력 또한 강한 스님이다. 사철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정진시간이 끝나면 뜰에 돋아난 잡초를 혼자서 매고 낯으로 풀 베는 일을 즐겨 했다. 그는 풀향기에 도취되어 우리 불일암에 올라와서도 수북이 자란 풀을 베어주곤 했다. 누더기 속에 확대경을 지니고 다니면서 보잘것없는 풀꽃에서 아름다움을 캐내기도 하였다. 그는 맨발로 흙밟기를 좋아해서 일할 때는 거의 맨발인 채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묵묵히 일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손은 나뭇등걸처럼 거칠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바보 이반’의 손이 그처럼 투박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밝아오는 여명을 좋아하여 새벽 좌선시간에는 전등불을 켜는 일이 없었다. 그대로 어둠 속에 앉아 점점 밝아오는 새벽을 지켜보는 일로 새벽의 정진을 삼았다.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무소유의 수행자였다. 몸에 걸친 누더기 한 벌과 걸망(배낭) 하나뿐이었다. 한때는 라즈니쉬에 열중했었지만 책을 간직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또 어떤 일에 그의 삶을 불태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뜰이나 밭에서 잡초를 매고 있을 때면 문득문득 혜담 스님 생각이 난다. 승가의 서열로는 후배이지만 좋은 도반(道伴)으로 내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다.

   또 한 얼굴은 황선 스님. 내가 지금까지 대했던 수많은 수행자들 중에서도 가장 맑은 스님이다. 지금쯤 아마 40줄에 들어섰을 것이다. 송광사에서 지내는 동안 관음전에서 ‘천일기도’를 두 번 무사히 마친 스님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장기간 기도를 하게 되면 거의 타성에 젖어 형식적인 기도에 그치고 마는데, 황선 스님은 처음 시작부터 끝까지 천일 동안을 한결같이 수행했다. 그리고 기도하는 동안은 산문 밖에 한걸음도 내놓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이따금 우리 불일암에 올라와 차를 마시고 갈 정도였다.

   황선 스님은 꽃을 좋아하여 노스님들의 거처인 메마른 도성당 뜰에 꽃을 가꾸어 항시 꽃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텅 빈 그의 방은 방 한가운데 방석 하나와 문지방에 조그만 탁상시계, 그리고 화병에 한줄기 꽃이 꽂혀 있거나 수반에 꽃잎을 띄워놓곤 했었다.

   그도 탐구력이 강해서 기도의 여가에 독서를 많이 했다. 그리고 검은 빛을 좋아해서 고무신을 비롯해서 차반도 찻잔받침도 심지어 내의까지도 먹물을 들여 입었다. 연장을 가지고 차반 같은 일용품을 손수 만들어 자신도 쓰고 남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그 모서리가 예리해서 나 같은 사람은 그 모서리를 다듬어서 썼다. 그의 말로는 예리해야 긴장감이 있어 좋다고 했다.

   그가 조계산을 떠나던 날 새벽, 그의 방 앞에 있던 오지 수반과 받침대를 지게에 지고 불일암에 올라 왔었다. 후박나무 아래 있는 오지수반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어느 산중에서 지내고들 있을까. 두 사람 다 내가 찾아가보고 싶은 그런 도반이다. .
 
1993. 9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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