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피어나게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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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오두막의 둘레는 돌배나무와 산매화가 활짝 문을 열어 환한 꽃을 피워대고 있다. 그리고 바위 끝 벼랑에 진달래가 뒤늦게 피어나 산의 정기를 훨훨 뿜어내고 있다.
돌배나무는 가시가 돋쳐 볼품없고 쓸모없는 나무인줄 알았더니 온몸에 하얀 꽃을 피우는 걸 보고 그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산매화 역시 해묵은 둥치로 한겨울의 폭설에 꺾이고 비바람에 찢겨져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가지마다 향기로운 꽃을 달고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가까이서 그 둥치를 쓰다듬고 자주 눈길을 보내게 됐다.
진달래는 산자락보다 벼랑위에 피어있는 것이 아슬아슬한 바위와 조화를 이루어 훨씬 곱다. 벼랑위에 피어있는 진달래를 보고 있으면 그 꽃을 가지고 싶어 한 수로부인에게 소를 몰고 가던 한 노인이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고 노래한 향가(鄕歌)의 꽃을 바치는 노래 헌화가(獻花歌)가 떠오른다.
꽃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돌배나무는 돌배나무로서 있을 뿐이지 배나무를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산매화도 산매화로서 족할 따름 매화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벼랑위에 피어있는 진달래 또한 산자락의 진달래를 시새우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꽃들은 저마다 자기특성을 지니고 그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나며 다른 꽃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할 때 자칫 열등감 과 시기심 혹은 우월감이 생긴다. 견주지 않고 자신의 특성대로 제 모습을 지닐 때 그 꽃은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유달리 우리 인간들만이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과 비교하려고 든다. 가진 것을 비교하고 지위를 비교하고 학벌을 비교하고 출신교를 비교한다. 이런 결과는 무엇을 낳는가. 시기심과 열등감, 그래서 자기 분수 밖의 것을 차지하려고 무리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개인이 지닌 특성을 무시하고 사람의 값을 점수로만 매기고 따지려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다. 그래서 동료 간에 우애와 이해와 협력대신 시기심과 경쟁력과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가 어떤 특성과 기능과 인성을 지닌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않고, 대학을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또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로 그의 인격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 땅에서는 대학을 학문의 전당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결혼을 위한 수단과 사회생활의 발판쯤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의 흐름 때문에, 그 대학이 어떤 자질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운영되며 무슨 짓을 하는 곳인지 물으려하지 않는다. 그저 온갖 수단방법을 통해 거의 결사적으로 매달린 결과가 작금에 드러난 이 땅의 대학과 교육계의 한 단면이다.
현재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져 내려온 그릇된 사회적인 통념과 가치의식의 일대 전환, 그리고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 없이 들추어내고 잡아들이는 일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삶은 개인이나 사회나 인과관계로 엮어진 하나의 고리다. 누가 들어서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우리들 각자가 뿌리고 가꾸면서 거둔다. 또 사람은 저마다 그릇이 다르고 삶의 몫이 있기 때문에, 남의 그릇을 넘어다볼 필요도 없이 각자 자기 삶의 몫을 챙기면 된다.
그릇이 차면 넘치고, 남의 몫을 가로채면 자기 몫마저 잃고 마는 것이 우주의 질서요 신의 섭리임을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알아차려야 한다. 세상에는 공것도 거저 되는 일도 절대로 없다. 눈앞의 이해관계만 가지고 따지면 공것과 횡재가 있는 것 같지만,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인과관계의 고리를 보면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 횡재를 만나면 횡액을 당하기 일쑤다.
며칠 전에 만난 한 친구는 내게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스님은 거느린 가솔이 없으니 참 좋겠소. 무자식 상팔자라더니 요즘 내가 이 말을 절감하게 됐소.”
가끔 듣는 소리지만 이런 말은 한쪽만 보고 하는 소리다.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속을 썩이건 말건 하나만이라도 자식을 두고 싶을 것이다. 우리 같은 부류들은 아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인습의 대열에서 이탈된 예외자이니 문제 밖이다.
불교의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經集)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땅을 가진 이는 땅 때문에 즐거워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데가 없는 사람은 기뻐할 건덕지도 없으리라.”
옳은 말이다. 이와는 다른 입장이 바로 이어서 서술되어 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조심하고, 땅을 가진 이는 땅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이 또한 지당한 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차지한 것도 없지만 맑고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 마음이 끌리는 것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서인 것이다.
산바람에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그 빈자리에서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돌배나무는 가시가 돋쳐 볼품없고 쓸모없는 나무인줄 알았더니 온몸에 하얀 꽃을 피우는 걸 보고 그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산매화 역시 해묵은 둥치로 한겨울의 폭설에 꺾이고 비바람에 찢겨져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가지마다 향기로운 꽃을 달고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가까이서 그 둥치를 쓰다듬고 자주 눈길을 보내게 됐다.
진달래는 산자락보다 벼랑위에 피어있는 것이 아슬아슬한 바위와 조화를 이루어 훨씬 곱다. 벼랑위에 피어있는 진달래를 보고 있으면 그 꽃을 가지고 싶어 한 수로부인에게 소를 몰고 가던 한 노인이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고 노래한 향가(鄕歌)의 꽃을 바치는 노래 헌화가(獻花歌)가 떠오른다.
꽃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돌배나무는 돌배나무로서 있을 뿐이지 배나무를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산매화도 산매화로서 족할 따름 매화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벼랑위에 피어있는 진달래 또한 산자락의 진달래를 시새우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꽃들은 저마다 자기특성을 지니고 그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나며 다른 꽃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할 때 자칫 열등감 과 시기심 혹은 우월감이 생긴다. 견주지 않고 자신의 특성대로 제 모습을 지닐 때 그 꽃은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유달리 우리 인간들만이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과 비교하려고 든다. 가진 것을 비교하고 지위를 비교하고 학벌을 비교하고 출신교를 비교한다. 이런 결과는 무엇을 낳는가. 시기심과 열등감, 그래서 자기 분수 밖의 것을 차지하려고 무리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개인이 지닌 특성을 무시하고 사람의 값을 점수로만 매기고 따지려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다. 그래서 동료 간에 우애와 이해와 협력대신 시기심과 경쟁력과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가 어떤 특성과 기능과 인성을 지닌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않고, 대학을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또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로 그의 인격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 땅에서는 대학을 학문의 전당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결혼을 위한 수단과 사회생활의 발판쯤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의 흐름 때문에, 그 대학이 어떤 자질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운영되며 무슨 짓을 하는 곳인지 물으려하지 않는다. 그저 온갖 수단방법을 통해 거의 결사적으로 매달린 결과가 작금에 드러난 이 땅의 대학과 교육계의 한 단면이다.
현재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져 내려온 그릇된 사회적인 통념과 가치의식의 일대 전환, 그리고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 없이 들추어내고 잡아들이는 일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삶은 개인이나 사회나 인과관계로 엮어진 하나의 고리다. 누가 들어서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우리들 각자가 뿌리고 가꾸면서 거둔다. 또 사람은 저마다 그릇이 다르고 삶의 몫이 있기 때문에, 남의 그릇을 넘어다볼 필요도 없이 각자 자기 삶의 몫을 챙기면 된다.
그릇이 차면 넘치고, 남의 몫을 가로채면 자기 몫마저 잃고 마는 것이 우주의 질서요 신의 섭리임을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알아차려야 한다. 세상에는 공것도 거저 되는 일도 절대로 없다. 눈앞의 이해관계만 가지고 따지면 공것과 횡재가 있는 것 같지만,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인과관계의 고리를 보면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 횡재를 만나면 횡액을 당하기 일쑤다.
며칠 전에 만난 한 친구는 내게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스님은 거느린 가솔이 없으니 참 좋겠소. 무자식 상팔자라더니 요즘 내가 이 말을 절감하게 됐소.”
가끔 듣는 소리지만 이런 말은 한쪽만 보고 하는 소리다.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속을 썩이건 말건 하나만이라도 자식을 두고 싶을 것이다. 우리 같은 부류들은 아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인습의 대열에서 이탈된 예외자이니 문제 밖이다.
불교의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經集)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땅을 가진 이는 땅 때문에 즐거워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데가 없는 사람은 기뻐할 건덕지도 없으리라.”
옳은 말이다. 이와는 다른 입장이 바로 이어서 서술되어 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조심하고, 땅을 가진 이는 땅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이 또한 지당한 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차지한 것도 없지만 맑고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 마음이 끌리는 것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서인 것이다.
산바람에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그 빈자리에서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1993. 5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