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국가권력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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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때는 분명 봄이로구나‘다. 꽃들은 시새우지 않고 자신이 지닌 빛깔과 향기와 그 모습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벚꽃은 벚꽃답게 피어나고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꽃을 피움으로써 봄의 산과 들녘에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이렇듯 아름답고 평화롭게 자신이 할 일을 하면서 살아있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는데, 유독 사람들만이 계절을 등진 채 서로 시새우고 다투면서 시들어가는 것 같다.
이번 조계사 폭력사태를 지켜보면서 착잡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었다. 청정하고 신성해야 할 수도와 교화의 도량(사원)에 짐승들도 흉내 낼 수 없는 살벌한 폭력이 난무하고, 한 나라의 공권력이 함부로 침입하여 폭언과 폭력으로써 짓밟고 더럽힌 처사는 두고두고 우리들 기억을 얼룩지게 할 것이다.
정치권력의 일방적인 비호 아래 자행된 폭력사태는 우리가 기대했던 김영삼 문민정부에 대해서 배신감마저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진작 끝났을 일을 가지고 공권력이 불의의 온상을 일방적으로 감싸고 돌았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피차가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카톨릭측에 대해서는 실례될 표현일지 모르지만, 이와 유사한 사태가 만약 명동성당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할 때, 이 정부의 공권력이 조계사에서처럼 무자비하게 짓밟고 더럽힐 수 있었을까. 신성하기는 성당 이나 법당이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공권력만을 탓할게 아니라, 이는 불교계가 그동안 종교의 본분과 자주성을 망각한 채 추하게 처신해온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나는 돌이켜 생각하고 싶다.
낱낱이 기억해내기에도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불교종단의 행정사무승들은 전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치권력의 사주를 받아 걸핏하면 지지성명과 관제 데모에 앞장을 섰다. 선거 때만 되면 불교종단에서는 공공연히 여당후보의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종교의 본질과 자주성을 망각한 이런 행태를 지켜보면서 출가 수행자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거듭거듭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울적한 심정이었다. 이번 조계사에서 보인 공권력의 지나친 남용도 따지고 보면 종교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망각한 불교계를 얕잡아본 데서 자행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권력의 비호 내지는 묵인 아래 폭력이 자행된 이번 사태는 현 정권의 도덕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했다. 항간에 나돈 금전과 관계된 정치적인 흑막이 그 배후에 깔려있기 때문에 부패된 기득집단을 비호한 것으로 오해받을 만하다.
종교와 정치권력은 같은 시대와 사회에 존재하면서도 그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정치권력은 어디까지나 이해에 민감해서 비정하고 현실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활동은 영원한 진리와 만인을 위한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무한하다. 온갖 박해 속에서도 종교가 꺾이거나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우리 인간의 심성 안에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것을 등지고 출가한 독신 수행자가 무엇이 두려워서 세속의 덧없는 권력 앞에 저두굴신(低頭屈身)으로 추태를 부려야 하는가. 종교적인 인간은 근원적으로 아무런 야심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다. 만일 그 마음속에 털끝만치라도 어떤 야심이 있다면 그의 삶은 신성해질 수가 없다.
사람은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욕망과 아집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전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신비를 감지할 수 없다.
어떤 고을의 지방장관이 산중에 사는 한 스님의 덕화를 전해 듣고 몇 차례 뵙기를 청했지만 그 스님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하는 수 없이 몸소 산으로 찾아갔다. 이때 그 스님은 경을 보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지방장관은 심기가 뒤틀려 말했다.
“막상 대면해 보니 천리 밖에서 듣던 소문만 못하군!”
이에 스님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째서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고?”
이 말끝에 그는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스님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곁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느니라(雲在靑天 水在甁).”
그는 이 가르침에 알아차린 바가 있어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수행자가 세속의 권력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한 예다. 진정한 명예란 단순히 듣기 좋은 세상의 평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긍지와 자존심을 뜻한 말이다. 자기 자신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명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수행자들이여, 정치권력 앞에 의젓하고 당당하게 처신하라. 그런 수행자라면 종교적인 기 능 또한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수행자를 세상에서는 귀하게 여긴다.
자연은 이렇듯 아름답고 평화롭게 자신이 할 일을 하면서 살아있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는데, 유독 사람들만이 계절을 등진 채 서로 시새우고 다투면서 시들어가는 것 같다.
이번 조계사 폭력사태를 지켜보면서 착잡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었다. 청정하고 신성해야 할 수도와 교화의 도량(사원)에 짐승들도 흉내 낼 수 없는 살벌한 폭력이 난무하고, 한 나라의 공권력이 함부로 침입하여 폭언과 폭력으로써 짓밟고 더럽힌 처사는 두고두고 우리들 기억을 얼룩지게 할 것이다.
정치권력의 일방적인 비호 아래 자행된 폭력사태는 우리가 기대했던 김영삼 문민정부에 대해서 배신감마저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진작 끝났을 일을 가지고 공권력이 불의의 온상을 일방적으로 감싸고 돌았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피차가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카톨릭측에 대해서는 실례될 표현일지 모르지만, 이와 유사한 사태가 만약 명동성당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할 때, 이 정부의 공권력이 조계사에서처럼 무자비하게 짓밟고 더럽힐 수 있었을까. 신성하기는 성당 이나 법당이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공권력만을 탓할게 아니라, 이는 불교계가 그동안 종교의 본분과 자주성을 망각한 채 추하게 처신해온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나는 돌이켜 생각하고 싶다.
낱낱이 기억해내기에도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불교종단의 행정사무승들은 전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치권력의 사주를 받아 걸핏하면 지지성명과 관제 데모에 앞장을 섰다. 선거 때만 되면 불교종단에서는 공공연히 여당후보의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종교의 본질과 자주성을 망각한 이런 행태를 지켜보면서 출가 수행자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거듭거듭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울적한 심정이었다. 이번 조계사에서 보인 공권력의 지나친 남용도 따지고 보면 종교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망각한 불교계를 얕잡아본 데서 자행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권력의 비호 내지는 묵인 아래 폭력이 자행된 이번 사태는 현 정권의 도덕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했다. 항간에 나돈 금전과 관계된 정치적인 흑막이 그 배후에 깔려있기 때문에 부패된 기득집단을 비호한 것으로 오해받을 만하다.
종교와 정치권력은 같은 시대와 사회에 존재하면서도 그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정치권력은 어디까지나 이해에 민감해서 비정하고 현실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활동은 영원한 진리와 만인을 위한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무한하다. 온갖 박해 속에서도 종교가 꺾이거나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우리 인간의 심성 안에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것을 등지고 출가한 독신 수행자가 무엇이 두려워서 세속의 덧없는 권력 앞에 저두굴신(低頭屈身)으로 추태를 부려야 하는가. 종교적인 인간은 근원적으로 아무런 야심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다. 만일 그 마음속에 털끝만치라도 어떤 야심이 있다면 그의 삶은 신성해질 수가 없다.
사람은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욕망과 아집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전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신비를 감지할 수 없다.
어떤 고을의 지방장관이 산중에 사는 한 스님의 덕화를 전해 듣고 몇 차례 뵙기를 청했지만 그 스님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하는 수 없이 몸소 산으로 찾아갔다. 이때 그 스님은 경을 보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지방장관은 심기가 뒤틀려 말했다.
“막상 대면해 보니 천리 밖에서 듣던 소문만 못하군!”
이에 스님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째서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고?”
이 말끝에 그는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스님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곁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느니라(雲在靑天 水在甁).”
그는 이 가르침에 알아차린 바가 있어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수행자가 세속의 권력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한 예다. 진정한 명예란 단순히 듣기 좋은 세상의 평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긍지와 자존심을 뜻한 말이다. 자기 자신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명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수행자들이여, 정치권력 앞에 의젓하고 당당하게 처신하라. 그런 수행자라면 종교적인 기 능 또한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수행자를 세상에서는 귀하게 여긴다.
94. 4. 17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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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지도자는 권력자인가?지도자인가?아니면 깊은 수양을 쌓은 초인인가? 작금의 종교 지도자들은 권력이나 명예를 초월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러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 하시는 분이 얼마나 되실까? 법정 큰스님처럼 집착과 아집을 버리고 중생을 생각하고 마음의 평화를 갖도록 하시는 지도자를 평 신도들은 간절히 바란다. 권력과 명예를 따르기보다 중생들이 진심으로 따라오는 종교지도자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