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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풍(家風)

오작교 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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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몇 차례 눈이 내리더니 개울가에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기온이 더 내려가면 밤 사이에 얼어붙을 염려가 있어, 개울에서 집안으로 끌어들인 물줄기를 오늘 오후에 끊었다. 새봄이 올 때까지는 개울에서 직접 물을 길어다 써야 한다. 일이 좀 많아지겠지만 이 오두막의 형편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마루방에 장작 난로를 지피기 시작했다. 이 오두막의 쓰임새로 보아 마루방은 듣기 좋은 표현으로 거실 겸 주방이다. 난로 곁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뒷창문 아래 지극히 간소한 주방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주방과 문턱을 사이에 두고 식탁이 있는데, 벽에 기대 놓은 라디오에서 시끌시끌한 세상 소식을 전해준다. 한쪽에 조그만 오지 화병이 놓여 있어 간단명료한 차림새이지만 식탁에 운치를 거들어 주고 있다. 들꽃도 자취를 감춘 뒤라 노박덩굴을 꽂아 두었더니 노란 껍질과 빨간 열매가 볼 만하다.

   잎이 져 버린 숲에는 새들도 떠나가고 이따금 거센 바람만 휭휭 휘몰아친다. 나는 오두막의 이 훈훈한 난로 곁에서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거지도 제멋에 산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 오두막이 그 어떤 절보다고 조용하고 맑아서 좋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모든 것이 풍족해서 넘치고 있는데, 이곳은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지낼 만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열 시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비슷비슷 단조로운 하루 일과인데, 겨울철에는 오후에 뒤꼍에 나가 장작을 패는 일이 곁들여진다.

   어제는 질긴, 아주 질긴 나뭇등걸을 팼다. 전에 패려고 하다가 너무 질기고 단단해서 기운만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어이 쪼개 놓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간 나무 없다는데 너는 어째서 말을 안 듣느냐고 어르면서, 도끼로 내리칠 때마다 하나 둘 셋을 셌다. 열 번을 찍어도 끄떡 않더니 열두 번째 내리치는 도끼날에 마침 내 나뭇등걸은 두 쪽으로 빠개졌다. 그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도 열두 번을 찍으니 넘어가는구나. 새로운 묘리를 터득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나도 모진 놈이로구나 하고 자탄을 했다. 어지간히 하다가 안 되면 그만둘 것이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 그토록 질기고 여문 나뭇등걸을 기어이 쪼개 놓고 만 그 외고집에 스스로 씁쓸해 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기상 때문에 이 산중에서 혼자 살고는 있지만....

   불일암에서 지낼 때와 견주어 보면, 이곳은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전혀 없으니 우선 쓸데없는 말을 안 하게 되고 신경 소모도 적어 내 삶은 더욱 활기차다. 그리고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지내면서 본질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 게으름을 피울 때가 있어 스스로 꾸짖으며 돌이킨다. 며칠째 기상시간을 어기고 나서, 내일부터는 반드시 네 시에 일어날 것을 부처님 앞에 약속드립니다 하고 꾸벅꾸벅절을 하면서 다짐을 했다. 그런 다음부터는 제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일과를 차질 없이 치르게 되었다. 혼자서 사는 사람들은 꿋꿋한 의지력과 투철한 자기 질서가 없으면 이내 무너지고 만다.

   불일암을 떠나온 후로 그곳은 인연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다. 내가 '신원보증인'이 되어 그곳에서 다섯 사람이 출가 수행승이 되었는데, 그들이 번달아 도량을 가꾸면서 정진하고 있다. 내가 혼자서 살던 그 전과는 달리 여러모로 편리하게 고쳐졌다.

   나는 일을 벌이기를 싫어해서 불편하지만 그 전에 쓰던 대로 답습해 왔는데, 덕운이가 살면서 입식 주방으로 고쳐 위생적이고 편리해졌다.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할 일이 이제는 사라졌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느라고 내 한쪽 팔이 늘어났는데 이제는 수도꼭지만 틀면 샘물이 집 안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겨울철이면 추워서 끊여 먹으러 아래채 부엌에 들어가기가 죽으러 가는 일만큼이나 아주아주 머리 무거웠는데, 이제는 난방이 되어 오들오들 떨면서 먹지 않아도 된다.

   불일암으로 오르는 길이 너무 가팔라서 언제부터 길을 돌리려고 마음만 먹었지 실행을 못했는데, 지난해 가을 여럿이 모인 김에 의논이 되어 대숲 안으로 길을 돌려놓았다. 올라가는 데 힘이 덜 들고 운치 있는 길이 되었다. 목수 일에 능한 덕현의 솜씨로 아담한 대사립문도 하나 짜서 달아 놓았다.

   그리고 덕운이가 살면서 오르는 길목 두어 곳에 통나무로 걸터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쉬면서 음미하도록 선시禪詩도 몇 구절 적어 놓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다섯 사람들은 여기저기 선원(禪院)을 찾아다니며 정신을 하고 있다. 대만에서 몇 해 동안 교학공부를 하고 돌아온 덕조도 글줄이나 새기면서 메마른 이론에 팔리지 않고 선원에서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올겨울은 덕인의 차례가 되어 그가 암주 노릇을 하는데, 목욕할 수 있는 시설을 했으면 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 전부터 아쉬웠던 것이 더운물로 목욕할 수 있는 시설인데, 혼자 살면서 너무 호사스러운 일 같아 나는 결단을 못 내리고 미루어 왔었다.

   저마다 성격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 나름의 생각을 지니고 있다. 분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관리하는 암주의 뜻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거처하던 위채만은 불편하더라도 예전대로 이어가도록 당부해 두었다. 요즘은 돈을 들여가면서 망쳐 놓은 절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오랜만에 불일암에 내려가 쉬고 왔는데, 생각한 바가 있어 곧바로 수칙(守則)을 하나 마련하여 벽에다 붙여 놓으라고 보내 주었다. 우리가 살다간 후에라도 청정한 생활규범이 그 도량에서 이어져 내렸으면 하는 염원에서다.

   요즘의 절은 크고 작은 데를 가릴 것 없이 너무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전통적인 승가의 청정한 규범들이 있지만 거의 사문화되어 버린 현실이다. 그리고 주인이나 객의 생각이 미치지 못해 절의 법도를 어기고 무너뜨리는 일이 적지않다. 예전에는 절마다 그 절 나름의 가풍이 있어 미덕으로 지켜져 내려왔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런 가풍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질이 낮은 쪽으로 평준화되고 말았다.

   승보 사찰이라고 해서 불자들의 기대와 신망을 많았던 송광사의 경우만 하더라도, 보조 국사 이래 효봉 선사와 구산스님으로 이어져 내려온 목우가풍(牧牛家風)이 이제는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풍은 누가 만들어 이루는가. 더 물을 것도 없이 그 도량에 몸담아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서와 양식이 그 가풍을 만들며 이루고 있다. 또한 그 가풍이 그들을 지켜 주고 형성시키면서 이웃에 메아리를 전한다.

   불일암 수칙

   이 도량에 몸담아 사는 수행자는 다음 사항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1.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인 계행戒行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일로 정진을 삼는다.

   1. 도량이 청정하면 불. 법. 승 삼보가 항상 이 암자에 깃들인다. 검소하게 살며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1.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잡담으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침묵의 미덕을 닦는다.

   1. 방문객은 흔연히 맞이하되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가도록 한다. 특히 젊은 여성과는 저녁 공양을 함께 하지 않고 바래다주거나 재우지 않는다.

   1. 부모형제와 친지들을 여의고 무엇을 위해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지 매순간 그 뜻을 살펴야 한다. 세속적인 인정에 끄달리면 구도 정신이 소홀해 진다는 옛 교훈을 되새긴다.

   이 수칙을 지키는 수행자에게 도량의 수호신은 환희심을 낼 것이다.

   이상.
 
<95 .12>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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