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정보 속에서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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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전에 램프의 등피(燈皮)를 닦았다. 등피란 말이 사전에나 실려 있을 정도로 이제는 귀에 선 말이 되었지만, 내게는 아직도 심지와 함께 익숙하다. 추운 겨울철이라 외풍에 펄럭거리는 촛불보다는 램프불이 아늑하고 정답다.
요즘은 아무리 깊은 산중의 절이라 할지라도 전기가 들어와 램프를 켤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또 그 시절은 석유石油라고 부르는 등유가 질이 나빠 불을 켜면 그을음이 많이 생겼다. 타는 냄새가 역겹고 눈이 시렸다. 따라서 그을음 때문에 번번이 등피를 닦아야 했다.
요즘은 그런 등피도 구할 수 없게 됐지만, 등피를 만드는 기술이 너무 조잡해서 기포(氣泡) 투성이라 자칫하면 깨졌다. 그래서 등피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깊은 밤 창 밖에는 바람소리가 스산하고 뒷골에서 노루 우는 소리가 메아리칠 때, 벽에 등을 기대고 램프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월이 고개를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전에 밤 아홉 시 뉴스를 라디오에서 듣다가 그만 꺼 버렸다, 오두막의 유일한 정보 매체이지만 별로 귀담아 들을 것도 없는 한낱 시끄러운 소음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그때 그때 통제하지 않으면 듣는 쪽의 속틀을 마구 어지럽혀 놓는다. 이런 쓸데없는 바깥 소음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 소리 없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흔히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을 일컬어 '정보화사회'니 '정보화시대'니 하여 그 정보에 대한 접촉이 많을수록 좋고 정보를 모르면 뒤처진 걸로 여긴다. 특히 통신시설이 발달되고 날이 갈수록 생존 경쟁이 치열하고 비정한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정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먹고 먹히는 (이런 표현이 우리 언어 감각에는 지극히 불쾌하지만) 일로 직결된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도 사람의 처지와 그 직업에 따라 한결같을 수만은 없다. 때로는 과다한 그 정보가 도리어 혼란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고, 멀쩡한 사람을 정보의 노예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세상의 흐름을 누구나 똑같이 타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람에 따라 삶의 뜻과 그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흐름을 따를 수도 있고 그 흐름을 거스를 수도 있어야 한다. 라디오나 TV 혹은 신문을 두고 한번 생각해보자. 라디오와 TV는 그 프로그램의 정해진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엄선할 겨를도 없이 정해진 시간만큼 쏟아 놓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생활에 모두 유용한 정보일 수 있겠는가. 열 중에서 둘이나 셋이 필요한 정보라면 여덟이나 일곱은 무용한 정보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유용하게 써야 할 시간과 기운을 무가치한 일에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신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문은 한정된 지면으로 짜이기 때문에 그 지면을 메우느라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필요치도 않은 잡다한 정보를 늘어놓는다. 특히 요즘의 신문은 광고의 홍수로 언론의 사명보다는 상업주의에 추종하면서 과소비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신문에 쓰일 신문용지를 만들어 내느라고 이 지구상에서 수많은 나무가 베어지고 숲이 사라져 지구의 사막화를 제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신문지에 시간과 생각을 빼앗긴다면 우리 삶이 너무도 아깝다.
삶에 필요한 지식은 로로지 삶 그 자체 안에서 얻을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메마른 지식이 아니라 밝은 지혜다. 지혜는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움튼다. 그러므로 진정한 스승은 입을 열어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곁에서 우리는 배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은 더욱 좋다.
왕년에 한 나라의 정보를 혼자서 다 거머쥐고 흔들던 정보 책임자가 남긴 다음 같은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실종되어 아직도 생사를 알 수 없는 그는 말했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그 많은 정보 때문에 그는 마음 편안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란 속담도 우리 옛 어른들의 삶의 지혜에서 나 온 말이다.
맑은 정신을 지니고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즐기는 태도일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대로 덩달아 움직인다면 마음의 평온과 충실을 기하기 어렵다. 남들처럼 사는 생활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가져야 한다. 바로 그것이 살아가는 기쁨이 될 수 있다.
정보에 대한 지나친 욕구도 일조의 소유욕이다. 인간을 한정 시키는 소유욕에 사로잡히면 그 비좁은 울 안에 갇혀서 지혜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도의 비폭력주의 사회운동가이면서 구루(영적인 스승)이기도 한 비노바 바브는 교육에 대한 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그의 말은 이어진다.
처음 이 글을 대하면 누구나 갸우뚱할 것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병든 마음을 나타내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니 어찌 된 말인가.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할 일이다. 저 많은 책들, 관념의 세계에서 묻혀서 책 밖의 생동하는 세상을 모른다면 그게 어찌 온전한 지성일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나도는 책이란 그게 다 양서일 수는 없다. 두 번 익을 가치도 없는 책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이 쌓여가고 있는가. 삶을 충만케 하는 길이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넘어서서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독자적인 사유와 행동을 쌓아감으로써, 사람은 그 사람만이 지니고 누릴 수 있는 독창적인 존재가 된다.
여기서 비노바 바브가 말하고자 한 것은 책에만 의존하는 책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이지, 아예 책을 등지거나 멀리하라는 말은 아니다.
몇 권 안 되는 내 둘레의 책을 돌아보면서 그 책들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여겨질 때가 더러 있다. 대형 서점 에 들어서면 눈이 어지럽고 귀가 멍멍해질 때도 있다. 이 넘치는 지식과 정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 것인지 막막해진다.
지식과 정보는 음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사람의 식성과 체질에 알맞게 먹으면 제대로 소하를 시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체질과 소화력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먹으면 소화 불량을 일으켜 도리어 해가 된다. 조화와 균형에 대한 감각은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포만과 탐욕의 시대에 자제하고 절제할 줄 아는 인간의 품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흐름과 소용돌이에 휩쓸려 끝없이 표류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로 삶을 새롭게 하고 그 가치를 드높이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요즘은 아무리 깊은 산중의 절이라 할지라도 전기가 들어와 램프를 켤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또 그 시절은 석유石油라고 부르는 등유가 질이 나빠 불을 켜면 그을음이 많이 생겼다. 타는 냄새가 역겹고 눈이 시렸다. 따라서 그을음 때문에 번번이 등피를 닦아야 했다.
요즘은 그런 등피도 구할 수 없게 됐지만, 등피를 만드는 기술이 너무 조잡해서 기포(氣泡) 투성이라 자칫하면 깨졌다. 그래서 등피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깊은 밤 창 밖에는 바람소리가 스산하고 뒷골에서 노루 우는 소리가 메아리칠 때, 벽에 등을 기대고 램프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월이 고개를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전에 밤 아홉 시 뉴스를 라디오에서 듣다가 그만 꺼 버렸다, 오두막의 유일한 정보 매체이지만 별로 귀담아 들을 것도 없는 한낱 시끄러운 소음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그때 그때 통제하지 않으면 듣는 쪽의 속틀을 마구 어지럽혀 놓는다. 이런 쓸데없는 바깥 소음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 소리 없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흔히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을 일컬어 '정보화사회'니 '정보화시대'니 하여 그 정보에 대한 접촉이 많을수록 좋고 정보를 모르면 뒤처진 걸로 여긴다. 특히 통신시설이 발달되고 날이 갈수록 생존 경쟁이 치열하고 비정한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정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먹고 먹히는 (이런 표현이 우리 언어 감각에는 지극히 불쾌하지만) 일로 직결된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도 사람의 처지와 그 직업에 따라 한결같을 수만은 없다. 때로는 과다한 그 정보가 도리어 혼란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고, 멀쩡한 사람을 정보의 노예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세상의 흐름을 누구나 똑같이 타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람에 따라 삶의 뜻과 그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흐름을 따를 수도 있고 그 흐름을 거스를 수도 있어야 한다. 라디오나 TV 혹은 신문을 두고 한번 생각해보자. 라디오와 TV는 그 프로그램의 정해진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엄선할 겨를도 없이 정해진 시간만큼 쏟아 놓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생활에 모두 유용한 정보일 수 있겠는가. 열 중에서 둘이나 셋이 필요한 정보라면 여덟이나 일곱은 무용한 정보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유용하게 써야 할 시간과 기운을 무가치한 일에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신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문은 한정된 지면으로 짜이기 때문에 그 지면을 메우느라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필요치도 않은 잡다한 정보를 늘어놓는다. 특히 요즘의 신문은 광고의 홍수로 언론의 사명보다는 상업주의에 추종하면서 과소비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신문에 쓰일 신문용지를 만들어 내느라고 이 지구상에서 수많은 나무가 베어지고 숲이 사라져 지구의 사막화를 제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신문지에 시간과 생각을 빼앗긴다면 우리 삶이 너무도 아깝다.
삶에 필요한 지식은 로로지 삶 그 자체 안에서 얻을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메마른 지식이 아니라 밝은 지혜다. 지혜는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움튼다. 그러므로 진정한 스승은 입을 열어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곁에서 우리는 배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은 더욱 좋다.
왕년에 한 나라의 정보를 혼자서 다 거머쥐고 흔들던 정보 책임자가 남긴 다음 같은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실종되어 아직도 생사를 알 수 없는 그는 말했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그 많은 정보 때문에 그는 마음 편안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란 속담도 우리 옛 어른들의 삶의 지혜에서 나 온 말이다.
맑은 정신을 지니고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즐기는 태도일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대로 덩달아 움직인다면 마음의 평온과 충실을 기하기 어렵다. 남들처럼 사는 생활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가져야 한다. 바로 그것이 살아가는 기쁨이 될 수 있다.
정보에 대한 지나친 욕구도 일조의 소유욕이다. 인간을 한정 시키는 소유욕에 사로잡히면 그 비좁은 울 안에 갇혀서 지혜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도의 비폭력주의 사회운동가이면서 구루(영적인 스승)이기도 한 비노바 바브는 교육에 대한 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집 안에 약병들이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병을 앓고 있다고 미루어 헤아린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집이 책으로 꽉 차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게 옳은 생각일까?"
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그의 말은 이어진다.
"건강의 첫째 법칙은 절대로 필요한 경우에만 약을 복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성의 첫째 법칙은 가능한 한 책속에 눈을 파묻지 않도록 하는 일이어야 한다.
약병들을 병든 신체를 나타내는 신호로 보듯이, 우리는 세속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모든 책들은 병든 마음을 나타내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
약병들을 병든 신체를 나타내는 신호로 보듯이, 우리는 세속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모든 책들은 병든 마음을 나타내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
처음 이 글을 대하면 누구나 갸우뚱할 것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병든 마음을 나타내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니 어찌 된 말인가.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할 일이다. 저 많은 책들, 관념의 세계에서 묻혀서 책 밖의 생동하는 세상을 모른다면 그게 어찌 온전한 지성일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나도는 책이란 그게 다 양서일 수는 없다. 두 번 익을 가치도 없는 책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이 쌓여가고 있는가. 삶을 충만케 하는 길이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넘어서서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독자적인 사유와 행동을 쌓아감으로써, 사람은 그 사람만이 지니고 누릴 수 있는 독창적인 존재가 된다.
여기서 비노바 바브가 말하고자 한 것은 책에만 의존하는 책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이지, 아예 책을 등지거나 멀리하라는 말은 아니다.
몇 권 안 되는 내 둘레의 책을 돌아보면서 그 책들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여겨질 때가 더러 있다. 대형 서점 에 들어서면 눈이 어지럽고 귀가 멍멍해질 때도 있다. 이 넘치는 지식과 정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 것인지 막막해진다.
지식과 정보는 음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사람의 식성과 체질에 알맞게 먹으면 제대로 소하를 시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체질과 소화력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먹으면 소화 불량을 일으켜 도리어 해가 된다. 조화와 균형에 대한 감각은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포만과 탐욕의 시대에 자제하고 절제할 줄 아는 인간의 품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흐름과 소용돌이에 휩쓸려 끝없이 표류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로 삶을 새롭게 하고 그 가치를 드높이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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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https://park5611.pe.kr/xe/1048259(220.87.2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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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