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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매화가 피다

오작교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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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이 깊은 겨울, 오두막 지붕 아래 살아 있는 생물은 나하고 한 그루 매화분(盆)뿐이다. 살아 있는 것끼리 마주보면서 이 겨울을 지내고 있다. 곁에 화분이 하나 있으니 혼자서 지내는 것 같지가 않다. 내 마음과 눈길이 수시로 가면서 보살피다 보면 지붕 밑이 훈훈하고 따뜻하다.

   바깥은 영하 18도를 오르내리는 그런 추위인데도 '두 식구'의 둘레는 늘 훈훈하다.

   이 매화분은 작년 겨울도 나와 함께 지내면서 그 꽃과 향기로 오두막을 가득 채워주었었다. 양재동 꽃시장에서 구해 온 것인데, 꽃을 보고 나서는 화분채 흙에 묻어 두었다가 늦가을에 집안에 들여 놓았다. 차 찌꺼기 삭힌 물을 가끔 주었을 뿐 따로 거름은 주지 않았다.

   초겨울 접어들면서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낮에는 방안에 들여놓아 창호로 비쳐드는 햇볕을 쪼여주고 밤으로는 대청마루에 내놓았다.

   지난 1월 초순, 양철 지붕에 싸락눈 뿌리는 소리가 들리던 날, 매화는 마침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청초한 꽃과 은은한 그 향기로 함께 사는 식구의 가슴을 맑고 향기롭게 채워주었다. 식물은 공을 들인 만큼 보답을 한다. 결코 은혜를 등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날부터 열네 송이의 꽃이 차례차례 피어났다. 눈 속에 피어난 이런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고 한다. 봄소식을 알린다는 뜻으로 일지춘(一枝春)이라고도 하고, 맑은 손님에 견주어 청객(淸客)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꽃빛깔이 희고 그 자태가 고결하다고 해서 매화를 일명 옥골(玉骨)이라고도 한다.
 
IMG_7853.jpg
 

   매화에도 백매, 홍매 등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꽃받침이 연초록인 단엽(單葉) 청매(靑梅)가 그중 귀하다. 이를 벽매(碧梅)라고도 하는데, 옥색이 감돌 만큼 꽃이 희고 그 향기 또한 다른 매화보다 훨씬 격이 높다. 특히 분에 기르는 매화는 단연 이 청매를 으뜸으로 친다.

   소식(蘇軾)은 그의 매화성개(梅花盛開)에서 이렇게 읊었다.
 
남해의 신성이 사뿐히 땅에 내려
달빛에 흰옷 입고 와서 문을 두드리네.


   매화를 신선에 견준 발상도 발상이지만 그 신선이 흰옷을 입고 찾아와 달밤에 문을 두드린다니 한폭의 그림 같은 정감이다. 옛 사람들은 한 그루 화목(花木)을 통해서 이렇듯 삶의 운치와 풍류를 누릴 줄 알았다.

   육개(陸凱)는 매화가지를 꺾다가 우연히 역부(驛夫, 옛날의 배달부)를 만나 멀리 있는 인연에게 새로 핀 매화를 보내면서 이런 시를 남기었다.
 

매화가지를 꺽다가 역부를 만나서
몇가지 묶어서 멀리 계신 그대에게 보내오
강남에 별로 자랑할 게 없어서
오로지 한 가지 봄을 드리오.


   한 가지 봄은 일지춘(一枝春)을 옮긴 말인데, 일지춘 쪽이 매화의 분위기에 어울린다.

   다른 꽃도 그렇지만 특히 매화는 고목의 가지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 꽃망울이 좋다. 우리가 무슨 일을 계획하면서 기대감에 부풀 때의 그것처럼, 꽃도 피어나기 직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 꽃망울에, 꽃보다 진한 충만감이 깃들어 있다.

   매화는 원산지가 중국의 남쪽인데, 중국에서는 옛부터 매화에 네 가지 귀함(四貴)이 있다고 전한다. 드문 것을 귀하게 여기고 무성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해묵은 노목을 귀하게 여기고 어린 나무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윈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살찐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꽃망울을 귀하게 여기고 피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매화에만 해당될 귀함이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에도 견줄 만한 교훈일 듯싶다. 매화를 사랑하는 심미안(審美眼)은 무성하고 살찐 것보다는 그 가지와 꽃이 드물고 여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미숙한 것보다는 노숙한 것을, 피어나기 전 부풀어 오르는 그 충만감을 높이 산 것이다.

   매, 란, 국, 죽은 그 품성이 군자와 같이 고결하다는 뜻에서 사군자(四君子)라고 이른다. 그중에서도 매화를 으뜸으로 치는 것은 매화의 품격이 그만큼 높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조 세종 때의 명신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꿈에서 본 매화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가 매화나무 아래서 졸고 있었더니 한 사람이 예스럽고 기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흰 옷을 입고 전신이 맑고 깨끗하였다. 나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니 당신은 나를 잘 알고 있는가? 나를 알려고 하는 이가 누구며, 나를 찾는 이는 또 누구인가? 아마도 당신은 예스럽고 질박함을 숭상하여 벗을 삼는 자로다.

   나는 성품이 시정의 번거로운 곳을 싫어하고 오직 산과 숲을 좋아하여 이름을 세속에서 피하여 사니, 비록 초나라의 영균(靈均)이라도 나를 듣고 알지 못하였다. 죽을 때까지 이름이 없으니 세상 사람들이 나와 더불어 자취를 감추고 사는 이가 또한 얼마인가.

   나는 사실 초나라 굴원(屈原)을 원망하지 않고 송나라 소동파를 원망하고 있도다. 그가 공연히 나를 일러 '얼음처럼 차고 맑은 넋, 구슬처럼 희고 깨끗한 골격' 이라고 평하여 나의 자취를 누설시켰고, 제일 좋은 물건으로 나를 지목하였도다.

   당신이 만일 나를 이해한다면 저 거칠고 적막한 산수 모퉁이 세상에서 버려둔 땅에 같이 살고 죽고 할지니라. 그리하여 속세와 가까이함을 면하고 텅 빈 듯, 없는 듯이 살며, 함께 타고난성품이나 온전히 하는 것이 어떻겠는고?"

   내 매형(梅兄) 뜻을 이해하고 "예!" 대답하고 꿈을 깨어 기록하였다 ···.'


   이 매화에 대한 꿈 이야기가 재미있어 나도 이렇게 기록한다. <향화소록> 말미에 '섣달 그믐 밤에 매화를 대하여' 라는 오언 절구(五言絶句)가 들어 있다.
 

매화 옛 등걸에 새봄이 오니
맑은 향기 산가(山家)에 넘쳐 흐른다.
가물가물 타는 심지 다시 돋우고
이 밤을 함께 새는 두 해 된 꽃.


   감로(甘露) 녹차에 매화꽃을 한 송이 따서 띄우면 매화차가 된다. 이런 차는 아마도 신선들이 마시는 차일 것이다.
 

<96 . 2>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새들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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