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있다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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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시작된다는 입춘날, 눈발이 휘날리는 속에 길을 나섰다. 경기도 성남 모란장까지 차로 달렸다. 모란장에서 장을 보고 한군데 더 들을 곳이 있어 가는데, 여느 때 같으면 4, 50분이면 넉넉히 갈 수 있는 거리를 무려 네 시간이나 걸려 겨우 당도할 수 있었다.
눈이 살짝 내려 얼어붙기 시작하자 질주하던 차들이 옴짝 못하고 슬슬 기거나 멈추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차 안에 갇혀 생각하니, 이것이 현대 문명의 현주소요 한계로구나 싶었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 낸 과학기술은 인간 생활에 말할 수 없는 편의와 속도와 쾌적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과학기술의 진보는 우리 인간의 능력을 퇴화시킨 점도 없지 않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직립보행(直立步行)의 능력을 타고났다. 똑바로 서서 걸어 다니면서 인간적인 기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차를 만들어 내어 거기에 의존하게 되자,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로움에 못지않게, 활개를 치면서 휘적휘적 걸어 다니던 힘을 빼앗기게 되고 남보다 앞서가려는 경쟁심과 이기심을 낳게 되었다. 배출 가스로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고 찻길을 내느라고 아름답고 천연스러운 강산을 갈기갈기 허물고 찢어 놓았다. 그리고 질주의 열기 때문에 무수한 생명들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말 그대로 도중하차를 당하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차가 밀려 길이 막히면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차 안에 갇혀 무기력한 무골충으로 퇴화된다. 차 안에 갇혀 있으면 직립보행의 그 당당한 인간은 어디론지 소멸되고, 바퀴 달린 쇠붙이를 시중드는 무표정한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지금 일찍이 우리 인간이 쾌적한 생활을 위해 만들어 낸 것들에 의해서,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감당하고 제지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지고 괴물로 변한 그런 것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다.
1, 2백 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오늘 우리 곁에 와서 후손들의 생활상을 보신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거대한 괴물로 변해 버린 주거 형태며, 교통지옥과 쓰레기 더미, 기계와 화학에 의한 자연 파괴, 공허한 지식과 정보의 범람, 한계를 모르고 쏟아 내는 생산과 소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화학무기와 핵무기 등등.
모르긴 해도 조상들은 당신네 후손들에게 크게 실망하실 것이다. 물질의 더미에 가려 왜소하고 좀스러워진 인간을 보고 한탄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옛것을 후지고 미개한 것으로 깔본다. 낱낱의 예를 들 것도 없이 그런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렵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따뜻한 인간미가 있었다. 이웃이 있어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이웃이 불행이나 행복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예전에 없던 많은 것을 차지하고 누리면서도, 이웃이 없고 인간의 정이 메말라 간다.
내가 오고 가는 길에 이따금 기웃거린 그 어느 장보다도 모란 장은 그 장판이 걸다. 모란장은 4일과 9일 닷새마다 서는 5일장이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는 예전 장의 풍물도 사라져 보기가 드문데, 이 모란장에는 아직도 그 잔영이 남아 있다.
시골장은 우선 시끌벅적 좀 소란스러워야 한다. 그게 장터의 생기요 활기다. 만약 장바닥이 조용하다면 그것은 죽은 장이다. 슈퍼마켓 같은 데서 할인 판매를 내세워 떠들어대는 확성기 소리는 얼마나 시끄러운가. 그러나 시골장의 소란은 그 자체가 장터의 공기요 활기찬 분위기다.
모란장에는 없는 게 없다고 할 만큼 장바닥에 나온 물건들이 아주 다양하다. 각종 곡물과 채소와 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엿기름과 누룩, 치자 열매 등도 있다. 여기저기 몇 군데 한약재가 무더기 무더기로 쌓여 있어 옛 장터의 면목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꿈틀꿈틀 살아 있는 굼벵이며 두더지까지 나와 있다.
한쪽에서는 장돌뱅이 약장수가 시골 사람들에게 소용될 듯한 약을 파느라고 무성영화 시대 극장에서 듣던 변사조의 목청으로 약 선전을 하고 있다. 그 언저리에는 으레 장꾼들이 빙 둘어서게 마련이라 누구나 한번쯤은 기웃거리고 싶어진다.
내가 발길을 멈춘 곳은 밥솥이나 냄비를 닦는 수세미를 파는 곳인데, 50대의 아저씨가 수세미로 냄비를 닦아 보이면서 쏟아놓은 입담이 어찌나 구수한지 한참을 귀 기울이다가 두 장을 사주었다.
"물 잘 나고 때 잘 나고 윤 잘 나고 광 잘 나고, 닦으면 닦을수록 비까번쩍 광이 난다. 아침 먹고 설거지나 저녁 먹고 설거지나, 슬슬 문지르면 비까번쩍 광이 난다."
한쪽에서는 뻥 하고 뻥튀기는 소리가 있어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시골장의 정취에 젖을 수 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은 채색으로 된 당사주 책을 펼쳐 놓고 사주팔자를 볼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사주팔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장꾼들은 아무도 없었다.
장 들머리에는 화분과 꽃을 파는 전이 있어 여느 장보다도 화사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화원마다 동백도 겹꽃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재래종 홀동백꽃을 보니 아주 반가웠다. 눈 속에 핀 꽃이라 이름 그대로 동백(冬栢)꽃이다. 귀한 흰 동백도 나와 있었지만, 겹꽃이라 조화처럼 보여 흰 동백의 격이 없다.
동백은 고창 선운사나 강진 만덕사 동백숲도 좋지만, 보길도 예송리 바닷가에 무리지어 핀 동백꽃이 단연 일품이다. 돌자갈 밭을 쏴아르륵 쏴아르륵 씻어 내리는 물결 소리 들으면서, 바닷바람에 여기저기서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있으면, 지는 꽃도 꽃의 아름다운 한 모습임을 느낄 수 있다.
아직도 내 눈에 서언하게 떠오른는 것은, 한 할머니가 그날 장에 팔려고 소쿠리에 담아 온 세 마리 강아지의 맑은 눈망울이다. 그 눈망울에서 나는 문득, 각종 생활의 도구라고 불리는 '문명의 이기' 들에 길들여지기 전 우리네 눈망울이 그처럼 맑지 않았을까 싶었다.
눈을 가리켜 마음의 창이라 하는데, 눈망울이 흐리면 마음이 흐려 있다는 증거이고 그 눈망울이 맑으면 마음이 그만큼 맑다는 소식일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이든 편리하고 손쉬운 것만을 선호한 나머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도시 생활에서 전기가 나가면 모든 것이 멎어 버린다. 수도와 가스와 전기가 고장이 나면 어쩔 바를 모른다. 이른바 문명의 이기에는 이런 허점이 내재되어 있다.
예전에는 어지간한 셈은 암산으로 능히 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자계산기에만 의존하여 머리를 쓰지 않다가 그 기계가 고장이 나면 지극히 간단한 셈도 많은 시간을 걸려서야 겨우 해낼 수 있다. 편리한 기계에만 의존하면 인간의 능력이 퇴화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생활에 불편한 점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불편을 이겨내노라면 체력과 의식이 살아 움직여 삶에 리듬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불편 속에서 사물의 본질과 마주칠 수 있고 또한 그 안에서 삶의 묘미를 터득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으면, 그 반대급부로서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 것도 있다. 모든 것을 두루 갖추고 편리하게만 지내려고 한다면, 사람은 그 틈새에 끼여 자주적인 활력을 잃게 된다. 인간의 자존과 창의력을 지키기 위해 얼마쯤의 불편은 감내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시골의 5일장을 즐겨 찾는 이유도 거기에 가면 우리의 옛 인정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우리 고유의 풍물을 그 장터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길바닥에서 네 시간 남짓 갇혀 지내면서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보았다. 입춘대길!
눈이 살짝 내려 얼어붙기 시작하자 질주하던 차들이 옴짝 못하고 슬슬 기거나 멈추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차 안에 갇혀 생각하니, 이것이 현대 문명의 현주소요 한계로구나 싶었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 낸 과학기술은 인간 생활에 말할 수 없는 편의와 속도와 쾌적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과학기술의 진보는 우리 인간의 능력을 퇴화시킨 점도 없지 않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직립보행(直立步行)의 능력을 타고났다. 똑바로 서서 걸어 다니면서 인간적인 기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차를 만들어 내어 거기에 의존하게 되자,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로움에 못지않게, 활개를 치면서 휘적휘적 걸어 다니던 힘을 빼앗기게 되고 남보다 앞서가려는 경쟁심과 이기심을 낳게 되었다. 배출 가스로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고 찻길을 내느라고 아름답고 천연스러운 강산을 갈기갈기 허물고 찢어 놓았다. 그리고 질주의 열기 때문에 무수한 생명들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말 그대로 도중하차를 당하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차가 밀려 길이 막히면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차 안에 갇혀 무기력한 무골충으로 퇴화된다. 차 안에 갇혀 있으면 직립보행의 그 당당한 인간은 어디론지 소멸되고, 바퀴 달린 쇠붙이를 시중드는 무표정한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지금 일찍이 우리 인간이 쾌적한 생활을 위해 만들어 낸 것들에 의해서,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감당하고 제지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지고 괴물로 변한 그런 것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다.
1, 2백 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오늘 우리 곁에 와서 후손들의 생활상을 보신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거대한 괴물로 변해 버린 주거 형태며, 교통지옥과 쓰레기 더미, 기계와 화학에 의한 자연 파괴, 공허한 지식과 정보의 범람, 한계를 모르고 쏟아 내는 생산과 소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화학무기와 핵무기 등등.
모르긴 해도 조상들은 당신네 후손들에게 크게 실망하실 것이다. 물질의 더미에 가려 왜소하고 좀스러워진 인간을 보고 한탄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옛것을 후지고 미개한 것으로 깔본다. 낱낱의 예를 들 것도 없이 그런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렵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따뜻한 인간미가 있었다. 이웃이 있어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이웃이 불행이나 행복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예전에 없던 많은 것을 차지하고 누리면서도, 이웃이 없고 인간의 정이 메말라 간다.
내가 오고 가는 길에 이따금 기웃거린 그 어느 장보다도 모란 장은 그 장판이 걸다. 모란장은 4일과 9일 닷새마다 서는 5일장이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는 예전 장의 풍물도 사라져 보기가 드문데, 이 모란장에는 아직도 그 잔영이 남아 있다.
시골장은 우선 시끌벅적 좀 소란스러워야 한다. 그게 장터의 생기요 활기다. 만약 장바닥이 조용하다면 그것은 죽은 장이다. 슈퍼마켓 같은 데서 할인 판매를 내세워 떠들어대는 확성기 소리는 얼마나 시끄러운가. 그러나 시골장의 소란은 그 자체가 장터의 공기요 활기찬 분위기다.
모란장에는 없는 게 없다고 할 만큼 장바닥에 나온 물건들이 아주 다양하다. 각종 곡물과 채소와 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엿기름과 누룩, 치자 열매 등도 있다. 여기저기 몇 군데 한약재가 무더기 무더기로 쌓여 있어 옛 장터의 면목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꿈틀꿈틀 살아 있는 굼벵이며 두더지까지 나와 있다.
한쪽에서는 장돌뱅이 약장수가 시골 사람들에게 소용될 듯한 약을 파느라고 무성영화 시대 극장에서 듣던 변사조의 목청으로 약 선전을 하고 있다. 그 언저리에는 으레 장꾼들이 빙 둘어서게 마련이라 누구나 한번쯤은 기웃거리고 싶어진다.
내가 발길을 멈춘 곳은 밥솥이나 냄비를 닦는 수세미를 파는 곳인데, 50대의 아저씨가 수세미로 냄비를 닦아 보이면서 쏟아놓은 입담이 어찌나 구수한지 한참을 귀 기울이다가 두 장을 사주었다.
"물 잘 나고 때 잘 나고 윤 잘 나고 광 잘 나고, 닦으면 닦을수록 비까번쩍 광이 난다. 아침 먹고 설거지나 저녁 먹고 설거지나, 슬슬 문지르면 비까번쩍 광이 난다."
한쪽에서는 뻥 하고 뻥튀기는 소리가 있어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시골장의 정취에 젖을 수 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은 채색으로 된 당사주 책을 펼쳐 놓고 사주팔자를 볼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사주팔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장꾼들은 아무도 없었다.
장 들머리에는 화분과 꽃을 파는 전이 있어 여느 장보다도 화사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화원마다 동백도 겹꽃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재래종 홀동백꽃을 보니 아주 반가웠다. 눈 속에 핀 꽃이라 이름 그대로 동백(冬栢)꽃이다. 귀한 흰 동백도 나와 있었지만, 겹꽃이라 조화처럼 보여 흰 동백의 격이 없다.
동백은 고창 선운사나 강진 만덕사 동백숲도 좋지만, 보길도 예송리 바닷가에 무리지어 핀 동백꽃이 단연 일품이다. 돌자갈 밭을 쏴아르륵 쏴아르륵 씻어 내리는 물결 소리 들으면서, 바닷바람에 여기저기서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있으면, 지는 꽃도 꽃의 아름다운 한 모습임을 느낄 수 있다.
아직도 내 눈에 서언하게 떠오른는 것은, 한 할머니가 그날 장에 팔려고 소쿠리에 담아 온 세 마리 강아지의 맑은 눈망울이다. 그 눈망울에서 나는 문득, 각종 생활의 도구라고 불리는 '문명의 이기' 들에 길들여지기 전 우리네 눈망울이 그처럼 맑지 않았을까 싶었다.
눈을 가리켜 마음의 창이라 하는데, 눈망울이 흐리면 마음이 흐려 있다는 증거이고 그 눈망울이 맑으면 마음이 그만큼 맑다는 소식일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이든 편리하고 손쉬운 것만을 선호한 나머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도시 생활에서 전기가 나가면 모든 것이 멎어 버린다. 수도와 가스와 전기가 고장이 나면 어쩔 바를 모른다. 이른바 문명의 이기에는 이런 허점이 내재되어 있다.
예전에는 어지간한 셈은 암산으로 능히 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자계산기에만 의존하여 머리를 쓰지 않다가 그 기계가 고장이 나면 지극히 간단한 셈도 많은 시간을 걸려서야 겨우 해낼 수 있다. 편리한 기계에만 의존하면 인간의 능력이 퇴화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생활에 불편한 점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불편을 이겨내노라면 체력과 의식이 살아 움직여 삶에 리듬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불편 속에서 사물의 본질과 마주칠 수 있고 또한 그 안에서 삶의 묘미를 터득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으면, 그 반대급부로서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 것도 있다. 모든 것을 두루 갖추고 편리하게만 지내려고 한다면, 사람은 그 틈새에 끼여 자주적인 활력을 잃게 된다. 인간의 자존과 창의력을 지키기 위해 얼마쯤의 불편은 감내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시골의 5일장을 즐겨 찾는 이유도 거기에 가면 우리의 옛 인정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우리 고유의 풍물을 그 장터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길바닥에서 네 시간 남짓 갇혀 지내면서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보았다. 입춘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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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https://park5611.pe.kr/xe/1051909(220.87.2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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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모란장의 훈훈한 정이 느껴집니다
인간이 너무 편한것에 의존하다보니
자가능력은 떨어지고 대자연앞에서는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생각듭니다
천혜의 자연은 인간이 만들어낸 각종 기계장비에 의해 무참히 소실되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대재앙을 자초하고 있음에 인간은 자연보호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