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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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 전, 예전에 내가 살던 암자에 들러 이틀을 쉬어서 온 일이 있다. 그때 큰 절에서 행자(行者,스님이 되기 전의 수련자) 두 사람이 올라와 나더러 자기네 스승이 되어 달라고 했다. 한마디로 나는 거절했다.
행자가 계(戒)를 받고 출가 수행승이 되려면 스승(恩師)이 정해져야 하는데, 그 스승감으로 그들은 나를 택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거절한 이유는 '제도적인 스승'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내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고, 그들 또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길을 들이지 않아 이해의 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유대가 이루어질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안팎으로 홀가분해지고자 하므로 스승의 멍에로부터도 놓여나고 싶다. 무리에서 떠나 홀로 사는 이유도 이 '매이지 않음'에 있다. 거절의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면, 내가 어떻게 감히 남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에서였다.
선생과 학생 사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굳자의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는 영적인 메아리기 을리지 않는 한 한낱 세속적인 치레에 그치고 만다. 한 사람이 수십 명씩 거느리는, 자신이 지어 준 제자의 이름(法名)도 기억 못 할 만큼 대량으로 생산해 낸 그런 사제관계를 나는 구도의 양심상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행자들이 다시 찾아와 간곡히 은사가 되어 주기를 원하자, 나는 전래의 비법(秘法)을 꺼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내 시킨 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다그치자 그러겠다고 했다. 좋다, 그러면 너희들이 앞으로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착실히 한다면, 그때 가서 내가 계 받는 절차상 필요한 은사가 되어 주마. 이런 내 뜻에 그들은 동의 했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덧붙여 말했다.
너희들이 지금은 내 앞에서 3년 동안 행자생활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늘 변하는 것이므로 이 자리의 다짐에 조금도 구애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3년 동안 기간만 채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행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행자 기간은 대개 1년 전후다. 법도가 엉성한 절에서는 3, 4개월 만에 계를 받게 하는 일도 있는데, 이런 현상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쉽게 되는 일은 쉽게 무너진다. 단시일 안에 해치운 부실 공사의 결과처럼.
겪어 본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행자 시절에는 스님들이 걸치는 가사와 장삼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후원에서 맡긴 허드렛일에서 벗어나 하루라도 빨리 스님이 되어 가사 장삼을 걸치고 싶어한다.
대개의 경우 행자 기간을 3년은 고사하고 1년을 넘기기도 어려워한다. 한번은 계 받을 시기가 임박해서 행자 두 사람이 찾아와 나더러 은사가 되어 달라고 했다. '은사'란 은혜로운 스승이란 뜻인데, 내가 갑자기 어떻게 은혜로운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 처음 만난 생면부지 사이인데. 그래서 나는 은사로서 길들이는 기간도 있어야 할 테니, 6개월 후에 계를 받도록 하라고 했더니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때 다른 스님 앞으로 계를 받았는데, 그 후 그들의 자취를 나는 알 수 없다. 쉽게 이루어진 것은 쉽게 무너진다는 교훈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날이 갈수록 실감한다. '상좌 하나에 지옥이 하나'라는 승가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어려움이 많다는 뜻이 것이다. 글을 가르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깨우쳐 바르게 이끄는 일은 말이나 글로 될 수 없다.
참다운 스승은 입 벌려 가르치지 않지만, 슬기로운 제자들은 그의 곁에서 늘 새롭게 배운다.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의를 다해서 거들고 돕는다. 제자 내부의 본질이 스스로 꽃피어나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도울 뿐이다.
온갖 지식과 정보를 지니고 명예로운 학위를 취득하여 아는 것은 많으면서도 마음이 불안한 학자가 스승을 찾아가 물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요."
스승은 대답한다.
"그래? 어디 그럼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게. 편하게 해주겠네." 학자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이렇게 호소한다.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스승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찌 그대 마음이겠는가. 이제 그대에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노라. 알겠는가?"
이 말끝에 학자는 크게 깨닫는다.
선종(禪宗)의 역사에서 유명한 달마와 혜가의 '안심(安心) 문답'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불안을 덜어 주고 마음을 펀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지혜로운 스승의 기능이요 가르침이다.
제자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승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전적인 헌신과 투신에 의해서 스승의 인격이 자신에게 메아리 되어 울린다.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찾듯이, 그처럼 지성스럽고 절실하게 스승을 찾을 때 그는 반드시 스승을 만난다. 진실하고 진지하게 찾아야만 시절 인연이 와서 스승 앞에 마주 서게 된다.
스승에게서 배울 만큼 배웠으면 스승을 떠나야 한다. 스승에게 기대어 의존하고 있는 한 그는 스승의 그림자나 복제품이지 독자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스승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이룰 때 그는 비로소 스승의 은헤에 보답할 수 있다.
유능한 제자는 스승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유능한 스승 또한 자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이르는 옛말에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 "얼음은 물에서 이루어지지만 물보다 차다." 는 말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입산 출가 전이나 그 이후 수많은 스승의 은혜 속에 형성되면서 살아왔다. 내 앞에서 직접 가르쳐 보인 현실적인 스승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인물로서 기록을 통해 많은 은혜를 끼친 스승들도 있다. 이런 수많은 스승이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그만큼 탐구하고 열망하면서 찾았기 때문에 그 메아리로 응답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세속적인 인습과 기존의 가치와 전통을 극복하도록 부추긴 선사(禪師)들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영혼을 늘 깨어 있도록 고무시킨다. 그리고 구도의 길에서 시들지 않는 영원한 젊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9세기의 스승 임제臨濟 선사는 말한다.
"그대들이 바른 깨달음을 얻고 싶거든 사람에게 흘리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이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을 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라."
부처나 조사, 성자나 스승을 의지삼아 이들을 최고 가치로 삼을 경우, 거기에 붙잡혀 자신의 길을 활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주적인 인간이 되라는 교훈이다. 선사의 주장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인(無位眞人)'이 되라는 것.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분별은 제자의 입장에서만 존재한다. '자신의 눈' 을 지닌 사람에게는 스승도 제자도 없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보일 뿐이다.
진정한 스승을 만나고 싶은가?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을 주시하라. 자신의 영적인 자아속에서 스승을 찾아라.
행자가 계(戒)를 받고 출가 수행승이 되려면 스승(恩師)이 정해져야 하는데, 그 스승감으로 그들은 나를 택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거절한 이유는 '제도적인 스승'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내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고, 그들 또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길을 들이지 않아 이해의 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유대가 이루어질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안팎으로 홀가분해지고자 하므로 스승의 멍에로부터도 놓여나고 싶다. 무리에서 떠나 홀로 사는 이유도 이 '매이지 않음'에 있다. 거절의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면, 내가 어떻게 감히 남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에서였다.
선생과 학생 사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굳자의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는 영적인 메아리기 을리지 않는 한 한낱 세속적인 치레에 그치고 만다. 한 사람이 수십 명씩 거느리는, 자신이 지어 준 제자의 이름(法名)도 기억 못 할 만큼 대량으로 생산해 낸 그런 사제관계를 나는 구도의 양심상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행자들이 다시 찾아와 간곡히 은사가 되어 주기를 원하자, 나는 전래의 비법(秘法)을 꺼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내 시킨 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다그치자 그러겠다고 했다. 좋다, 그러면 너희들이 앞으로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착실히 한다면, 그때 가서 내가 계 받는 절차상 필요한 은사가 되어 주마. 이런 내 뜻에 그들은 동의 했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덧붙여 말했다.
너희들이 지금은 내 앞에서 3년 동안 행자생활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늘 변하는 것이므로 이 자리의 다짐에 조금도 구애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3년 동안 기간만 채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행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행자 기간은 대개 1년 전후다. 법도가 엉성한 절에서는 3, 4개월 만에 계를 받게 하는 일도 있는데, 이런 현상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쉽게 되는 일은 쉽게 무너진다. 단시일 안에 해치운 부실 공사의 결과처럼.
겪어 본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행자 시절에는 스님들이 걸치는 가사와 장삼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후원에서 맡긴 허드렛일에서 벗어나 하루라도 빨리 스님이 되어 가사 장삼을 걸치고 싶어한다.
대개의 경우 행자 기간을 3년은 고사하고 1년을 넘기기도 어려워한다. 한번은 계 받을 시기가 임박해서 행자 두 사람이 찾아와 나더러 은사가 되어 달라고 했다. '은사'란 은혜로운 스승이란 뜻인데, 내가 갑자기 어떻게 은혜로운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 처음 만난 생면부지 사이인데. 그래서 나는 은사로서 길들이는 기간도 있어야 할 테니, 6개월 후에 계를 받도록 하라고 했더니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때 다른 스님 앞으로 계를 받았는데, 그 후 그들의 자취를 나는 알 수 없다. 쉽게 이루어진 것은 쉽게 무너진다는 교훈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날이 갈수록 실감한다. '상좌 하나에 지옥이 하나'라는 승가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어려움이 많다는 뜻이 것이다. 글을 가르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깨우쳐 바르게 이끄는 일은 말이나 글로 될 수 없다.
참다운 스승은 입 벌려 가르치지 않지만, 슬기로운 제자들은 그의 곁에서 늘 새롭게 배운다.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의를 다해서 거들고 돕는다. 제자 내부의 본질이 스스로 꽃피어나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도울 뿐이다.
온갖 지식과 정보를 지니고 명예로운 학위를 취득하여 아는 것은 많으면서도 마음이 불안한 학자가 스승을 찾아가 물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요."
스승은 대답한다.
"그래? 어디 그럼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게. 편하게 해주겠네." 학자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이렇게 호소한다.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스승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찌 그대 마음이겠는가. 이제 그대에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노라. 알겠는가?"
이 말끝에 학자는 크게 깨닫는다.
선종(禪宗)의 역사에서 유명한 달마와 혜가의 '안심(安心) 문답'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불안을 덜어 주고 마음을 펀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지혜로운 스승의 기능이요 가르침이다.
제자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승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전적인 헌신과 투신에 의해서 스승의 인격이 자신에게 메아리 되어 울린다.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찾듯이, 그처럼 지성스럽고 절실하게 스승을 찾을 때 그는 반드시 스승을 만난다. 진실하고 진지하게 찾아야만 시절 인연이 와서 스승 앞에 마주 서게 된다.
스승에게서 배울 만큼 배웠으면 스승을 떠나야 한다. 스승에게 기대어 의존하고 있는 한 그는 스승의 그림자나 복제품이지 독자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스승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이룰 때 그는 비로소 스승의 은헤에 보답할 수 있다.
유능한 제자는 스승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유능한 스승 또한 자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이르는 옛말에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 "얼음은 물에서 이루어지지만 물보다 차다." 는 말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입산 출가 전이나 그 이후 수많은 스승의 은혜 속에 형성되면서 살아왔다. 내 앞에서 직접 가르쳐 보인 현실적인 스승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인물로서 기록을 통해 많은 은혜를 끼친 스승들도 있다. 이런 수많은 스승이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그만큼 탐구하고 열망하면서 찾았기 때문에 그 메아리로 응답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세속적인 인습과 기존의 가치와 전통을 극복하도록 부추긴 선사(禪師)들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영혼을 늘 깨어 있도록 고무시킨다. 그리고 구도의 길에서 시들지 않는 영원한 젊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9세기의 스승 임제臨濟 선사는 말한다.
"그대들이 바른 깨달음을 얻고 싶거든 사람에게 흘리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이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을 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라."
부처나 조사, 성자나 스승을 의지삼아 이들을 최고 가치로 삼을 경우, 거기에 붙잡혀 자신의 길을 활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주적인 인간이 되라는 교훈이다. 선사의 주장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인(無位眞人)'이 되라는 것.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분별은 제자의 입장에서만 존재한다. '자신의 눈' 을 지닌 사람에게는 스승도 제자도 없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보일 뿐이다.
진정한 스승을 만나고 싶은가?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을 주시하라. 자신의 영적인 자아속에서 스승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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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https://park5611.pe.kr/xe/1058832(220.87.2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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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공부하고도 마음을 밖에서 찾는 이들이 허다하지요
그것은 그저 삶으로 살아내지 못할 지식일 뿐이련만
'자신의 눈'에 엄지 척 하면서 미소짓습니다
새해에도 여전한 나눔으로 福 짓는 한 해가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