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고양이를 보면 그냥 안 놔둔다고 한다. 버릇없이 어른을 닮았다고 해서 톡톡히 기합을 준다는 것이다. 어지간히 개성을 존중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닮아주기를 원하는 것 같다. 지도교수의 구미에 맞도록 논문을 써내야 무사 통과되고, 창의성을 중히 여긴다는 예술작품도 심사위원의 취향에 무조건 추종해야만 천(薦)을 받기가 쉽다는 것이다. 섣불리 개성이라는 자기 채취를 발산하다가는 이단시되기 알맞다.
이런 경향은 개인끼리의 거래에서 뿐만 아니고 사회적인 동작에서도 마찬가지다. 획일성을 가용하고 있는 것이 그 점이다. 그래서 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개인의 푸른 영억은 시들어가고 있다.
문제아(問題兒)라는 말이 있다. 지능이나 심적 태도(心的 態度), 혹은 행동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특별한 취급이 있어야 하는 아이를 말한다. 그러니까 다른 집 아이들을 닮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런데 문제성의 기본이라는 것도 실로 애매하고 모호하다. 왜냐하면 표준이란 있을 수도 없으려니와 인간의 내면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미묘하고 다양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잴 수 있는 자(尺度)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사회는 자꾸만 닮으라고 보챈다. 다시 말하면 무표정한 속물이 되어 달라는 말씀이다.
어느 날, 절에 다니는 신도 한 분이 아이 때문에 꽤나 속을 썩인 나머지 그 애를 데리고 절에 왔었다. 말하자면, 어디 나사라도 빠진데가 없는지 점검해 달라는 것이다. 이해의 눈으로 인간적인 접촉을 가져보았다. 말짱한 아이였다. 흠이라면 지나치게 총명하고 고집이 셀 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러지 않았다’든지 고집이 세다고 해서 문제아라면 그냥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고집은 개성의 밀도와 정비례된다. 사소한 일을 가지고 지나치게 문제시할 때 아이들은 문제아가 되게 마련이다. 오히려 문제성이 전혀 없는 아이야말로 문제아가 아닐까. 인류문화사상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대게가 문제아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부모님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을 두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너무 소홀히 대하는 것도 흠이겠지만, 대단치도 않을 걸 가지고 지나치게 문제시할 경우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우리 인간에 비해서 얼마나 개성을 존중하는 동물인가.
<69 , 7. 8>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맑은글 정독으로 두번을 읽었어요.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깊은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