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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민(火田民)의 오두막에서

오작교 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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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버리고 떠나기
    이따금 어디론가 훌쩍 증발해버리고 싶은 그런 때가 있다. 허구한 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무표정하고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내 삶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열망이 안에서 솟구칠 때면 어디론가 훌쩍 바람처럼 떠나고 싶다. 그러나 그때마다 갈 곳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잘못 들어서면 또 다른 타성의 늪에 갇힐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9일 오후 서울 법련사에서 법회를 마치자마자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길을 떠났다. 어느 깊숙한 두메산골에 화전민이 살다가 비운 오두막이 있다는 말을 한 친지로부터 전해 듣고 결심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서둘러 달려갔기 때문에 봄날의 긴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질 무렵 가까스로 그 오두막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전기도 통신수단도 전혀 없는 태곳적 그대로인 곳이었다. 시냇물 소리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둠이 내리자 영롱한 별들이 쏟아질 듯 빛을 발했고 소쩍새와 머슴새가 번갈아 가면서 밤새 울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머릿속이 아주 개운했다. 시냇가에 나가 흘러가는 물을 양껏 떠 마셨다. 문명의 발톱이 할퀴지 않은 곳이라, 흐르는 시냇물인데도 물맛이 아주 좋았다.

   처음 이 오두막을 찾아갈 때는, 사람이 거처할 만한 집인지, 둘레가 어떤지 내 눈으로 살펴보고 한 이틀 쉬었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쉬어보니 그대로 눌려 있고 싶어졌다.

   다음날 20리 밖에 있는 장에 내려가 필요한 연장들을 구해 왔다. 우선 땔감을 마련하려면 톱과 도끼가 있어야 했다. 먹을 것은 가지고 갔기 때문에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었다.

   이 고마운 오두막에서 나는 꼬박 열하루를 지냈다. 내 팔자가 그러듯이 어디를 가나 손수 끓여 먹는 일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처음 2, 3일은 전기가 없어 어둠이 좀 답답하게 여겨졌지만 이내 아무 불편도 없었다. 촛불이 훨씬 그윽해서 마음을 아늑하게 다스려 주었다. 문명의 연장에 길이 든 우리는 편리하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이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다행하고 고마운 일은, 뭣보다도 사람 그림자를 전혀 볼 수 없는 점과 맨날 그저 그렇고 그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미치지 않는 점이었다. 나는 근래에 와서 사람을 그리워해 본 적이 전혀 없다. 앞에서 ‘사람 그림자’라는 표현을 썼지만 보다 솔직한 표현을 쓴다면 ‘사람 꼴’이라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린 처지라 사람 꼴 안 보니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어떤 시인의 표현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그런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에 메아리가 없다. 영혼에 메아리가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이곳에 살면서 신문 안 보고 방송 안 들어도 전혀 불편이 없었다. 우리는 마약중독자처럼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쳐보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보도된 내용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득보다는 해가 훨씬 많다. 특정 정당의 대권 후보 경선이 무엇이기에 언론에서는 날마다 머리기사로 찧고 까불어내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그런 보도가 우리들의 삶에 무슨 득이 될 것인가.

   양식과 형평을 잃고 한쪽으로만 몰아가는 언론의 횡포가 우리들의 맑은 의식을 얼마나 얼룩지게 만들고 있는지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뒷날 산을 내려와 배달된 신문을 펼쳐보고, 솔직히 말한다면 이건 시끄러운 소음이요 쓰레기 더미구나 싶었다. 내 정신과 몸에 얼룩이 묻기 전에 얼른 방 밖으로 그 신문을 밀쳐버리고 말았다.

   진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들의 삶에 어떤 성질의 정보와 지식이 얼마만큼 소용되는 것인지, 제정신을 지니고 살려는 사람들은 냉정하게 가릴 줄을 알아야 한다.

   이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다음과 같은 옛글이 떠올랐다. 해가 뜨면 밖에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방에 들어가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먹고 사니 누가 다스리건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제대로 된 정치가 행해진다면 서민들의 입에서 이런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정치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얹어야겠다. 올해는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해라서 얼마나 또 시끄러울지 미리부터 염려된다. 보나 마나 막판에 가면 또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표를 긁어모으느라고 이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국민의 감정과 의식은 사분오열되어 악순환이 되풀이될 것이다.

   나더러 만약 이 나라의 대통령을 고르라고 한다면 우선 ‘대통령병’에 걸리지 않은 인사를 선택하겠다. 어떤 병이든지 만성질환의 경우는 거의 치유가 불가능하다. 또 한쪽으로 치우치는 강한 정치가 아니라 부드러운 정치를 할 사람에게 점을 찍을 것이다. 절대권력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부드러운 것이 결과적으로는 강한 것이고 따라서 설득력을 지닌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한 주일에 한두 번 정도라도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멋있는, 사나이를 이 땅의 대통령 자리에 앉히고 싶다.

   이 땅의 정치에서 우리는 일찍이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고한 서민들에게 잔뜩 겁을 먹게 하거나 불안에 떨게 하면서 팽팽한 긴장감만을 심어주었지 언제 한번 속 시원히 웃어본 적이 있는가.

   웃음을 선사할 줄 모르는 정치는 향기 없는 꽃이나 마찬가지다. 웃어야 일이 풀리고 복이 온다. 정치는 정직하고 역량 있는 각료들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국민의 삶에 활기와 여유를 보태줄 웃음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오두막에서는 밤낮으로 시냇물 소리가 들려 영혼에 묻은 먼지까지도 말끔히 씻어주는 것 같았다. 해발 7백 미터가 넘은 그곳은 봄이 뒤늦게 찾아왔다. 내가 그 오두막을 떠나올 무렵에야 온 산에 진달래가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났다.

   나는 올해에 봄을 세 번 맞이한 셈이다. 첫 번째 봄은 부겐빌레아가 불꽃처럼 피어오르던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니아에서였고, 두 번째 봄은 산수유를 시작으로 진달래와 산벚꽃과 철쭉이 눈부시도록 피어난 조계산에서였다. 그리고 이 두메산골의 오두막에서 무리를 지어 피어난 민들레와 진달래 꽃 사태를 맞은 것이다.

   올봄은 내게 참으로 고마운 시절 인연을 안겨주었다.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말씀이 진실임을 터득하였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며 자유롭고 홀가분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을 뜻한다. 불일암에서 지낸 몇 년보다도 훨씬 신선하고 즐겁고 복된 나날을 누릴 수 있어 고마웠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때, 할 수 있다면 이런 오두막에서 이다음 생으로 옮아가고 싶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절간에서는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도 없다. 죽은 후의 치다꺼리는 또 얼마나 번거롭고 폐스러운가.

   나는 이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두메산골의 오두막에서 이다음 생애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앞뒤가 훤칠하게 트인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자 원을 세웠다. 그 원이 이루어지도록 오늘을 알차게 살아야겠다.
<92. 6>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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