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편지 속에서
도서명 | 버리고 떠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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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두메산골에서 지내니 편지를 보낼 일도 없고 받을 일도 없다. 이 오두막이 행정구역상 어디에 소속되는지 아직도 나는 모르고 지낸다. 따라서 우편집배원이 찾아올 일도 없고 내가 우체국을 찾아갈 일도 없다.
이따금 소용되는 물건이나 옷가지를 챙기러 불일암에 내려가면 주인을 기다리는 우편물들이 쌓여 있다. 그전 같으면 답장을 띄워야 할 사연들에도 요즘에는 거의 생략하고 있다. 오고 가고 하는 번거로운 인연을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옛사람도 읊은 바 있다.
내게 오는 우편물들은 그때그때 처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급한 내 성미이다. 회신을 미처 쓸 여유가 없을 때는 우선 봉투 글씨만이라도 써놓는다. 장기간의 해외여행에서 돌아왔을 경우, 아직 시차도 해소되기 전에 이 우편물 처리에 긴 시간을 골몰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연은 그날로 처리되지만, 태워버리기가 아깝거나 참고가 될 사연들은 달마다 다른 봉투에 넣어 보관해 둔다. 그러다가 연말이 되면 다시 추려서 남길 것은 남기고 없앨 것은 없애는 것이 연말의 행사처럼 되어 있다.
언제부터 한 노스님의 비문을 써야 할 숙제가 내 의식의 덜미를 잡고 있어 찜찜했는데, 며칠 전 불일암에 내려간 김에 용단을 내어 그날로 비문을 쓰기로 작정했다. 다락에 올라가 자료를 찾다가 뜻밖에 수년 전에 챙겨둔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편지 뭉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큰 종이봉투 겉에는, ‘추리고 남은 사연들(85. 10. 13)’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니까 7년 전 편지를 정리하다가 뒷날에 참고가 될 사연들만을 따로 골라서 챙겨둔 것이다. 그 편지들 속에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고인들의 것이 많아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헤아리게 되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저기에 띄웠던 편지들도 언젠가는 내 사후에 공개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 편지들은 내 자신이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그때 그 자리의 내 존재의 모습일 것이다. 편지란 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인 글이다. 그 편지로 그때 그 사람의 처지와 심경을 헤아릴 수 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있지 않은 고인의 편지를 읽어보면, 생존 시에 가까이 접했던 그분의 인품과 정감이 밀물처럼 차오른다. 무상한 세월을 느끼면서 몇 편의 편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송광사 방장(方丈)으로 계셨던 구산(九山) 스님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보내온 편지. 독자들을 위해 한자를 줄이고 맞춤법만을 고쳐 그대로 소개한다.
<법정 아우님에게 법체 청정하시며 산중이 무고한가, 노한(老漢)은 현호·현종 등을 데리고 구주 제국을 경과하면서 행락이 불여좌고(不如坐苦)-다니는 즐거움이 앉아서 겪는 괴로움만 못하다는 뜻-라는 옛말이 틀림없네. 4월 6일 나성(LA)으로 떠나올 때 수인사도 결하고 출발하였네. 조계산중을 아우님만 믿고 왔으니 못난 형을 용서 바라네. 그리고 사중(寺中) 형편이나 하게 수련생들은 아우님이 잘 보살펴줄 것으로 믿네.
소위 선사(禪師) 기질이라 하여 머트러운 점도 아우님의 이해하시소. 나도 앞으로는 자네한테 배울 터이니까 봄볕에 녹듯이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과거의 여하 약하는 미소로 일소하고 조계총림의 전도를 자네가 연구 발전시키도록 부탁하네.>
구산 스님과 필자는 한 스승 밑에서 출가 수행자가 됐기 때문에 승가에서는 사형(師兄) 사제(師弟) 사이다. 정이 많은 스님은 평소에도 필자에게 ‘아우님’이란 호칭을 즐겨 쓰셨다. 그 무렵 사잘 증축 문제와 총림 운영 문제로 스님과 필자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어 된소리가 오간 일이 있었다. 편지는 계속된다.
<외국에 나와 한국불교를 바라볼 때, 세인들에게 지탄을 받거나 불훈(佛訓)에 배치된 일들을 아우님의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하겠는가. 이사간(理事間:이론과 실제 행동)에 여법(如法) 수행과 여리(如理) 행해(行解)를 갖춘 사람이 누구인지, 산문 밖에서 보는 것과 산문 안에서 보는 것은 저지현격이네. 자네도 냉철하게 관찰하여 보시고 나성 고려사로 답을 바라네.
나는 6월 18일 나성 고려사에 가서 카멜 대각사 창건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7월이나 8월 초에 귀국할 예정이네. 앞으로 선도(善導)와 제반사를 부탁하며 이만 줄이네.
이 편지는 ‘82년 7월 30일 자 제네바 발신의 소인이 찍혔고 8월 7일에 받아본 것이다.
광릉 봉선사에 계셨던 운허(耘虛) 스님께서는 평소에 편지를 받거나 책을 받았을 때 거르지 않고 회신을 띄우셨다. ’ <보내주신 ‘어떻게 살 것인가’ 잘 받았습니다. 받은 즉시로 서문에서부터 몇몇 군데를 더듬었습니다. 스님의 솜씨를 잘 아는 바라 오직 감탄할 뿐입니다.
그해 초파일 기념특집 별책으로 샘터사에서 출간한 필자의 책을 받아보시고 보내온 간결하고 담백한 회신이다. 요즘은 책을 기증받고도 종무소식일 경우 허다한데 노스님께서는 그때마다 예를 거르지 않으셨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어른들을 회상하니, 삶의 빛깔과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새삼스레 헤아리게 된다. 살아 계실 때는 비본질적인 일상사에 가려 그 실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옛사람이 되고 나니 세월의 여과 과정을 거쳐 본모습이 드러나 남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다.
사람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그 기억마저도 깡그리 지워지고 말 것을.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이따금 소용되는 물건이나 옷가지를 챙기러 불일암에 내려가면 주인을 기다리는 우편물들이 쌓여 있다. 그전 같으면 답장을 띄워야 할 사연들에도 요즘에는 거의 생략하고 있다. 오고 가고 하는 번거로운 인연을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옛사람도 읊은 바 있다.
산이야 나를 좋아할 리 없지만
내가 좋아서 산에서 사는데
한 산중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번거로운 인연들이 나를 얽어매더라.
내가 좋아서 산에서 사는데
한 산중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번거로운 인연들이 나를 얽어매더라.
내게 오는 우편물들은 그때그때 처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급한 내 성미이다. 회신을 미처 쓸 여유가 없을 때는 우선 봉투 글씨만이라도 써놓는다. 장기간의 해외여행에서 돌아왔을 경우, 아직 시차도 해소되기 전에 이 우편물 처리에 긴 시간을 골몰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연은 그날로 처리되지만, 태워버리기가 아깝거나 참고가 될 사연들은 달마다 다른 봉투에 넣어 보관해 둔다. 그러다가 연말이 되면 다시 추려서 남길 것은 남기고 없앨 것은 없애는 것이 연말의 행사처럼 되어 있다.
언제부터 한 노스님의 비문을 써야 할 숙제가 내 의식의 덜미를 잡고 있어 찜찜했는데, 며칠 전 불일암에 내려간 김에 용단을 내어 그날로 비문을 쓰기로 작정했다. 다락에 올라가 자료를 찾다가 뜻밖에 수년 전에 챙겨둔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편지 뭉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큰 종이봉투 겉에는, ‘추리고 남은 사연들(85. 10. 13)’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니까 7년 전 편지를 정리하다가 뒷날에 참고가 될 사연들만을 따로 골라서 챙겨둔 것이다. 그 편지들 속에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고인들의 것이 많아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헤아리게 되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저기에 띄웠던 편지들도 언젠가는 내 사후에 공개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 편지들은 내 자신이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그때 그 자리의 내 존재의 모습일 것이다. 편지란 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인 글이다. 그 편지로 그때 그 사람의 처지와 심경을 헤아릴 수 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있지 않은 고인의 편지를 읽어보면, 생존 시에 가까이 접했던 그분의 인품과 정감이 밀물처럼 차오른다. 무상한 세월을 느끼면서 몇 편의 편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송광사 방장(方丈)으로 계셨던 구산(九山) 스님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보내온 편지. 독자들을 위해 한자를 줄이고 맞춤법만을 고쳐 그대로 소개한다.
<법정 아우님에게 법체 청정하시며 산중이 무고한가, 노한(老漢)은 현호·현종 등을 데리고 구주 제국을 경과하면서 행락이 불여좌고(不如坐苦)-다니는 즐거움이 앉아서 겪는 괴로움만 못하다는 뜻-라는 옛말이 틀림없네. 4월 6일 나성(LA)으로 떠나올 때 수인사도 결하고 출발하였네. 조계산중을 아우님만 믿고 왔으니 못난 형을 용서 바라네. 그리고 사중(寺中) 형편이나 하게 수련생들은 아우님이 잘 보살펴줄 것으로 믿네.
소위 선사(禪師) 기질이라 하여 머트러운 점도 아우님의 이해하시소. 나도 앞으로는 자네한테 배울 터이니까 봄볕에 녹듯이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과거의 여하 약하는 미소로 일소하고 조계총림의 전도를 자네가 연구 발전시키도록 부탁하네.>
구산 스님과 필자는 한 스승 밑에서 출가 수행자가 됐기 때문에 승가에서는 사형(師兄) 사제(師弟) 사이다. 정이 많은 스님은 평소에도 필자에게 ‘아우님’이란 호칭을 즐겨 쓰셨다. 그 무렵 사잘 증축 문제와 총림 운영 문제로 스님과 필자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어 된소리가 오간 일이 있었다. 편지는 계속된다.
<외국에 나와 한국불교를 바라볼 때, 세인들에게 지탄을 받거나 불훈(佛訓)에 배치된 일들을 아우님의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하겠는가. 이사간(理事間:이론과 실제 행동)에 여법(如法) 수행과 여리(如理) 행해(行解)를 갖춘 사람이 누구인지, 산문 밖에서 보는 것과 산문 안에서 보는 것은 저지현격이네. 자네도 냉철하게 관찰하여 보시고 나성 고려사로 답을 바라네.
나는 6월 18일 나성 고려사에 가서 카멜 대각사 창건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7월이나 8월 초에 귀국할 예정이네. 앞으로 선도(善導)와 제반사를 부탁하며 이만 줄이네.
6월 13일 九山 합장>
이 편지는 ‘82년 7월 30일 자 제네바 발신의 소인이 찍혔고 8월 7일에 받아본 것이다.
광릉 봉선사에 계셨던 운허(耘虛) 스님께서는 평소에 편지를 받거나 책을 받았을 때 거르지 않고 회신을 띄우셨다. ’ <보내주신 ‘어떻게 살 것인가’ 잘 받았습니다. 받은 즉시로 서문에서부터 몇몇 군데를 더듬었습니다. 스님의 솜씨를 잘 아는 바라 오직 감탄할 뿐입니다.
‘77년 5월 19일 耘虛 和南>
그해 초파일 기념특집 별책으로 샘터사에서 출간한 필자의 책을 받아보시고 보내온 간결하고 담백한 회신이다. 요즘은 책을 기증받고도 종무소식일 경우 허다한데 노스님께서는 그때마다 예를 거르지 않으셨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어른들을 회상하니, 삶의 빛깔과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새삼스레 헤아리게 된다. 살아 계실 때는 비본질적인 일상사에 가려 그 실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옛사람이 되고 나니 세월의 여과 과정을 거쳐 본모습이 드러나 남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다.
사람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그 기억마저도 깡그리 지워지고 말 것을.
<92. 8>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