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밤 이야기
도서명 | 버리고 떠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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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깨어 바깥바람을 쏘이고 싶어 나갔다가, 밤하늘에 무수히 돋아난 별들을 바라보면서 황홀한 시간을 가졌다. 별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무변 광대한 우주와 그 신비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밤하늘에 이런 달과 별이 없다면 얼마나 막막하고 아득할까. 우리 마음속에도 저마다 은밀한 별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 삶 또한 막막하고 황량할 것이다.
산에 들어오기 전, 한 관상가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문득 떠오르곤 한다. 친구 집에 들렀는데 용한 관상가가 왔다고 친구 어머니가 내게 귀띔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일에 관심이 전혀 없어 시큰둥하고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 여자 관상가는 나를 흘낏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 학생은 밤하늘에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고고하게 살 상이오."
밤하늘에 별을 바라보며 살 거라는 이 말이 그때는 아주 시적으로 들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 밤에 소변을 보러 나가서는 으레 고개를 들어 북두의 성좌에 눈길을 보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주걱처럼 생긴 그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법을 만나 맑고 고요한 산에서 살게 된 인연에 고마움이 저절로 우러난다.
사철을 두고 밤하늘에 별은 돋지만, 봄밤에는 흐려서 별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가을과 겨울철에는 별빛이 영롱하지만, 밤 기온이 차가워 오래 지켜볼 수가 없다. 별을 바라보기에는 여름밤이 제격인데, 초저녁은 별들이 제 빛을 발하지 않다가 한밤중이 되면 영롱하게 드러나 별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
여름철 별자리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은하를 사이하고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백조자리와 거문고자리, 그리고 독수리자리이다. 거문고자리에서 가장 밝은 1등성은 직녀별이고 은하를 건너 맞은쪽 독수리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이 견우별이다.
별자리를 알고 별을 쳐다보는 것과 모르고 바라보는 그 감흥은 전혀 다르다. 꽃 이름을 알고 꽃을 대했을 때와 모르고 대했을 때의 그 느낌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이 8월 5일. 음력으로는 칠월 칠석. 일 년 내내 은하를 사이에 두고 안타깝게 눈길만 보내다가 오늘 하루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날이다.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별에 견주어 이야기한 우리 조상들의 정서가 오늘 그 후손인 우리 가슴에까지 절절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옛날 하늘의 옥황상제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하는 일은 온종일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는 일이었다. 그녀는 옷감에다 아름다운 별자리와 밝은 햇빛과 은은한 달빛 등을 짜 넣었다. 그 무늬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도 그녀의 베 짜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멈추는 일이 자주 있었다. 허구한 날 똑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데에 질력이 난 직녀는 이따금 싫증이 났다. 그녀는 베틀의 북을 내려놓고 창가에 기대어 궁전 밖으로 넘실거리는 하늘의 강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둑을 따라 궁중의 양과 소 떼를 몰고 가는 한 목들을 보게 되었다. 절은 목동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그 목동이 자신의 배필이 될 거라는 예감에 가슴이 설렜다.
직녀는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그 목동을 그리다가 마침내 아버지인 옥황상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옥황상제는 견우란 이름의 젊은 목동이 총명하고 마음씨 착하며 하늘의 가축들을 잘 돌본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귀여운 딸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고 선뜻 받아들여 두 사람을 혼인시켜 주었다.
혼인을 한 두 젊은이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자신들의 맡은 소임을 까맣게 잊은 채 사랑에만 열을 올렸다. 옥황상제는 몇 차례 타일러보았으나 둘만의 행복에 도취된 이들은 그대뿐 다시 게을러지곤 했다. 마침내 옥황상제의 진노가 극에 달해서 이들을 영원히 떼어 놓기에 이르렀다.
견우는 은하수 건너 쪽으로 쫓겨나고 직녀는 아버지의 성에 갇힌 채 쓸쓸히 베를 짜야 했다. 옥황상제는 일 년에 단 한 번, 즉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날 밤에만 이들이 은하수를 건너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일 년 내내 그리움으로 야위어가던 이들은 음역으로 칠월 칠석이 되는 날 ‘칠일월(七日月)’이라는 배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비가 내리면 은하의 강물이 불어 배가 뜨지 두 사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강 언덕에서 직녀가 울고 있는 걸 보고 많은 까치가 날아와 그들의 날개로 하늘의 다리를 놓아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다고 한다. 칠석 무렵에 까치의 머리털이 빠져 있는 것은 하늘의 다리를 놓느라 애쓴 때문이라고 옛사람들은 말한다.
사랑하더라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칼릴 지브란의 표현을 빌자면, 거문고 줄이 한 가락에 울리면서도 그 선 자리는 따로따로라고 했듯이, 그처럼 떨어짐의 사이가 유지되어야 한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현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게으름이 최대의 악덕임은 사랑에도 예외일 수 없다는 교훈을 견우와 직녀가 말해 주고 있다.
지난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정한 밤하늘에 황홀하게 돋아난 별들을 나는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보았다. 장욱진 화백이나 백영수 화백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머리가 삐딱하게 가로 놓인 아이들은, 지상의 현실이 아니라 별이나 구름, 혹은 날아가는 새를 쳐다보느라고 그리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별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누워서 보아야 편하고 아늑하다. 지난해 여름 담양에서 짠 대 평상을 오로지 밤하늘에 별을 누워서 바라보기 위해 구해 놓았다. 혼자서 들 수 없는 무게라 뒤꼍에 세워둔 채 지난밤에는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자는 일보다는 한밤에 일어나 별을 바라보는 이런 일들이 내 삶에는 훨씬 보람 있는 일로 생각된다.
방에 들어와 불을 밝히고 별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지닌 한 친구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서가에서 별에 관한 책을 펼쳐 들고 별자리를 눈여겨보다가 밖에 나가 은하를 사이한 견우와 직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들어왔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과 천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테트 레이모의 <별밤 365일>(이태영 옮김)을 몇 페이지 읽었다. 이 책 서문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다.
‘비록 내가 한 사람의 과학자로 교육받았고 이론 천문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하늘에 대한 나의 관심을 과학적이 아니라 주로 심미적이다. ’ 내가 만약 무인도로 쫓겨나 몇 권의 책만을 가지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것은 과학 서적이 아니라 시집이나 자연사(自然史)에 관한 책일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이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다. 이 제목은 별이 아니라 별밤에 관한 것이다.
내가 그 말들을 쓸 때도 나는 반 고흐의 <별밤>이라는 신비한 그림을 연상하고 있었다. 생 레미의 하늘에 대한 반 고흐의 상상력은 소용돌이치는 성운, 달 같은 별들, 그리고 해 같은 달로 가득 차 있으며 꿈에서만 볼 수 있는 별밤 속으로 우리를 깊이 몰아간다.
밤하늘은 인간의 상상력을 흥분시키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친밀하지만 무한하고, 어두우면서도 밝고, 가깝지만 달려가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 별밤을 가까이하라, 한낮에 닳아지고 상처받은 우리들의 심성을 별밤은 부드러운 눈짓으로 다스려줄 것이다.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밤하늘에 이런 달과 별이 없다면 얼마나 막막하고 아득할까. 우리 마음속에도 저마다 은밀한 별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 삶 또한 막막하고 황량할 것이다.
산에 들어오기 전, 한 관상가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문득 떠오르곤 한다. 친구 집에 들렀는데 용한 관상가가 왔다고 친구 어머니가 내게 귀띔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일에 관심이 전혀 없어 시큰둥하고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 여자 관상가는 나를 흘낏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 학생은 밤하늘에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고고하게 살 상이오."
밤하늘에 별을 바라보며 살 거라는 이 말이 그때는 아주 시적으로 들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 밤에 소변을 보러 나가서는 으레 고개를 들어 북두의 성좌에 눈길을 보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주걱처럼 생긴 그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법을 만나 맑고 고요한 산에서 살게 된 인연에 고마움이 저절로 우러난다.
사철을 두고 밤하늘에 별은 돋지만, 봄밤에는 흐려서 별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가을과 겨울철에는 별빛이 영롱하지만, 밤 기온이 차가워 오래 지켜볼 수가 없다. 별을 바라보기에는 여름밤이 제격인데, 초저녁은 별들이 제 빛을 발하지 않다가 한밤중이 되면 영롱하게 드러나 별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
여름철 별자리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은하를 사이하고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백조자리와 거문고자리, 그리고 독수리자리이다. 거문고자리에서 가장 밝은 1등성은 직녀별이고 은하를 건너 맞은쪽 독수리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이 견우별이다.
별자리를 알고 별을 쳐다보는 것과 모르고 바라보는 그 감흥은 전혀 다르다. 꽃 이름을 알고 꽃을 대했을 때와 모르고 대했을 때의 그 느낌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이 8월 5일. 음력으로는 칠월 칠석. 일 년 내내 은하를 사이에 두고 안타깝게 눈길만 보내다가 오늘 하루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날이다.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별에 견주어 이야기한 우리 조상들의 정서가 오늘 그 후손인 우리 가슴에까지 절절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옛날 하늘의 옥황상제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하는 일은 온종일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는 일이었다. 그녀는 옷감에다 아름다운 별자리와 밝은 햇빛과 은은한 달빛 등을 짜 넣었다. 그 무늬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도 그녀의 베 짜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멈추는 일이 자주 있었다. 허구한 날 똑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데에 질력이 난 직녀는 이따금 싫증이 났다. 그녀는 베틀의 북을 내려놓고 창가에 기대어 궁전 밖으로 넘실거리는 하늘의 강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둑을 따라 궁중의 양과 소 떼를 몰고 가는 한 목들을 보게 되었다. 절은 목동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그 목동이 자신의 배필이 될 거라는 예감에 가슴이 설렜다.
직녀는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그 목동을 그리다가 마침내 아버지인 옥황상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옥황상제는 견우란 이름의 젊은 목동이 총명하고 마음씨 착하며 하늘의 가축들을 잘 돌본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귀여운 딸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고 선뜻 받아들여 두 사람을 혼인시켜 주었다.
혼인을 한 두 젊은이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자신들의 맡은 소임을 까맣게 잊은 채 사랑에만 열을 올렸다. 옥황상제는 몇 차례 타일러보았으나 둘만의 행복에 도취된 이들은 그대뿐 다시 게을러지곤 했다. 마침내 옥황상제의 진노가 극에 달해서 이들을 영원히 떼어 놓기에 이르렀다.
견우는 은하수 건너 쪽으로 쫓겨나고 직녀는 아버지의 성에 갇힌 채 쓸쓸히 베를 짜야 했다. 옥황상제는 일 년에 단 한 번, 즉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날 밤에만 이들이 은하수를 건너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일 년 내내 그리움으로 야위어가던 이들은 음역으로 칠월 칠석이 되는 날 ‘칠일월(七日月)’이라는 배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비가 내리면 은하의 강물이 불어 배가 뜨지 두 사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강 언덕에서 직녀가 울고 있는 걸 보고 많은 까치가 날아와 그들의 날개로 하늘의 다리를 놓아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다고 한다. 칠석 무렵에 까치의 머리털이 빠져 있는 것은 하늘의 다리를 놓느라 애쓴 때문이라고 옛사람들은 말한다.
사랑하더라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칼릴 지브란의 표현을 빌자면, 거문고 줄이 한 가락에 울리면서도 그 선 자리는 따로따로라고 했듯이, 그처럼 떨어짐의 사이가 유지되어야 한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현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게으름이 최대의 악덕임은 사랑에도 예외일 수 없다는 교훈을 견우와 직녀가 말해 주고 있다.
지난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정한 밤하늘에 황홀하게 돋아난 별들을 나는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보았다. 장욱진 화백이나 백영수 화백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머리가 삐딱하게 가로 놓인 아이들은, 지상의 현실이 아니라 별이나 구름, 혹은 날아가는 새를 쳐다보느라고 그리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별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누워서 보아야 편하고 아늑하다. 지난해 여름 담양에서 짠 대 평상을 오로지 밤하늘에 별을 누워서 바라보기 위해 구해 놓았다. 혼자서 들 수 없는 무게라 뒤꼍에 세워둔 채 지난밤에는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자는 일보다는 한밤에 일어나 별을 바라보는 이런 일들이 내 삶에는 훨씬 보람 있는 일로 생각된다.
방에 들어와 불을 밝히고 별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지닌 한 친구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서가에서 별에 관한 책을 펼쳐 들고 별자리를 눈여겨보다가 밖에 나가 은하를 사이한 견우와 직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들어왔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과 천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테트 레이모의 <별밤 365일>(이태영 옮김)을 몇 페이지 읽었다. 이 책 서문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다.
‘비록 내가 한 사람의 과학자로 교육받았고 이론 천문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하늘에 대한 나의 관심을 과학적이 아니라 주로 심미적이다. ’ 내가 만약 무인도로 쫓겨나 몇 권의 책만을 가지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것은 과학 서적이 아니라 시집이나 자연사(自然史)에 관한 책일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이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다. 이 제목은 별이 아니라 별밤에 관한 것이다.
내가 그 말들을 쓸 때도 나는 반 고흐의 <별밤>이라는 신비한 그림을 연상하고 있었다. 생 레미의 하늘에 대한 반 고흐의 상상력은 소용돌이치는 성운, 달 같은 별들, 그리고 해 같은 달로 가득 차 있으며 꿈에서만 볼 수 있는 별밤 속으로 우리를 깊이 몰아간다.
밤하늘은 인간의 상상력을 흥분시키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친밀하지만 무한하고, 어두우면서도 밝고, 가깝지만 달려가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 별밤을 가까이하라, 한낮에 닳아지고 상처받은 우리들의 심성을 별밤은 부드러운 눈짓으로 다스려줄 것이다.
<92. 9>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