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기
  • 아래로
  • 위로
  • 목록
  • 댓글

까치소리 들으며

오작교 8

0
   내 오두막에 아침부터 까치가 와서 지저귀고 있다. 개울가 미루나무에 둥지를 짓고 사는 까치인데, 이 까치가 없었다면 한겨울 오두막 둘레는 좀 적막할 뻔했다. 같은 까마귓과에 딸린 새인데도 까치와 까마귀는 그 소리와 생김새며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 전혀 다르다.

   까마귀는 그 모습도 어두워 좀 흉물스럽지만, 지저귀는 소리가 역겨워 흔히 흉조로 친다. 지붕 용마루에 앉아 까마귀가 울면 그 집에 무슨 흡사가 있을지 은근히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고정관념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길흉에 상관없이 혼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인도에는 어디를 가나 까마귀 떼가 이른 아침부터 극성스럽게 소란을 피운다. 늦잠꾸러기들은 이 까마귀들 때문에 잠을 방해받을 만큼 아주 시끄럽다. 50년대 초 내가 흑산 홍도에 드나들 때도 이 까마귀 떼들이 극성스러웠다. 담장 위에 널어 말리는 생선을 물어가기 일쑤이고, 심할 때는 코흘리개들이 손에 들고 있는 고구마 같은 것을 날쌔게 채어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반 고흐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파리 서북쪽 오베르쉬르와즈에 가면, 그의 충직한 동생 테오와 나란히 묻힌 묘가 담쟁이덩굴에 덮여 있다.

   그 묘지 너머는 드넓은 농경지인데, 내가 갔을 때는 초겨울이라 베어낸 밀포기만 썰렁하게 남아 있었다. 석양에 비낀 그 들녘에 때마침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선회하는 모습은 마치 고흐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까치는 그 생김새도 산뜻하고 날렵할 뿐 아니라 소리도 들기 좋고 해충을 잡아먹는 익조(益鳥)다. 이 까치는 우리나라의 국조(國鳥)로 아침에 집 앞에 와서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내 오두막에는 찾아올 반가운 손님은 없다. 그렇지만 아침부터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푸근하고 넉넉해진다.

   나는 지난 가을에 벼루를 두 개 구했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중에서도 벼루 쪽에 마음이 끌린다. 아무 장식 없이 담백하고, 조촐한 형태에 먹 가는 면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벼루를 보면 문득 가지고 싶은 생각이 인다. 아무리 좋은 돌로 만든 벼루라 할지라도 먹 가는 면이 고르지 않으면 별로다. 먹을 갈 때 비단결같이 부드러워야 한다.

   지난 가을 인사동을 지나다가 그전부터 아는 문방구 가게에 불쑥 들렀었다. 주인은 바뀌었는데 선뜻 눈에 띄는 벼루가 있어 진열장에서 꺼내달라고 했다. 연지(硯池) 쪽이 좁은 내 손바닥만 한 타원형인데, 그 모양새며 정교한 면이 마음에 들어 구매했다. 그 벼루를 사 오던 날 밤 몇 차례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마다 머리맡에 둔 벼루를 매만지며 행복스러웠다. 이튿날 그 벼루에 먹을 갈아 붓장난했다.

   부휴(浮休) 선사의 시를 써서 벽에 붙여놓으니 이 오두막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바람 잦아 머루 다래 떨어지고 산 높아 달이 일찍 진다 내 곁에는 사람 그림자 없고 창밖에 흰구름만 자욱하다.

   또 한번은 문구류를 사러 큰 가게에 들렀었는데, 개방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에서 들여온 산뜻한 문구류들이 눈길을 끌었다. 한쪽에 우리 손으로 만든 필묵(筆墨))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직경 12센티도 채 안 된 둥근 벼루가 눈에 띄었다.

   덮개를 열어보니 일월연(日月硯)이었다. 덮개의 손잡이가 좀 투박하긴 하지만, 면도 고르고 전체적인 느낌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즐거운 마음으로 구했다. 역시 작은 것은 아름답다.

   다음날, 일기에 나는 이렇게 썼다.

   <새로 구해 온 벼루에 먹을 갈아 오랜만에 편지를 쓰니 마음이 향기로워지려고 했네. 밝은 창 아래, 방은 따뜻하고 먹을 것 풍족하고 읽은 책 넉넉하며 몸 또한 별 탈 없으니 사는 일이 그저 고마울 따름..>

   지난 가을 중국을 다녀온 법련사 현호 주지스님이 선물로 책처럼 생긴 필묵함을 하나 사 왔었다. 어느 필장(筆莊)에서 만든 것으로, 그 속에 조그만 벼루도 들어 있었는데 연지 위에 봉황이 새겨 있었다. 내가 지닌 벼루 중에 가장 작은 벼루가 될 것이다. 휴대용으로 나그넷길에 지니고 다니기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필묵함 안에는 또 붓 두 자루 와 산 모양으로 된 필가(筆架), 연적과 인주 낙관용 인재(印材)까지 두 개 들어 있었다. 먹도 한 자루 들어 있는데 앞면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서호경(西湖景)을 넣었고, 뒷면은 우정청상(雨亭淸賞)이라고 금박으로 음각되어 있다.

   우리 옛 선인들은 이런 필기구를 지니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즐기면서 시서화(詩書畵)로 쓰거나 그렸을 것이고, 정든 사람들에게 사연을 띄웠을 것이다. 붓으로 쓴 예전 편지를 보노라면 그 사람의 고담(枯淡)한 인품과 고준(高峻)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추사(秋史)가 유배지에서 부인 예안 이씨에게 보낸 우리글로 된 편지에서도 그 인품과 기상을 역력히 대할 수 있다.

   옛날에 비해 요즘의 필기도구는 얼마나 편리해졌는가. 만년필에 볼펜, 수성펜, 이런 것도 이제는 귀찮고 더디다고 해서 컴퓨터를 이용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편리해진 만큼 잃어버리는 것은 없을까. 미끄럽게 나가는 필기구나 혹은 기계를 이용한 속도에만 의존하다 보면, 생각보다 가볍고 빨리 글이 앞으로 내닫게 마련이다. 그래서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는 글이 얼마나 양산되고 있는 현실인가.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는 글은 사실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

   한때는 나도 글을 쓰는 데에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 볼까 하는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곁에서 그걸 이용하는 친구들이 있어 속도와 편리한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군데 카탈로그까지 구해다가 훑어보았는데, 결국은 재래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만두게 된 까닭은, 시력이 많이 소모된다고 했기 때문이고, 기계의 덩치가 커서 내 조촐한 산방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보다도 지금까지 길들여온 필기구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활자화될 글을 쓸 때는 반드시 만년필로 원고지에 쓰고 있다. 불펜이나 다른 필기구는 만년필만큼 편하고 익숙하지 않다. 볼펜은 너무 미끄러워 생각보다 빨리 흘러가고 쓰다 보면 촉에 눈꼽이 생겨 지저분한 게 싫다. 수성펜은 종이에 배어드는 질감이 잉크만 못한 것 같다.

   펜촉도 가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F보다 한층 더 가는 XF(액스트라 파인) 쪽을 고른다. 이유인즉슨 무딘 펜촉으로는 섬세한 감성을 담기가 어렵다는 내 편견에서다. 훗날 내 마음이 더 투명해지면, 만년필 대신 먹을 갈아 붓으로 글을 쓰고 싶다. 먹을 갈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삶의 여운이 번 생각을 또박또박 꽃향기처럼 품어 내고 싶다.

   나는 아직도 문방구를 파는 가게에 들르면 자신의 처지도 까맣게 잊은 채 들뜨고 황홀해진다. 보는 즐거움도 있고 고르는 즐거움도 있다. 궁핍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는 연필 한 자루가 귀했었다. 잠자리 상표가 찍힌 연필 한 자루만 가졌어도 그 반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해외 여행길에 즐겨 들르는 곳이 문방구 가게다. 국내에서 보지 못한 신기한 문방구를 보면 가습이 마냥 부풀어 오른다. 보기만 해 도 그 자체가 황홀한 삶이 된다.

   지난 가을 강남의 종합전시장에서 '국제문구류전시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기대를 하고 가보았다. 말이 '국제'지 대개가 우리 제품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문구류 전시회에 종이와 붓과 먹과 벼루 등 문방사우가 빠져 있는 걸 보고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한겨울인데도 날씨가 화창하다. 어제는 대설(大雪)인데 눈 대신 비가 내렸다. 올겨울이 따뜻한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훨훨을 벗어버린 겨울 숲은 의연하지만 조금은 적막해 보인다.

1993. 1
글 출처 : 버리고 떠나기(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공유
0
댓글 등록
취소 댓글 등록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법정스님의 의자 1 오작교 22.08.06.11:59 4466
normal
오작교 25.01.16.10:15 8
297
normal
오작교 25.01.16.09:34 12
296
normal
오작교 24.11.20.15:59 192
295
normal
오작교 24.08.23.10:35 410
294
normal
오작교 24.07.03.13:00 475
293
normal
오작교 24.06.05.13:56 646
292
normal
오작교 24.02.26.11:16 769
291
normal
오작교 23.12.15.10:56 794
290
normal
오작교 23.07.15.15:03 1005
289
normal
오작교 23.07.15.14:07 1008
288
normal
오작교 23.06.28.09:33 948
287
normal
오작교 23.06.28.09:14 985
286
normal
오작교 23.04.27.15:33 885
285
normal
오작교 23.03.21.08:36 924
284
normal
오작교 23.03.21.08:10 939
283
normal
오작교 23.01.25.09:23 989
282
normal
오작교 23.01.25.08:59 998
281
normal
오작교 22.12.08.11:03 1273
280
normal
오작교 22.09.26.10:57 1053
279
normal
오작교 22.08.02.13:57 1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