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 국가들과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생산해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사진엽서.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민음사)의 저자 권혁희 씨는 책을 위해 1500여장의 사진 엽서를 모아 이 가운데 주제가 선명히 드러나는 자료들 300여 장을 추려 책에 실었다.
이 책은 사진엽서가 하나의 '문화적 유물'이라는 전제 아래 그 유물에 은영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추적하고 있다.
권씨는 책을 통해 서양인들의 시선은 야만적인 동양인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이건이 문명과 야만, 서양과
동양, 백인과 유색인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재현되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죄인들
목에 칼을 쓴 채 물끄러미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세 남자와 살짝 눈빛을 떨어뜨리고 있는 맨발의 소녀.
무엇 때문에 이들은 감옥에 있지 않고 관아의 뜰에 나와 앉게 되었을까?
이 사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풍속 사진엽서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엽서는 관광 기념용 사진엽서 가운데 한 장이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되었던 '상품'이다.


카메라와 총
카메라와 총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로 진풀하기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과학의 산물이었다.
총은 식민지를 제압하기 위한 물리적 폭력 수단으로, 사진은 새로운 정복지의 정보를 확보하기 위한 기록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사진에는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고 있는, 총을 든 사람이 보인다. 지배자의 무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살마저 상품
화한, 학살의 현장까지 저들만의 고상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폭력일 것이다.


인체측정
인체 측정은 인류학자들이 인종 간의 신체적 특징을 통해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나아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우생학의 근거를 마련한 방법론이었다. 즉 과학이라는 근대 학문의 이름을 빌린 폭력적인 제국주의 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위 사진처럼 비서구인은 측정의 대상으로서,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표본으로 측량 되었다.



도리이 류조의 조선인 사진
이 사진들은 정면과 측면을 촬영해 인종적인 특성을 관찰함으로써 체질 인류학적 연구의 자료로 이용되었다.
조선인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역, 성별, 계층에 따른 표본을 찍어 분석한 자료의 축적은 식민 정부의 후원 아래 면밀하게 진행됐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정 기념 엽서
이 엽서는 2년 동안의 식민통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초가집과 좁은 도로의 이미지는 개발되기 이전의 낙후한 조선이며, 이와 반대로 웅장한 서구식 건물과 넓은 도로, 거리를 오고가는 자동차의 이미지는 근대화된 조선을 강조하고 있다.


박람회장에 전시된 조선인 인형
북해도 박람회와 조선박람회장 전시관에 소개된 조선인 인형이다.
머리 모양과 복장으로 조선인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詩)가 있는 경성 시가지 전경
길가에서 슬피우는 귀뚜라미 소리
사라져간 옛 것은 아름답고 그리워

우리들 고향은 멀리 먼 고려라고 부르는 나라랍니다.
그곳에서 태어난 두견새는 여름에도 구슬피 운답니다.



만들어진 풍속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짚신을 파는 소녀
짚신을 가득 지게에 싣고 있는 지게꾼과 목에 짚신 다발을 감고 있는 소녀.
거리를 지나던 사진가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그들을 멈추게 하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남자와 소녀는 카메라를 피해 살짝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산더미처럼 ?인 짚신 다발을 힘겹게 지고 있는 모습은 하류층 남성의 이미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아리랑과 사진엽서
아리랑은 한국인의 정서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민요다. 특히 가사와 곡조에서 느껴지는 비애는 마치 한국인만의 본질적인 민족성처럼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숙명적 비애의 정서는 식민지라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불과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신문과 잡지에서 망국의 한을 빗댄 애처롭고 구슬픈 한국인의 정서를 공공연하게 조장했으며, 식민지배자 역시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민족적 슬픔을 적극 전파했다. 이 사진엽서도 기생이미지와 나란히 아리랑의 가사를 적어놓음으로써 가련하고 애처로운 조선인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일조했다.



알레베크 발행 엽서


1903년 파리로 보낸 엽서 한 장
1900년 초반 서구에서 생산된 엽서다. 엽서는 서울에서 상하이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앞면에는 거리 풍경과 조선인 여성의 전형적 이미지인 장옷을 입고 외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한 사진 속에서 초기 사진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풍속 사진이나 풍속 엽서들이 사진관에서 생산되고 판매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