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윤심덕(1897∼1926)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한국대중음악의 시초였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일본유학까지 마친 
음악엘리트였던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유명한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허무와 염세로 가득한 노랫말을 붙여 취입한 것이다.
 
이 곡은 희망가와 크게 두 가지 차이가 있다. 
희망가의 가사가 희망적인 것에 비해 허무, 염세주의의 가사였고 
또 하나는 희망가는 무반주였지만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동생의 피아노 반주가 들어간 음악 이였다는 점이다.

윤심덕은 이 노래를 녹음한 직후 
그의 애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귀국 길의 관부연락선 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자살한
스캔들로 조선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 센세이션으로 인해 그때까지 미미하기 그지없었던 
축음기(하드웨어)와 음반 (소프트웨어)시장이 
일거에 열림으로써 일본의 음반산업자본은 
식민지 시장을 확보하는 교두보를 쌓았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투신자살은 
당시의 봉건적 사회분위기에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유연애 관을 공공연하게 피력했던 매력적인 신여성, 
그리고 이미 가정이 있는 와세다대학의 엘리트가 죽음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한 것,
그리고 그런 결단을 암시하는 듯한 <사의 찬미>의 비극적인 가사는
암울한 식민지의 대중들의 마음을 극적으로 달아오르게 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사건의 의혹은 관부연락선의 종업원이 발견했다는 
짤막한 유서 이외엔 이들의  동반 자살을 입증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심덕의 이른바 "현해탄의 정사"가 자살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일본 음반산업이 계획한 
타살 극이 아닌가 하는 시나리오도 의외로 설득력이 있다. 

윤심덕이 이토오 레코드사와 계약할 때 노래 목록엔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애당초 없었다는 것과 
유학까지 마친 음악엘리트가 정식으로 녹음한 것치고는 
너무 어설펐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진실이 어찌하건 간에, 윤심덕의 현해탄 센세이셔널리즘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음반 시장이 활짝 열렸고 
바로 이듬해에 경성 라디오 방송이 출범했다는 것은 
우연치곤 지독하게 맞아떨어지는 우연임에 틀림없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