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광주(光州)에 있는 한 산업체에서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강연을 하고 5시 10분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단하던 참이라 잠을 좀 잤으면 싶었는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그놈의 운동경기 중계 때문에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서 우리들의 귀는 쉴 여가도 없이 줄곧 혹사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기 싫은 것은 눈을 감아 버리면 그만이지만, 열려 있는 귀는 그럴 수 없으니 번번이 곤욕을 치르게 된다. 듣지 않을 수 있는 거부의 자유가 오늘 우리에게는 없다. 이것은 어쩌면 치밀하게 계산된 통치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냐면 세뇌를 하듯 끊임없이 이어지니까.

    잠을 잘 수 없을 바에야 눈을 뜨고 평화로운 황혼의 들녘에 마음 내맡기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 산그늘이 내릴 무렵 들녘은 한결 정답고 풍성하게 보인다. 창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메밀밭에서 메밀꽃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드넓은 호남평야 김제 들녘에 이르렀을 때 벌겋게 물든 해가 지평선 위에 걸리었다. 오랜만에 지켜보는 일몰의 아름다움. 그 전날 비가 내린 뒤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갠 날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들녘 너머로 뉘엿뉘엿 잠겨드는 해를 보면서, 사람의 죽음도 그처럼 고용하고 맑은 적멸(寂滅)이라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물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게 없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니까.

    해가 넘어간 뒤 땅거미가 질 때까지 그 저녁놀의 잔영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여리고 순하디 순한 빛깔을! 사람의 마음을 빛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착하고 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빛깔을 띠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의 일몰은 내 존재의 정결한 기쁨이었다.

    곁자리에 앉은 대학생 같은 친구한테 해가 기울 때부터 저걸 보라고 일러주었지만, 그는 스포츠 중계에 귀를 하느라고 다른 데서는 보기 드문 그토록 아름다운 저녁놀을 본체만체했다. 그 어떤 세월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은 한결같건만 우리는 이제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려면 고요한 침묵이 따라야 하는데, 시끄러움에 중독된 이 시대의 우리들은 그 침묵을 감내할 만한 인내력이 없는 것이다. 침묵을 익히려면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홀로 있을 만하면 초라한 자기 모습이 드러날까 봐서인지 바깥 소리를 찾아 이내 뛰쳐 나가버린다. 침묵을 익히려면 밖으로 쳐다보는 일보다도 안으로 들여다보는 일을 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질보다는 양을 내세우는 오늘 이 땅의 우리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를 채우려고만 하지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청 비워야 메아리가 울리고 새것이 들어찰 수 있다. 온갖 집착과 굳어진 관념에서 벗어난 텅 빈 마음이 우리들을 가장 투명하고 단순하고 평온하게 만든다.

    선가(禪家)에 이런 말이 있다.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텅 비울 때 체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은 비로소 자기가 된다.”

    즉, 자기 마음을 텅 비울 때 본래적인 자아, 전체인 자기를 통째로 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또한 자기 존재를 마음껏 전개하는 일이 된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려운 오늘 같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사람의 자리를 지켜나가려면 하루 한때라도 순수한 자기 자신을 존재케 하는 새로운 길들임이 있어야 한다. 얽히고 설켜 복잡하고 지저분한 생각이 죄다 사라져 버린 순수의식의 상태, 맑게 갠 날 해가 진 뒤의 그 순하디 순한 놀빛 같은 무심(無心)이, 일상에 찌든 우리들이 혼을 맑게 씻어줄 것이다.

    가득가득 채우려고만 하던 생각을 일단 놓아버리고 텅 비울 때, 새로운 눈이 뜨이고 밝은 귀가 열릴 수 있다. 사실 우리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영역은 전체에서 볼 때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려면 눈에 보이는 부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육지를 바로 보려면 바다도 함께 보아야 하고, 밝은 것을 보려면 어두운 것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친구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알고 있어야 하듯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거죽과 속을, 혹은 현상과 본질을 함께 볼 수 있어야 무엇이 거짓이고 참인지를 알게 될 거라는 뜻. [금강경]에 있는 말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성(혹은 영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그 힘(생명력)을 제대로 쓸 줄을 알아야 한다. 그 힘을 바람직한 쪽으로 잘 쓰면 얼마든지 창조하고 형성하고 향상하면서 살ㄹㅁ의 질을 거듭거듭 높여 갈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생명력이라도 서로 다른 지배를 받아, 한 장미나무에서 한 갈래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다른 갈래는 독이 밴 가시로 돋아난다. 도덕성이 결여되었거나 삶의 목적에 합당치 못한 일은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올바른 결과는 가져올 수 없다.

    사람은 하나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가 의식을 하건 안 하건 둘레의 대기에 파장을 일으켜 영향을 끼친다. 착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착한 파장으로 밝은 영향을 끼치고, 착하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또한 착하지 못한 파장으로 어두운 영향을 끼친다.

    사람은 겉으로는 강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존재다.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려 고통을 주는 일이 적지 않다.

    우리는 순간순간 내게 주어진 그 생명력을 값있게 쓰고 있는지, 아니면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는지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삶이 양을 따지려면 밤낮없이 채우는 일에만 급급해야겠지만,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비우는 일에 보다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밤, 풀벌레 소리에 귀를 모으면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본 것이다. 오로지 인간이 되기 위해서.
(83. 10. 16)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