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입선(入禪)시간, 선실(禪室)에서 졸다가 대숲에 푸실푸실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혼침(昏沈-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점심공양 뒤 등 너머에서 땔나무를 한 짐 지고 왔더니 고단했던 모양이다. 입춘이 지나간 지 언제인데 아직도 바람 끝은 차고 산골에는 이따금 눈발이 흩날린다.

    아까 산길에서 비전에 사시는 성공 스님을 만났다. 80이 가까운 노스님이 지게에 한 짐 가득 땔감을 지고 가시는 걸 보고,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온유한 수행자의 모습에 숙연해졌다. 요즘은 밥 짓는 공양주가 한 사람 들어와 다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스님들 두 분이 손수 끓여 자시면서 지냈다. 정진시간이 되면 거르지 않고 염불소리가 뒷골에까지 메아리친다. 비전은 염불당(念佛堂)이기 때문이다. 성공 노스님은 한때 학인(學人)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강사(講師)로도 지낸 바 있지만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젊은 스님들한테도 또박또박 존댓말을 쓰면서 겸손을 지킨다. 이 땅에서 80년 가까이 살면서도 아직 서울에 가보지 않았다는 흙냄새 풍기는 인자하신 스님. 지난해 봄에는 상좌의 주선으로 제주도를 다녀오셨는데 어린애처럼 마냥 좋아라 하시면서 한라산을 오을 때는 그 걸음걸이가 젊은 상좌보다 앞서 펄펄 달리더란다.

    큰절 임경당에는 올해 여든 다섯 살이 되는 취봉 노스님이 계신다. 젊어서는 일본에 건너가 종립 대학에서 수학도 했고 몇 차례 주지직도 맡아 지낸 노스님인데, 근면과 단순과 청빈으로 후학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이는 대덕(大德)이시다.

    스님은 사중(寺中)물건과 개인의 소유에 대한 한계를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몸에 익히고 있다. 한번은 감기 몸살로 앓아누워 계실 때, 약을 달이느라 시중들던 스님이 생강을 한 뿌리 후원 원주실에서 가져다 썼다. 그걸 아시고 단박에 사다가 갚으라고 하실 만큼 공사(公私)의 개념이 분명하시다. 주지로 계실 때에 사중 볼일로 출장시 사무실에서 주는 여비를 쓰고 나머지는 단돈 10원이 될지라도 반드시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요즘 사중 소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공중물건을 가지고 마치 자기 개인 것이나 되는 듯이 함부로 사용하는 폐습이 있는데, 노스님의 그 같은 모범은 커다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90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법당의 조석 예불과 대중공양에 거르는 일이 결코 없다. 걸핏하면 예불을 거르고 후원에서 따로 상을 차려 먹기를 좋아하는 덜된 중들에게는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할 승가의 청정한 생활규범이다.

    이런 노스님들이 계시는 산붕에서 함께; 사는 것은 나는 참으로 고맙고 다행하게 생각한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생활규범에 의해 둘레에 한없는 빛과 거울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한결같은 겸손과 단순과 청빈으로 그들 스스로 구원하고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노스님들은 참선이 어떻고 화두(話頭)가 어떻고 견성(見成)이 뭐라고 말하는 일은 별로 없다ㅓ. 그저 묵묵히 몸소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대개의 경우 뭘 알았다고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리는 스님들한테서는 수행자의 덕성인 그 겸손과 단순과 청빈과 온유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슬이 푸른 오만과 독선과 아집이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진해서 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고 피곤하다.

    선가(禪家)에 한고추(閑古錐)란 용어가 있는데, 닳아져서 무딘 송곳을 가리킨 말이다. 수행자의 경지가 원숙해져서 서슬이 밖에 드러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니 서슬이 푸른 것은 미숙함을 드러낸 것.

    알면서도 그 앎에 걸려 있지 않는 성숙한 지혜가 귀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도로써 자만(自慢)한다면 그는 결코 선지식(善知識)일 수 없다. 관념의 찌꺼기인 상(相)이 있으면 진짜 수행자가 아니라고 대승(大乘) 경전에서는 입이 닳도록 말하고 있지 않던가.

    수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학식이나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자만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덕성을 길러준다.

    투철한 안목과 번뜩이는 기량으로써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명안종사(明眼宗師)의 기능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이름 없는 노스님들처럼 수행자로서 한결같이 정직하고 겸허하고 꿋꿋하게 살아감으로써 후학들에게 끼치는 덕화는 보다 더 소중하다.

    사람을 본질적으로 감화시키는 것은 그럴듯한 말에 있지 않고 몸소 움직여 보이는 행동에 있다. 좋은 말을 한다는 것과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의 지식보다 뛰어날 때 그 지식은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 사람의 행위보다 크게 드러날 때 그 지식은 무익한 것이다. 진짜 수행자는 그 어떤 종파를 막론하고 앞뒤가 툭 트인 단순성에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아, 생각만 해도 숙연해지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그가 크리스마스 전 단식기간을 어떤 은둔처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만년의 그는 여러 가지 병고를 치른다. 올리브기름이 건강에 해로워 돼지기름으로 요리한 음식을 조금 먹었다. 단식이 끝날 무렵 대중 앞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나를 성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면서헌신적인 사랑으로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단식기간에 돼지기름으로 만든 음식을 먹었음을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알려진 사실을 이웃들에게 감추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영성(靈性)에 자만심이나 번뇌의 유혹이 있을 때는 즉시 그의 형제들에게 감추는 일 없이 그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자기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머무는 은둔처나 어떤 곳에서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지켜 볼 수 있도록 나는 살고 싶소. 그들이 나를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성스러운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나는 위선자가 될 것이오.”
   수행자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을 그는 단호히 배격한 것이다. 세상에 빛과 거울이 될 이런 분들을 스승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요 커다란 위로다. 이런 분들의 덕화가 미치고 있는 한 그 어떤 세상에서라도 인간은 절망하거나 멸하지 않을 것이다.
(1982. 3)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