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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글

오작교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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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산방한담
    불일암에서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살았는데 새로 옮겨온 이곳에서는 늘 시냇물소리를 들어야 한다. 산 위에는 항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나 낮은 골짜기에는 바람 대신 시냇물이 흐른다.

    바람소리 물소리가 똑같은 자연의 소리인데도 받아들이는 느낌은 각기 다르다.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때로는 사는 일이 허허(虛虛)롭게 여겨져 훌쩍 어디론지 먼 길을 떠나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폭풍우라도 휘몰아치는 날이면 스산하기 그지없이 내 속은 거친 들녘이 된다.

    그런데 이번에 옮겨온 집은 시냇가에 자리 잡은 곳이라 쉬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소리를 좋으나 싫으나 밤낮으로 듣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며칠 동안은 더구나 비가 내린 뒤라 그 소리에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무심해져서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는 소리라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시간에 대한 관념이 새로워진다.

    바람소리가 때로는 까칠까칠 메마르고 허전하게 들리는 것과는 달리, 물소리는 어딘지 촉촉하고 풍성하게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한없이 무엇인가를 씻어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때 높은 데서 드러나게 살았으니, 이제는 낮은 데 내려와 은신해서 살고 싶다. 혼자서 유별나게 살아보았으니 이제는 또 여럿 속에 섞이어 그 그늘 아래 묻혀서 살고 싶다. 이 세상을 내 힘으로 바꾸어놓을 수 없을 바에야, 내 자신의 생활구조만이라도 개조해 보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 잠재된 ‘나’를 일깨워보고 싶다. 인생은 어떤 목표나 완성이 아니고 끝없는 실험이요 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불일에서는 꼬박 7년 반을 살았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우선 부처님(佛像)한테 미안하고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이 부처님은 10여 년 전 다래헌 시절부터 모셔온 인연이 있다. 어느 날 폐사된 절에서 가져와 큰방 탁자 위에 모셔놓은 것을 처음 보자마자 전에 없이 가슴이 설레었다. 첫눈에 이끌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만남’이었다. 원불(願佛)로 모시리라고 마음먹었다. 고불(古佛)은 아니지만 단아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다래헌에서 불일암으로 옮겨올 때 다른 짐은 짐칸에 실었어도 이 부처님만은 곁자리에 조심스레 모시고 왔었다. 혼자서 지내느라면 자칫 게을러지기 쉬운 법인데. 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덕에 조석으로 게을러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발원(發願)에 귀를 기울여 준 것도 그 부처님이고, 내 못된 성미며 버릇을 너그럽게 받아준 것도 그 부처님이다. 때로는 볼일로 큰절에 내려와 있다가 밤이 늦어 자고 가라고 곁에서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그때마다 기를 쓰고 올라간 것은, 부처님 홀로 빈집에 계시게 하기가 안 되어서였다. 이런 부처님을 한동안 하직하려고 하니 미안하고 서운한 생각이 안들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 마음에 걸리는 이웃으로는 내 손수 심어서 가꾼 나무들이었다. 떠나오는 날 후박나무와 향나무 은행나무들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두고 혼자서만 가려느냐고 마냥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허구한 날 우리는 맑은 햇살을 함께 쪼였고 별과 달도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보라와 비바람도 또한 함께 받아들였다. 가지를 따주고 두엄을 묻어준 갚음으로, 그들은 청청한 잎과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여름날의 더위를 식혀주곤 했었다. 우리는 한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존재로서 살뜰한 정을 주고받았었다.

    나그네 길을 떠나기 위해 행장을 챙길 때에도 흔히 느끼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혼자서 이삿짐을 ㄹ주섬주섬 싸고 있을 때 문득 시장기 같은 것을, 허허로운 존재의 본질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살 만큼 살다가 자기 차례가 되어 혼자서 이 지상에서 사라져갈 때에도, 왔던 길을 되돌아갈 그때에도 이런 존재의 허무 같은 것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남의 집 셋방 신세를 지면서 여기저기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의 고달프고 쓸쓸한 심정을 얼마쯤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내 자신의 경우는 스스로 선택해서 옮겨가는 것이지만, 자기 집이 없는 사람들은 집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고, 집을 비워 달라는 말 한마다에 기가 죽어 다시 또 이삿짐을 주섬주섬 꾸릴 때, 그 막막하고 고달픈 심경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니 내 집 마련을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그토록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몸담고 살아갈 주거공간을 내 식으로 고치느라고 며칠 동안 분주히 보냈다. 엉성한 전기 배선을 안전하게 다시 하고, 다락도 말끔히 치워 새로 도배를 했다. 후원(後園)의 수각(水閣)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마당 한쪽까지 수도를 끌어들이고, 개울에서 넓적한 돌을 주워 다가 빨래터도 하나 만들어놓았다.

    더운물을 쓸 수 있도록 군불 지피는 아궁이에 솥을 걸었더니 불이 잘 안 들였다. 다시 뜯어내어 이맛돌을 낮추어 걸었다. 이제는 활활 잘 들인다. 굴뚝도 그전보다 높였다. 절에서 흔히 말하는 목연탑을 세운 것. 나무 타는 연기가 나오는 굴뚝이라고 해서 장난삼아 그렇게들 부른다.

    대밭에서 서너 발 되는 장대를 베어다 앞마당에 바지랑대로 걸어두었다. 헛간에서 헌 판자를 주어다가 또닥또닥 손놀림 끝에 한자 높이의 보조 경상(經床)도 하나 만들었다.

    방안 벽에 대못을 두 개 박아 가사와 장삼을 걸고, 반쯤 꽃이 핀 동백꽃 가지를 꺾어다 백자 지통에 꽂아 놓으니 휑하던 방안에 금세 봄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임제 선사의 어록 중에서 좋아하는 한 구절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今 更無時節)’이라고 쓴 족자를 걸어놓으니 낯설기만 하던 방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는 말. 한번 지나가버린 과거를 가지고 되씹거나 아지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살라는 이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기운이 솟는다.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다. 이 자리에서 순간순간을 자기 자신답게 최선을 기울여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 아래서라도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밤이 깊었다. 법당에서 삼경(三更) 종을 친 지도 한참이 되었다.

    다시 들려오는 밤 시냇물소리.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 같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시냇물은 흐르고 또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 우리들 목숨의 흐름도 합일(合一)의 바다를 향해 그처럼 끝없이 을러갈 것이다.
(1983. 5)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2011.06.12 (09:41:01)
[레벨:3]함환제
 
 
 

군더더기가 없는 언어들... 산방에서 관조한 삶에 대한 명찰.본래 인생이 無常한 것인데,순간순간 너무 집착하며 살아오진 않았는지..

 
(175.116.229.98)
  
2011.06.12 (20:46:27)
[레벨:29]id: 오작교
 
 
 

참 오랜만에 이 공간에 댓글이 달렸군요.

우리 홈 새내기시지요?

홈 가족이 되심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10.204.44.5)
  
2011.09.19 (13:33:59)
청송
 
 
 

세상에 법정스님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만 있다면 .... 

불광사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집사람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닫는 중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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