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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우뚝 자기 자리에 앉으라

오작교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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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일기일회(一期一會) 법정스님 법문집
봄을 지나 여름으로 건너가는 5월 마지막 주, 흰 구름 몇 개가 떠다니는 화창한 날씨 속에 하안거 결제법회가 열렸다. 스님은 “이 5월, 절에 행사가 너무 많아 제가 주주 나타나서 피차 신선감이 덜합니다.”라는 인사말로 법문을 시작했고, 그 말에 청중이 다 함께 웃었다. 스님은 이어서 말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희소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헐값에 자주 등장하니까 좀 그렇습니다. 제가 그동안 병으로 나오지 못해 그걸 갚느라 이 5월에 자주 나오게 되나 봅니다. 오늘 여름안거 결제가 시작되면 이제 한동안 뜸을 들여 가지고 한참 후에나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오늘은 여름안거를 시작하는 결제일입니다. 이날부터 90일 동안 우리가 어떤 각오로써, 어떤 결의로써 지낼 것인지 결정하는 날입니다. 제도를 맺는다고 해서 ‘결제(結制)’라고 하는데, 앞으로 90일 동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학자(기록에는 ‘엄양’이라는 사람)가 조주 스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것을 어록에 나오는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우리들 자신의 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불필요한 것을 다 덜어 내었는데, 그동안 가질 만큼 가졌었지만 모두 내려놓고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입니다.

   지금 여기 오신 분들이 그렇습니다. 집이나 가구나 가족들을 떠나서 홀몸으로 이곳에 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물음입니다.

   조주 선사는 말합니다.

   “방하착(放下着).”

   이것은 승가의 용어로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학자가 다시 묻습니다.

   “이미 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까?”

   이 학자로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데, 조주 스님이 새삼스럽게 내려놓으라고 하니까 되묻는 것입니다.

   조주 선사의 답입니다.

   “그렇다면 지고 가라(着得去).”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부분은, 이것이 말장난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 이것을 불교 용어로 ‘상(相)’이라고 합니다. 내려놓았다고 해서 내려놓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려놓았다면 그 생각과 관념에서조차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에는 학자가 조주 선사의 말을 듣고 크게 깨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텅 빈 속에서 무엇인가 움이 틉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는 그런 상에 집착합니다. 이름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왕년에 어떻게 살았는데.’하는, 이미 지나간 부질없는 과거사에 집착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세계이고 선의 세계입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지라는 소리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졌느니 버렸느니, 선하니 악하니, 아름다우니 추하니 하는 일체의 분별들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안다면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감사하면서, 나눠 가지면서 삶을 삽니다.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서 집착하지 않는 구도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이는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이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이는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이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우리들 삶에서 지녔던 것을 때로는 모두 내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생애를 살아오는 동안 많은 과정과 곡절을 겪으면서 때로는 내려놓았고, 또 새롭게 갖곤 했습니다. 한 생의 과정이 다 그렇습니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선한 일 자체에 묶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선함이 아닙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스쳐 지나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덕이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늘 기억한다고 해서 공덕이 잇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에도 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육조 혜능을 눈뜨게 한 구절이 <금강경>에 있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그 마음을 일으키라는 말입니다. 움켜쥐었던 것을 놓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늘 움켜쥐고 있으면 거기에 갇혀 사람이 시들어 버립니다. 그 이상의 큰 그릇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병을 심하게 앓으면 모든 게 시들해집니다. 내 몸조차도 주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밖에 책이며 찻그릇이며 이것저것 챙겼던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해집니다.

   평소에는 그것에 얽매여 있으니까 소중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어떤 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 어떤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비본질적인 것인가? 이 생각을 하게 되면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저절로 놓여나게 됩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때 가서 아까워하며 망설일 것 없이, 내려놓은 일을 미리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려놓는 데서 벗어나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는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한 백장 선사가 있습니다. 스님의 이름은 원래 회해(懷海)인데 백장산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산의 이름을 따서 백장 스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한 스님이 백장 선사에게 묻습니다.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

   경전이나 어록에 나오는 법문을 남의 일로, 과거 어느 선사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내 삶에 그것을 비춰 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때 백장 선사의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백장 선사가 머물던 산 이름을 백장산 또는 대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고 한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이것이 안거의 소식입니다.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수행하는 사람은 어디에 거처하든 홀로 우뚝 자기 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길상봉에 앉든지 혹은 반야봉에 앉든지, 저마다 자신이 몸담아 사는 장소에서 홀로 우뚝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거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집안일을 하든 바로 그 현장에서 홀로 우뚝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으로 살고 그런 정신으로 일한다면 늘 깨어 있게 됩니다.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든, 절의 후원(사찰의 부엌)에서 일을 거들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든, 달리는 차 안이나 지하철에 있든 언제 어디서나 홀로 우뚝 자신의 존재 속에 앉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여름안거를 한다면, 안거의 기쁨을 시시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좋은 안거 이루기를 다짐합시다.
 
2008. 5. 24. 여름안거 결제
글출처 : 一期一會(법정스님 법문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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