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또한 멀지 않다고 하더니, 이제 겨울의 자리에 봄이 움트려고 한다. 지난밤에도 바람기 없이 비가 내렸다. 겨우내 까칠까칠 메마른 바람만 불다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비 소리를 들으면 내 속뜰도 촉촉이 젖어드는 것 같다.

    아침에는 온 산에 안개가 자욱이 서렸다. 안개로 가려진 숲은 살아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 한동안 막혔던 새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산에서 우는 작은 새는 산이 좋아 산에서 사는가. 침묵(沈黙)의 숲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낮이 되자 하늘이 열리고 밝은 햇살이 퍼졌다. 겨울 동안 선실(禪室)에만 박혀 있다가 오랜만에 포근한 햇볕을 따라 앞마루에 나와 앉았다. 촉촉이 적은 흙과 물기 머금은 숲에서 싱그러운 봄향기가 배어 나온다.

    마루에 앉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넉넉하고 즐겁다. 항상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산! 희끗희끗하던 잔설(殘雪)이 간밤 비로 말끔히 씻기고, 얼음 풀린 시냇물소리가 꽤 여물다. 댓잎마다 햇살을 받아 일렁이는 잔물결로 눈이 부시다.

    나는 하나의 존재로서 전경(全景)을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 ‘산울림 영감’처럼 빈 마음으로 듣고 바라볼 뿐이다. 그러면 내 안에서 잔잔한 기쁨이 샘솟는다.

    그런데, 만약 바라보고 있는 이 산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 소유관념으로 인해 잔잔한 기쁨과 충만한 여유를 즉각 반납하게 될 것이다. 등기부에 기재하여 관리해야 할 걱정, 세금을 물어야 하는 부담감, 혹은 어느 골짝에 병충해는 없을까, 도벌(盜伐)은 없을까 해서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산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고 내 뜰처럼 즐길 수가 있다. 차지하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은 이처럼 그 틀이 다르다.

    누군들 달덩이 같은 백자항아리며 이름 있는 고서화(古書畵) 한두 점쯤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가까이 두고 쓰다듬고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래서 어떤 부자들은 그걸 차지하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가지고 남의 무덤 속에 있는 것까지도 꺼내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일단 차지하고 나면 그는 그 순간부터 소유관념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사물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잃게 된다. 그는 도난방지며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쓴 나머지, 마음 놓고 바라보며 즐길 수가 없다. 우리들의 마음이 어떤 소유욕에 얽매여 있으면 마음의 창인 그 눈도 함께 멀어, 봄밤의 정취도 저녁놀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니 차지할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볼 줄만 안다면 언제 어디서나 그 안목으로 보고 즐길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보물을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안목이 없다면 그는 한낱 물건의 관리인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고 싶으면 뜻에 맞는 친구와 함께 박물관이나 미술관 혹은 전람회 같은 데 들르면 된다. 들어가는 입장료쯤은 그걸 차지해 관리하는 비용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서울에서 살 때 이따금 인사동쪽으로 지나게 되면 목물(木物) 가게 앞에서 발길이 머뭇거려지곤 했었다. 요즘은 온전한 게 별로 없겠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경상(經床)이며 문갑, 탁자 등 제법 훤칠하게 빠진 것이 나돌았다. 내 주제에 가질 형편은 못되니, 눈으로 보면서 즐기기로 했었다. 목물(木物)들을 보고 있으면 그 만듦새나 모양이 단순하고 질박해서 바라보는 마음이 지극히 편해진다. 불필요한 요소를 생략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약된 알짜의 모습, 사람이나 물건이나 이 알짜의 모습이 우리를 편하게 해준다.

    그것은 옛 우리 조상들의 그 같은 인품이 그 물건 안에 수며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비슷하게 만든 요즘의 물건에서는 쓰임새는 그만한데 그 후덕스럽고 넉넉한 기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시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세월이라는 옷을 입고 있으니까.

    옛 사람들은 그가 만들고 있는 그 일 자체에 기쁨과 보람과 긍지를 누렸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이해타산 때문에 좋은 연장과 기술을 가지고서도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보수가 됐건, 명예가 됐건 차지하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만드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정치 일선에서 내노라 하고 활약하던 사람들이 세월의 거센 바람에 밀려나, 이제는 바라보는 처지에서 새파란 현역(現役)들의 활동을 대할 때 감회가 무량할 것이다. 권력의 덧없음을, 즉 ‘모든 권력은 붕괴되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붕괴된다’는 사실을 통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정치현실을 통해 지나간 날 자신들이 저지른 공(功)과 과(過)를 새삼스레 헤아리게 될 것이다. 칼자루를 잡았을 때와 칼끝에 서 있을 때가 어떻다는 것을 간(肝)에라도 새기면서.

    운동선수의 경우도 마찬가지. 경기장을 차지하고 경기에 열중할 때 그는 팀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줄곧 뛰어야 하므로 자신의 경기 태도를 차분히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선수 교체로 관중석에 물러앉아, 뛰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경기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주택정책은 변덕스런 문교정책만큼이나 매우 개운치 않은 데가 있다. 보도에 의하면, 수요자의 구매력을 무시한 주택공급 때문에 주택 부족은 극심한데도 집은 남아도는 희한한 현상이 생겼다는 것. 현대 자본주의 경제구조 속에서 소비자의 요구는 소비자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일반 소비대중에게는 유익하지만 기업에게는 이윤이 적은 물건은 생산하지 않음으로써 소비자의 선택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앞으로 값싼 임대주책을 지어 보급을 확대하겠다니 때늦은 감은 있지만 기대해 봄직하다.

    주택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도 이제는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집은 건축 발상부터가 사람이 몸담아 사는 주거공간(住居空間)으로 되었다. 그 공간에서 사는 일보다도 반드시 ‘내 집’이어야 한다는 소유관념 때문에, 가난한 서민들은 그 내 집을 갖기 위해 평생을 두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는가. 선진회국의 경우도 전체 가구의 절반가량이 내 집이 아닌 임대주택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자기 소유가 아니라도 내 집처럼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잇도록 정부당국에서는 국민복지의 차원에서 값싼 임대주택을 많이 보급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목표는 남보다 많이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물건이나 행동, 사상이나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일단 어디에 집착하여 얽매이게 되면 청정한 心性은 흐려져 가치의식이 전도되고 존재의 활기도 빛을 잃는다.

    오늘날 우리들은 보다 많이 보다 크게 차지하여 부자만 되려고 하지, 가난을 지키면서 즐기려고는 하지 않는다.

    알맞게 가난을 지킨다는 것이 오늘 같은 현실에서는 부자가 되기보다 어쩌면 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적당한 가난’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내적(內的)인 가난만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에는 번뇌와 갈등이 비교적 적다.

    탐욕은 모든 악(惡)의 뿌리다. 적게 가질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1982. 3. 11)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2011.10.27 (20:14:51)
[레벨:5]햇살아래
 
 
 

나의 소유가 아니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전 평생 집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환경을 바꾸어 가며 한번씩 집을 옮기며 사는 것도 괜찮으니까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전세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해서 쫓기듯 이사를 하니 집을 소유해야겠다는 욕심이 일어나네요.

집착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요.

 
(218.236.21.46)
  
2011.10.27 (23:04:39)
[레벨:29]id: 오작교
 
 
 

아시아권에사 사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집에 대한 애착은

삶의 전부랄 만큼 집요하지요.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정착을 해 온 정착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서양 사람들, 특히 미국사람들이야 유목문화이기 때문에

집에 대한 애착이 우리보다 덜한 것 같구요.

 

동물적인 귀소본능을 채워줄 만큼의 크기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