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라
도서명 | 물소리 바람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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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라 하루도 뻔한 날이 없이 빗줄기가 지나갑니다. 잠결에 장 밖 파초 잎에 후드득거리는 빗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산봉우리에는 연일 짙은 비구름이 감돌고 있습니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끈적거리는 이 삼복더위가 다 귀찮고 불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것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장마와 무더위 속에서 온갖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이삭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 더위로 인해 집을 떠나 모처럼의 휴가를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짜증스런 더위도 이기고 참아야 합니다. 중동이나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아프리카 같은 혹독한 기후 조건 아래서 일하는 우리 근로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겪는 더위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만 참고 견디면 선들거리는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오늘은 피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벽암록(碧巖錄) 43측에는 ‘동산무한서(洞山無寒署)’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스님이 동산 양개 선사에게 묻습니다.
“몹시 덥거나 몹시 추울 때, 어떻게 해야 그런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습니까?”
너무도 평범한 일상적인 이런 물음이 법문집에 수록되었다니 얼핏 생각하면 싱거운 일 같지만, 알고 보면 평범한 그 일상 속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물음을 받은 선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더위도 추위도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대답도 물음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럼 어떤 곳이 더위도 없고 추위도 없는 곳입니까?”
일단 물었으면 그 끝을 보는 것이 구도자의 진지한 자세입니다. 도중에 그만두게 되면 당초의 물음의 뜻은 흩어지고 맙니다.
선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더울 때는 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고, 추울 때도 또한 그대 자신이 추위가 되라!”
우리가 덥네 춥네 하는 것은 하나의 느낌이요 분별입니다. 덥다고 해서 선풍기를 틀고 춥다고 해서 난로를 피웁니다. 그러나 선풍기나 난로가 더위와 추위를 근원적으로 해소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선풍기를 틀어 놓았으니 시원하게 느껴지고 난로를 피워 두었으니 훈훈한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시원하고 훈훈한 기계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 타오르는 열기와 차디차게 얼어가는 냉기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대는 그 더위 속에 뛰어들어 내 자신이 더위가 되고, 추위 속에 뛰어들어 내 몸소 추위가 되지 않고서는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올여름에도 더위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산이나 바다로 찾아 나설 것입니다. 남들도 가니 덩달아 나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피서지라고 찾아가 보면 몰려든 사람들 등살에 피서는 고사하고 고생만 잔뜩 하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잠자리며 먹는 일 혹은 피서지의 소란과 물것들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진이 빠져 돌아오는 얼굴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사바세계’인데 피할 길이 있겠습니까?
더위를 피해 찾아간 곳이 오리려 더위 속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번뇌를 여의고 보리(菩提)를 이룬다거나, 생사를 떠나 열반을 다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번뇌 속에 보리가 있고 생사 안에 열반이 있는 것이지, 따로 어디 가서 이루거나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갈등이 있다고 해서, 친구 집을 찾아가 실컷 털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뭔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할 뿐이지 그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갈등이 있을 때는 그 갈들의 정체와 마주 않아 직시(直視)해 보십시오. 물론 여기에는 꾸준한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그 정체를 철저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이 마침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면 그 갈등은 눈 녹듯 사라지고 맙니다. 멀리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것도 없습니다. 공연히 골이 빈 자신만 드러내놓은 꼴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남을 쳐다보는 것보다도 몇 갑절 값있는 일입니다. 멀리 밖으로 헤매면서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콕 막히거나 맺힌 한 생각을 돌이키고 나면 정토(淨土)가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하나도 없지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精進)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이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갈등이나 불행에 직면했을 때, 그걸 피하려 하지 말고(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지만) 정면으로 대결하여 그걸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화가 복으로 바뀔 수 있고 새로운 지평(地平)이 열리게 됩니다.
다시 피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돈이나 시간이 없어 혹은 그 밖의 사정으로 인해 피서를 떠나지 못하는 이웃들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설사 그런 여유가 있다 할지라도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설 게 아니라, 그 산과 바다를 내 곁으로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날 훨훨 벗어 제치고 집안청소라도 해 보십시오. 그런 공간이 있는 처지라면 화단이나 채마밭에 맨발로 뛰어 들어 잡초라도 매 보십시오.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우리는 더위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일 끝에 찬물로 목욕을 하고 마른 속옷을 갈아입고 돗자리 위에서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심신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이때는 새로운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에 읽지 않았던 몇 권의 책을 머리맡에 꺼내 두고 속옷 바람으로 누워서 뒹굴면서 읽어보십시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거듭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문자를 터득하고 있고 문명인이면서도 글을 읽지 않으면 머릿속은 묵은 밭처럼 잡초만 무성하게 되어 골 빈 야만인이나 속물이 되고 맙니다. 사람의 의식은 투명할수록 삶의 질을 높이게 됩니다.
벌건 쇳물이 흘러내리는 용광로 곁에서 일하는 우리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 속에서 사는 산업의 일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위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들 자신이 뜨거운 쇳물이 되어 이 겨레의 명예를 짊어지고 세계로 흘러 퍼지기 때문입니다.
더위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몸소 더위가 되어 이기십시오. 멀지 않아 대지에는 또 맑은 바람이 불고 하늘이 높은 가을이 찾아올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십시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끈적거리는 이 삼복더위가 다 귀찮고 불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것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장마와 무더위 속에서 온갖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이삭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 더위로 인해 집을 떠나 모처럼의 휴가를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짜증스런 더위도 이기고 참아야 합니다. 중동이나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아프리카 같은 혹독한 기후 조건 아래서 일하는 우리 근로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겪는 더위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만 참고 견디면 선들거리는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오늘은 피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벽암록(碧巖錄) 43측에는 ‘동산무한서(洞山無寒署)’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스님이 동산 양개 선사에게 묻습니다.
“몹시 덥거나 몹시 추울 때, 어떻게 해야 그런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습니까?”
너무도 평범한 일상적인 이런 물음이 법문집에 수록되었다니 얼핏 생각하면 싱거운 일 같지만, 알고 보면 평범한 그 일상 속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물음을 받은 선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더위도 추위도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대답도 물음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럼 어떤 곳이 더위도 없고 추위도 없는 곳입니까?”
일단 물었으면 그 끝을 보는 것이 구도자의 진지한 자세입니다. 도중에 그만두게 되면 당초의 물음의 뜻은 흩어지고 맙니다.
선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더울 때는 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고, 추울 때도 또한 그대 자신이 추위가 되라!”
우리가 덥네 춥네 하는 것은 하나의 느낌이요 분별입니다. 덥다고 해서 선풍기를 틀고 춥다고 해서 난로를 피웁니다. 그러나 선풍기나 난로가 더위와 추위를 근원적으로 해소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선풍기를 틀어 놓았으니 시원하게 느껴지고 난로를 피워 두었으니 훈훈한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시원하고 훈훈한 기계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 타오르는 열기와 차디차게 얼어가는 냉기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대는 그 더위 속에 뛰어들어 내 자신이 더위가 되고, 추위 속에 뛰어들어 내 몸소 추위가 되지 않고서는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올여름에도 더위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산이나 바다로 찾아 나설 것입니다. 남들도 가니 덩달아 나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피서지라고 찾아가 보면 몰려든 사람들 등살에 피서는 고사하고 고생만 잔뜩 하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잠자리며 먹는 일 혹은 피서지의 소란과 물것들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진이 빠져 돌아오는 얼굴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사바세계’인데 피할 길이 있겠습니까?
더위를 피해 찾아간 곳이 오리려 더위 속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번뇌를 여의고 보리(菩提)를 이룬다거나, 생사를 떠나 열반을 다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번뇌 속에 보리가 있고 생사 안에 열반이 있는 것이지, 따로 어디 가서 이루거나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갈등이 있다고 해서, 친구 집을 찾아가 실컷 털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뭔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할 뿐이지 그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갈등이 있을 때는 그 갈들의 정체와 마주 않아 직시(直視)해 보십시오. 물론 여기에는 꾸준한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그 정체를 철저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이 마침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면 그 갈등은 눈 녹듯 사라지고 맙니다. 멀리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것도 없습니다. 공연히 골이 빈 자신만 드러내놓은 꼴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남을 쳐다보는 것보다도 몇 갑절 값있는 일입니다. 멀리 밖으로 헤매면서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콕 막히거나 맺힌 한 생각을 돌이키고 나면 정토(淨土)가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하나도 없지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精進)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이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갈등이나 불행에 직면했을 때, 그걸 피하려 하지 말고(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지만) 정면으로 대결하여 그걸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화가 복으로 바뀔 수 있고 새로운 지평(地平)이 열리게 됩니다.
다시 피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돈이나 시간이 없어 혹은 그 밖의 사정으로 인해 피서를 떠나지 못하는 이웃들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설사 그런 여유가 있다 할지라도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설 게 아니라, 그 산과 바다를 내 곁으로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날 훨훨 벗어 제치고 집안청소라도 해 보십시오. 그런 공간이 있는 처지라면 화단이나 채마밭에 맨발로 뛰어 들어 잡초라도 매 보십시오.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우리는 더위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일 끝에 찬물로 목욕을 하고 마른 속옷을 갈아입고 돗자리 위에서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심신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이때는 새로운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에 읽지 않았던 몇 권의 책을 머리맡에 꺼내 두고 속옷 바람으로 누워서 뒹굴면서 읽어보십시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거듭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문자를 터득하고 있고 문명인이면서도 글을 읽지 않으면 머릿속은 묵은 밭처럼 잡초만 무성하게 되어 골 빈 야만인이나 속물이 되고 맙니다. 사람의 의식은 투명할수록 삶의 질을 높이게 됩니다.
벌건 쇳물이 흘러내리는 용광로 곁에서 일하는 우리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 속에서 사는 산업의 일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위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들 자신이 뜨거운 쇳물이 되어 이 겨레의 명예를 짊어지고 세계로 흘러 퍼지기 때문입니다.
더위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몸소 더위가 되어 이기십시오. 멀지 않아 대지에는 또 맑은 바람이 불고 하늘이 높은 가을이 찾아올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십시오.
(83. 8)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