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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돌아보며

오작교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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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여름 한철을 지내고 나면 심신의 진이 빠진다. 기진맥진, 그야말로 기도 진하고 맥도 진한다. 수련회다 뭐다 해서 거의 날마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어 차례씩 아랫절에 오르내리느라 땀을 흘려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여름 휴가철을 맞아 찾아오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대하다 보면, 안거(安居)는 이름뿐 자기 정리의 시간을 제대로 가질 수 없다. 여름 안거가 끝나기 전날, 아랫절 욕실(浴室)의 저울 위에 올라 보았더니 이 여름에 3킬로가 새어 나갔다. 자주 현기증이 일어났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산이야 나를 좋아할 리 없건만
내가 좋아서 산에서 살지
한 산중에 오래 머물다 보니
쓸데없는 인연들이 나를 귀찮게 한다.

이렇게 읊었던 옛 선사의 심정 그대로를 오늘의 내 것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이런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맴돌고 있다. 더도 말고 한 닷새쯤 어디 가서 해주는 밥 좀 얻어먹으면서 쉬었으면 좋겠다. 날마다 더운 물에 목욕도 하고 사람 안 만나고 푹 좀 쉬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

    지난 여름에는 두 차례나 태풍을 뒤따라 온 호우 때문에 아궁이에서 물을 퍼내느라고 몹시 성가셨다. 산중에는 비가 많이 오면 여기저기서 생수가 터진다. 그래서 배수시설이 엉성하면 번번이 부엌 바닥에서 물을 퍼내야 한다.

    겪어 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자기가 몸담고 사는 집 지붕에서 비가 새거나ㅓ 아궁이에서 물이 나면 살맛이 안 난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밤에 빗소리만 들려도 잠을 이룰 수 없다.

    처음 집을 지을 때 집 둘레를 파서 배수구를 냈지만 둘레가 석바위라서 부엌 바닥보다 깊이 파지 못한 탓인지 비가 많이 오면 낮은 아궁이로 물이 스며들게 마련이었다. 몇해 전 한 차례 뜯어 고쳤어도 효험은 없었다.

    이번에는 아랫마을에서 일꾼을 다섯 사람이나 데려다 이틀 동안 배수로를 다시 손질했다. 이다음 큰 비가 와서 물이 새어들지 않으면 한턱내겠다고 그날의 일꾼들에게 언약을 했다. 이번 남쪽에 비가 많이 내렸다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산을 내려오는 날도 비가 내렸었다. 약속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비오는 날 길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 떠나기 위해 그 전날까지 찬거리를 모두 먹어 없앴고, 또 끓여 먹기가 지겨워 빗속인데도 훌훌 떠나오고 말았다.

    ‘빗길을 갈까 위어서 갈까 / 무슨 길 바삐 바삐 가는 나그네…….’ 이런 시도 있지만, 한번 길 떠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대로 떠나야지 날씨가 궂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게 되면 그날을 공연한 날이 되어 희미한 그림자처럼 지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면서 자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삶이 일상적인 타성에 젖게 되면 생기와 빛을 잃는다. 자기 삶에 생동하는 리듬을 만들지 못하면 삶 자체가 무력해지고 권태로워지지 않을 수 없다.

    한 삶이 무기력하고 권태로워지면 그가 마주치는 친구의 삶도 또한 빛을 잃는다. 길을 가다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발랄한 생기와 신선한 미소와 마주칠 때 최소한 그날 하루의 삶은 신선한 감동으로 채워질 수 있다. 그 대신 우거지상을 대하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볼 때 우리들 자신이 지닌 생기마저 빠져 나가기 쉽다. 그러니 한 사람 삶의 양식은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웃에 그만한 메아리를 울리게 마련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우리는 일직부터 들어왔다. 10년 세월 ! 그렇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집에서 10년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세상에서는 큰 인연이 아닐 수 없다.

    10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내게 주어진 삶의 무대를 어떻게 소모해 왔는가? 부끄러움과 자책이 덧없는 세월 위에 떠오른다. 내 삶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그런 심경이다. 10년 전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다시 산으로 돌아왔는데 출세간(出世間)의 정업(淨業)은 소홀히 하고 세속의 업만 더한 것 같다. 되지도 않은 잡문 나부랭이를 써서 헛이름만 세상에 떨침으로써 번거로운 삶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 출가 수행자의 분수에 맞지 않은 삶이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없는 듯이 살고 싶은데 그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스스로 지은 그 동안의 인연들 때문에, 인연의 물결이란 한꺼번에 멈추어지지 않는 것이니까.

    올해 들어 둘레에는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몇 가지 변화가 일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물물이 넘치지 않고 틈으로 새나가는 것을 큰마음 먹고 고치기로 했다. 당초에는 우물 턱 아래를 파서 판자를 묻음으로써 새는 물을 막을까 했는데, 큰절 총무스님의 배려로 사면을 편벽나무 판자로 짜고 네 기둥 위에는 연꽃까지 새겨 놓으니 이제는 맑은 물이 철철 넘치게 되었다.

    그리고 허드레로 쓰는 우물곁에 대로 엮어 세운 여름철 목욕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흐느적거려 쓰기가 어려웠다. 여름 장마가 지기 전에 새로 세우고 지붕은 루핑을 사다 덮어 놓았다. 올 가을에는 굴참나무 껍질을 그 위에 덮으려고 한다. 이 목욕장도 건축에 밝은 현고 총무스님의 설계에 의한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헛말이 아닌 모양이다. 얼마 전에 위채에 오르는 돌층계도 정면에서 한쪽으로 옮겼다. 저 아래 대숲머리서부터 빤히 쳐다보고 오르기보다는 채전밭을 돌아 곁길로 오르니 오늘 사람이나 맞는 사람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그리고 새로 낸 층계 위에 후박나무가 있어 훨씬 운치가 있다. 그 일로 잔뿌리를 적잖이 잘린 후박나무한테는 심히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의 삶이 무료하고 삭막하고 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삶의 공간을 개조해보는 것은 새로운 탄력과 리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저마다 자기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살듯이 자신의 삶도 자기 자신이 나서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고단하고 조금은 외로운 그런 존재다.

    10년 동안 내가 거처하는 방은 집지을 때 말고는 그 후 한 번도 도배를 하지 않았다. 향 연기와 촛불에 그슬려 벽과 천정은 우중충해졌고, 방구석은 더러 곰팡이가 슬어 있다. 깨끗하고 산뜻하고 정돈된 상태를 좋아하는 성미이면서 오늘까지 도배를 하지 않은 것은 일 벌이기가 너무 꺼려 무거워서였다.

    그러나 올 가을에는 하는 수 없이 도배를 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뭣보다 책을 비롯한 소유를 정리하기 위해서다. 도배를 하는 일은 이사 가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일이다. 세간을 죄다 밖으로 꺼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을 다시 시작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기존의 소유와 삶의 양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종이로 벽과 천정과 바닥을 바르는 일만이 아니라 의식가지도 새로 도배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85. 8)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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