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도서명 | 물소리 바람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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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E. F. 슈마허의 책이름이다. 그는 이 책의 부제(副題)를 ‘인간을 중요시하는 경제학의 연구’라고 달고 있다. 이 책은 서구 근대화 사상의 줄기인 거대주의(巨大主義)와 물질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과 물질숭배의 그릇된 신앙에 의해 인류전체가 눈이 멀어가고 있는 오늘, 돈을 가지고도 살 수 없는 비물질적인 가치 즉 아름다움과 건강과 조화의 새로운 인간생활을 부흥시키는 일이, 미래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라고 그는 역설하고 있다.
그는 또 생산과 자본과 기술에 ‘인간의 얼굴’이 끼어들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내세우기도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다움은 굳이 경제적인 영역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
지난 여름 볼일로 구례 화엄사를 다녀온 일이 있다. 바로 절 입구에 전에 없던 콘도미니엄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들어선 걸 보고 옛 절에 대한 그윽한 영상이 삽시간에 달아나고 말았다.
절 앞에 그런 건물이 버티고 서도록 묵인해 버린 관계기관의 처사도 규탄 받아야 하겠지만, 자연의 경관과 전체적인 조화를 파괴해 가면서 거대한 건축물을 지은 그 업자의 무지에 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몸을 담고 살 수 있는 쾌적한 생활공간이란 흙과 가까울수록 좋다. 고층 아파트나 거대한 빌딩 속에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백이 없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토록 크고 거대한 것을 좋아하게 됐을까. 넓은 대지 위에서는 높고 큰 건축물도 균형을 이룰 수 있겠지만, 좁은 땅이나 주변의 잔잔한 기존 경관과 조화를 이루려면 전체적인 통일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송광사를 다녀간 사람마다 잔잔하고 옛스러운 가람의 배치와 분위기에 한결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송광사는 둘레의 산자락이 높지 않고 부드럽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법당과 불전과 요사들도 크지 않아 전체적인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옛사람들은 따로 미학을 공부하거나 건축을 연구하지 않았어도 속이 찬 사람들이라 자기네의 분수를 알고, 생활 자체가 담백하고 맑았기 때문에 그런 안목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속이 덜 찼기 때문에 자기네 분수를 모르고 겉으로만 과시하려는 허영심이 짙다. 송광사는 예전부터 도량 안에 석물(石物)을 세우지 않았었다. 세울 만한 경제적인 여건이 닿지 않아서거나 세울 줄 몰라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전체의 가람 배치에 어울리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 근래에 도량 안에 몇 군데 세워진 석물들만 보더라도 그 멋없고 거슬린 부조화를 우리는 단박에 알 수 있다. 벌써부터 그런 석물의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대중의 여론이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송광사에 지금 대웅전의 세배쯤 되는 큰 건물을 짓는다는 말을 현장에 와서 듣고 본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의 절 분위기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면서 전체적인 균형의 파괴를 걱정하는 이가 많다. 이런 우려와 걱정은 바깥사람들만이 아니고 도량 안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수도생활이란 추상적인 마음 닦음이 아니고 일상에 익히는 정진과 시시로 대하는 구체적인 사물의 영향이 절대적인 인자가 되기 때문에 도량의 불균형은 곧 수도생활의 불균형을 가져 오게 마련이다. 사람이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이 또한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시절인연이 와서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되더라도 주변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전체 가람의 배치에 통일된 균제(均齊)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달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찍이 없었던 희한한 건물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래의 건축양식이 전체의 조화를 위해 바람직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닦는 수도원에서만이라도 세속적인 거대주의와 물질주의의 허상에서 벗어나, 작고 알찬 데서 진실하고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몸무게는 40킬로그램 밖에 안 됐다고 한다.
그토록 작은 몸속에 위대한 혼(마하트마)이 깃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니 큰 것은 추해지기 알맞다.
경제성장과 물질숭배의 그릇된 신앙에 의해 인류전체가 눈이 멀어가고 있는 오늘, 돈을 가지고도 살 수 없는 비물질적인 가치 즉 아름다움과 건강과 조화의 새로운 인간생활을 부흥시키는 일이, 미래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라고 그는 역설하고 있다.
그는 또 생산과 자본과 기술에 ‘인간의 얼굴’이 끼어들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내세우기도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다움은 굳이 경제적인 영역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
지난 여름 볼일로 구례 화엄사를 다녀온 일이 있다. 바로 절 입구에 전에 없던 콘도미니엄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들어선 걸 보고 옛 절에 대한 그윽한 영상이 삽시간에 달아나고 말았다.
절 앞에 그런 건물이 버티고 서도록 묵인해 버린 관계기관의 처사도 규탄 받아야 하겠지만, 자연의 경관과 전체적인 조화를 파괴해 가면서 거대한 건축물을 지은 그 업자의 무지에 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몸을 담고 살 수 있는 쾌적한 생활공간이란 흙과 가까울수록 좋다. 고층 아파트나 거대한 빌딩 속에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백이 없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토록 크고 거대한 것을 좋아하게 됐을까. 넓은 대지 위에서는 높고 큰 건축물도 균형을 이룰 수 있겠지만, 좁은 땅이나 주변의 잔잔한 기존 경관과 조화를 이루려면 전체적인 통일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송광사를 다녀간 사람마다 잔잔하고 옛스러운 가람의 배치와 분위기에 한결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송광사는 둘레의 산자락이 높지 않고 부드럽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법당과 불전과 요사들도 크지 않아 전체적인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옛사람들은 따로 미학을 공부하거나 건축을 연구하지 않았어도 속이 찬 사람들이라 자기네의 분수를 알고, 생활 자체가 담백하고 맑았기 때문에 그런 안목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속이 덜 찼기 때문에 자기네 분수를 모르고 겉으로만 과시하려는 허영심이 짙다. 송광사는 예전부터 도량 안에 석물(石物)을 세우지 않았었다. 세울 만한 경제적인 여건이 닿지 않아서거나 세울 줄 몰라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전체의 가람 배치에 어울리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 근래에 도량 안에 몇 군데 세워진 석물들만 보더라도 그 멋없고 거슬린 부조화를 우리는 단박에 알 수 있다. 벌써부터 그런 석물의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대중의 여론이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송광사에 지금 대웅전의 세배쯤 되는 큰 건물을 짓는다는 말을 현장에 와서 듣고 본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의 절 분위기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면서 전체적인 균형의 파괴를 걱정하는 이가 많다. 이런 우려와 걱정은 바깥사람들만이 아니고 도량 안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수도생활이란 추상적인 마음 닦음이 아니고 일상에 익히는 정진과 시시로 대하는 구체적인 사물의 영향이 절대적인 인자가 되기 때문에 도량의 불균형은 곧 수도생활의 불균형을 가져 오게 마련이다. 사람이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이 또한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시절인연이 와서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되더라도 주변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전체 가람의 배치에 통일된 균제(均齊)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달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찍이 없었던 희한한 건물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래의 건축양식이 전체의 조화를 위해 바람직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닦는 수도원에서만이라도 세속적인 거대주의와 물질주의의 허상에서 벗어나, 작고 알찬 데서 진실하고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몸무게는 40킬로그램 밖에 안 됐다고 한다.
그토록 작은 몸속에 위대한 혼(마하트마)이 깃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니 큰 것은 추해지기 알맞다.
(83. 9)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