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샘터

메마른 삶에 한 주걱 맑은 물이 되기를
  • Go Back
  • Down
  • Up
  • List
  • Comment

사랑 없이, 평화롭고 지루하게 / 저녁에 당신에게

오작교 7380

0

0
   모처럼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급여와 상반기 성과급을 받는 날, 텅 빈 통장에 여러 자리 숫자가 찍히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선물을 하기로 했죠.

   선물이라고 해봐야 서점에서 일고 싶은 책을 몇 권 사는 것이었지만 달달한 연애소설도 사고, 좋아하는 작가의 여행기도 사고, 일기장도 새로 사서 돌아오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던 시절의 설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책장에 새 책을 꽂아 놓고, 책 사이에 새로 사 온 일기장도 꽂아 두면서 그 자리에 있던 오래된 일기장은 빼냈습니다.

   오래된 일기장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으려다가 이 일기장의 첫 장에는 어떤 것을 써놓았었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펼쳐 본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언제라도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서 내 방을 매일 정돈하게 하고, 
세상의 여러 곳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며,
누구에게든 화사하게 인사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활자 속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으며,
당신에게로 갈 불행을
기꺼이 내가 다 막겠다고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그를 열렬히 사랑하기 시작하던 때 쓴 일기였습니다.

   그때는 그랬었구나! 사랑이 지나간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서먹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그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글을 다 썼을까? 마치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그녀는 옛 일기장을 바라보고 있었죠.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지겹도록 사랑했던 시절을 지나온 그녀에게 자주 생각나던 가사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옛 일기장을 서랍 깊은 곳에 넣으면서, 이런 시절이 언제 다시 올까, 노인 같은 심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평화를 포기했던 시절도 좋았지만
사랑 없이 평화롭고 지루한 요즘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새 일기장에 설레는 마음을 적는 날도 오겠죠.
만년필을 꾹꾹 눌러서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새기는 날도 오겠지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글출처 : 저녁에 당신에게(김미라, 책읽은수요일)
ShareScrap
0
Add Comment
Cancel Add Comment

Report

"님의 댓글"

Report This Comment?

Comment Delete

"님의 댓글"

Are you sure you want to delete?

List

Share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No. Subject Author Date Views
429
normal
오작교 23.08.11.10:31 8415
428
normal
오작교 23.08.11.10:25 8382
427
normal
오작교 23.07.22.11:37 8616
426
normal
오작교 23.06.28.10:12 8494
425
normal
오작교 23.06.22.13:56 8561
424
normal
오작교 23.06.22.11:38 8446
423
normal
오작교 23.06.20.10:04 7767
422
normal
오작교 23.06.20.09:46 9131
421
file
오작교 23.06.13.09:52 7284
420
normal
오작교 23.06.13.09:08 8901
419
normal
오작교 23.06.08.11:28 7320
normal
오작교 23.06.08.11:18 7380
417
normal
오작교 23.06.01.10:47 7471
416
normal
오작교 23.06.01.10:36 7733
415
normal
오작교 23.05.19.13:25 7353
414
normal
오작교 23.05.02.10:44 7446
413
normal
오작교 23.05.02.09:43 7442
412
normal
오작교 23.05.02.08:50 7735
411
normal
오작교 23.05.02.08:22 7411
410
normal
오작교 23.04.21.19:44 7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