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삶에 한 주걱 맑은 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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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도는 마치 활에 시위를 얹는 것과 같구나 / 느림과 비움

오작교 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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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데는 누르고 낮은 데는 들어올리고, 남은 것은 덜고 모자라는 것은 채워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니 낮은 것에 낙담하고 모자라는 것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은 사사로움이 없으니 생명과 우주의 균형을 맞춥니다. 오직 사람만이 사욕을 품고 사는 까닭에 높은 것을 더 높게, 낮은 것을 더 낮게, 많은 것은 더 많게, 모자라는 것은 더 ㅁ자라게 만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사욕을 추구하는 까닭에 불편부당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높으면 위태로워지고 많이 쌓으면 잃기 쉽습니다.

   어젯밤 늦게 올해 처음으로 반딧불이를 보았습니다. 멀리서 푸른빛이 도는 인광을 반짝이며 날던 반딧불이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깨 너머로 날아갔지요. 한참 동안 마당 끝에서 반딧불이의 행방을 눈으로 쫓아갔습니다. 반딧불이의 몸통은 안 보이고 인광만 어둠 속에서 점멸하며 날아갔지요.

   방에 들어갔다가 자정쯤 다시 나왔는데 텃밭 끝 풀숲 위에 두 개의 흰 빛이 반짝거렸지요. 반딧불이었지요.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자욱하게 울려 퍼지는 5월 31일 밤, 두 마리의 반딧불이를 보았다고 기쁜 마음으로 적습니다.

   나는 인생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안ㄱ 있고, 또한 그 문제들의 가닥을 잡아 풀어보려고 골머리를 싸맨 채 하루 낮과 이틀 밤을 ㅂ낸 적이 있습니다. 여태껏 벼락이라도 내려꽃히듯 한 소식을 받은 바 없고, 더구나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의 행복을 거머쥔 사람도 아니지요. 서울에서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물가에 집을 짓고 소박한 삶을 꾸리기 위해 내려온 한 범부에 지나지 않지요. 물가에 서서 물을 종일 지치도록 바라보거나, 때로는 손목시계를 풀어놓고 우는 푸른 뱀이나 베티고개, 서운산 자락 아래의 음달말, 소터골, 엽돈재, 개련이 등과 같은 마을 이름들을 하나씩 외우면서 같은 시각 차가운 국수를 먹기 위해 문을 막 나서는 누군가를 떠올려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어떤 날은 개가 불임의 메아리와 강의 백일몽과 아무도 따주지 않는 석류 따위를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에 빠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귀농(歸農)이라 하고, 누군가는 낙향(落鄕)이라고 했습니다. 자발적 ㅅ외의 선택이라고 했지요. 다 맞는 말이지만 또한 다 틀렸습니다. 저는 다만 조촐하게 살러 식솔들을 끌고 시골로 들어왔습니다.

   벌써 네 해가 지났지요. 서른 해 남짓 살던 서울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올 때 내 몸의 진화는 끝났지요. 살기 위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생을 도모하기 위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 애썼으나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짜로 살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늘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 불행하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살았던 게 그 증거가 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생을 도모한다고 말하면서 죽음을 도모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도시에서 반생을 협궤열차처럼 흘려보냈는데, 어느 날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더니 마음은 헐어 누추하고 안쪽으로 몇 개의 궤양과 누공을 안고 있었지요. 생은 대책 없이 가여웠고, 횡격막 아래에서 기쁨의 알들을 부화시키지 못하는 벙어리 종달새 몇 마리는 침울해 했습니다. 마음이 자주 몸을 비우니, 난파선 같은 몸만 반인륜적이고 뻔뻔스럽게 시끄러웠지요. 몸을 나간 마음은 어딘가 고아원 복도 같은 차가운 공기가 융성이는 곳을 떠돌며 쉬지 않고 딸꾹질을 해댔습니다. 구석에 기댄 채 녹아내리는 제 영혼을 뚝뚝 떨구고 있는 검정 우산보다도 내 몸은 쾌활하지 못했지요. 이때 딸꾹질은 외로움 위에 생을 세우지 못한 자의 뼈아픈 자책과 그 자책에 대한 꾸지람의 의전(儀典)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무릇 외로움이란 노동을 생계를 세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며, 땅 위의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지요. 저는 쓰고 남은 목재 위를 기어가는 민달팽이나 물속의 띠우묵날도래 한 마리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고작 투덜거리는 한 헐벗은 영혼을 섬기느라 속진(俗塵)을 뒤집어쓰며, 오욕의 문자로 내 삶의 페이지들을 채웠던 것이지요.

   물가에 지은 집에 수졸재(守拙齋)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낮은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의 집이란 뜻이지요. 수졸재에 와서 비로소 묵은 양말을 벗고 발을 씻어보는 것인데, 그러고 나니 잠은 희고 깨끗했습니다. 잠이 얼마나 희고 고요했던지 잠결에도 마음은 자꾸만 더워지고, 설탕에 재여 말리 생강조각 두어 개를 씹어보듯이 간밤의 꿈들을 단물이 날 때까지 씹어보다가, 지난해 고욤이 서리 맞는 늦가을 무렵 산문집을 한 권 펴냈지요. 『추억의 속도』라는 제목이 붙은 조촐한 책이 그것입니다. 그 책의 한 면에 이렇게 썼지요. “나는 욕구불만과 분노와 누추와 잔망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적빈의 날들과 깊은 잠과 고요,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내게는 이곳이 도원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무릉이다. 단 한 번밖에 갈 수 없는, 그리 되물릴 수 없는 삶이 저기 있다.” 내 심령은 이곳에 내려온 뒤 일급수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버들치보다 더 씩씩해졌습니다.

   밤을 새운 후회는 대로 근력이 되기도 하니, 이 유벽한 곳의 먼 날들을 앞당겨 어린 나무들을 심는 것이지요. 첫해 봄엔 마당가에 석류나무 두 그루, 해당화 두 그루, 홍매화 한 그루, 왕보리수 한 그루, 벽오동나무 두 그루, 산목련 한 그루, 영산홍 몇 무더기, 제법 큰 이팝나무와 층층나무, 수수꽃다리 몇 그루……들을 심었지요. 텃밭 500여 평엔 적지 않은 용솔 묘목과 노각나무 묘목을 심었지요. 봄 가뭄이 심해 어떤 것은 실패하고, 어떤 것은 창궐하는 풀의 기승 속에서도 숨을 붙이고 살아남았지요.

   봄엔 연초록 새잎들을 돋는 걸 보며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의 기적 앞에서 건방진 마음조차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여름밤엔 반딧불이가 방충망에 붙어 연초록 불을 가냘프게 깜빡이는 걸 오래 들여다보기도 하지요. 비오는 날 밤엔 여러 마리의 청개구리가 셀파의 도움 없이 무산소 등정에 나서는 산악인처럼 가파른 유리창을 묵묵히 기어오릅니다. 폭설이 내려 집 주변을 둘러싼 산의 연봉들이 흰 설의(雪衣)를 입고, 호수의 물마저 꽝꽝 얼어붙은 겨울에는 노루가 먹이를 찾아 집 근처까지 내려오기도 했지요.

   농사를 몇 해 거른 묵정밭엔 제 키보다 더 높게 풀들이 자랐지요. 풀들은 땅의 풍부한 자양분을 얼마나 많이 끌어다 썼는지 줄기가 어른 손목 정도가 될 정도로 굵었지요. 낫으로도 잘 베어지지 않아 가만 놔두었더니 쓸모없는 숲을 이루었지요. 이곳을 산책할 때면 바로 옆에서 꿩 두 마리가 푸드득 하고 날아갔지요. 집 아래쪽 하천엔 너구리가 삽니다. 밤에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이놈과 마주칠 때도 있지요. 밤나무숲 속을 산책할 땐 청설모 식구들과 자주 만납니다. 구변인데도 이놈들을 낯을 가리지요. 밤나무 꼭대기의 우듬지에 몸을 붙이고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가을엔 도라지 밭에 사는 살모사가 이웃집 마실 오듯이 마당으로 내려와 놀다가기도 합니다.

   시골에 와서 살며 가장 좋은 일은 흙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지요. 흙이 참 좋습니다. 흙을 밟는 것도 좋고, 밤나무 숲에 들어가 응달진 곳의 흙을 한 움큼 손에 쥐고 냄새를 맡아보는 것도 좋지요. 가랑잎들과 한해살이풀들의 잔뿌리, 미생물들이 한데 뒤섞여 만든 부엽토지요. 이 흙의 감촉은 부드럽고, 냄새는 향기롭지요. 흙에서 멀어지는 것은 곧 자연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을 불러오고, 환자를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골프 스윙이나 복습하는 구질구질한 의사 얼굴을 보는 일이 잦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흙과 가까이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무릇 땅 위에 생명을 도모하는 것들은 저마다의 리듬을 갖고 그에 따라 움직이지요. 더 빨리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자연의 리듬에 위배되는 속도를 강요하면 필경 탈이 생깁니다. 광우병 소동이 그렇지요. 조급하고 탐욕스런 유럽의 축산업자들이 초식동물인 서들에게 농축된 동물성 가공 사료를 퍼 먹여 광우병이 생겨났지요. 죄 없는 소들 수십만 마리가 애꿎게 도살되는 끔찍한 재앙이 덮쳤습니다. 할 수 있다면 탐욕스런 축산업자 두어 명을 무작위로 뽑아 비장이라도 떼어내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자연의 리듬조차 거스르며 제 잇속을 키우려는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 뻗어갈 것인가, 암담했습니다.

   저는 슬로비(Slobbie)임을 기꺼워합니다. 속도에 저항하며, 느림의 삶을 살고 싶지요. 복숭아나무 종족의 방언들이나 번역하거나, 나무의 빈 가지나 처마에 쇠기름을 매달아놓고 쇠기름을 쪼아 먹기 위해 날아드는 곤줄박이를 바라보며 게으르게 빈둥거리고 싶은 것이지요. 게으름을 피우는 그 시간이 제겐 성숙과 우화(羽化)의 시간이라고 굳이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시간을 돈이라고 떠들며 전자계산기를 두르려대는 그들이 알아듣겠습니까? 저는 천천히 걷고, 천천히 밥 먹고, 천천히 숨을 쉬며 인생을 피안으로 고요히 옮겨가는 명상을 합니다. 한유한 시간을 제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나, 물속에 모래나 나무껍질로 집을 짓고 사는 강도래와 남도래의 한 살이를 관찰하는 데 온전히 쓰고 싶은 것이지요.

   자연의 삶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은 사람살이의 으뜸 의무입니다. 저는 청빈의 미덕, 느림의 미덕, 간소함의 미덕을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럼프스(grumps)는 제가 일궈야 할 청결한 도덕입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럼프스는 “Green(녹색의), Responsible(책임감 있는), Unassuming(욕망을 줄이고), Moderate(절제하며), Poverty Seeking(청빈을 추구하는)”영어단어들의 첫 자를 따 만든 새로운 개념어입니다.

글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뿌리와이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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