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멈춰' 스님
누군가 요즘 세상을 파시스트적인 가속도가 붙은 세상이라고 하더군요. 느린 것을 경멸하고 빠른 것만을 선호하는 세상을 꼬집으려 그런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요즘 세상이 더 많이, 더 빠르게 경제적 이익을 얻는 일에 삶의 모든 가치를 두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만 질주하는 세상에서 행동이 굼뜨거나 느린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로 소외되기 십상입니다.
외국의 한 스님이 이끄는 수행처에선 종소리가 나면 모든 사람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코끝에 정신을 집중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는 위파사나 위빠사나(Vipassanā)는 불교 용어로, '꿰뚫어 봄', '통찰'을 의미하는 명상 수행법입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며, 무상, 고(孤), 무아와 같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수행에 뿌리를 둔 그런 수행법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 현대인에겐 상당히 요긴한 수행법이 되겠지요. 종소리가 나면 하던 일을 멈춘다는 이야기 끝에 떠오르는 스님이 있습니다. 종소리가 나지 않아도 그 스님은 자주 하던 일을 멈추었지요. 그런 스님이 재미있어 나는 스님에게 '하다 멈춰'란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얼굴에 내리는 비, 구르는 천둥, 달리는 사슴, 동쪽에서 온 사람, 상처 입은 가슴……, 하나같이 자연스럽고 가슴에 와닿는 북미 원주민식 이름이 연상되는 그 '하다 멈춰'라는 별명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보따리 하나를 안고 나타났습니다. '하다 멈춰' 스님에겐 유일한 재산인 그 보따리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절에 사는 동안 스님이 하던 일은 대부분 청소 같은 허드렛일이었지요. 허드렛일이라고 해도 물론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비질, 걸레질, 설거지, 빨래……, 끝도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다 해내기에 그 스님은 당연히 역부족이었습니다. 일하는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지요. 스님과 친해지자 나는 그런 스님을 정말 무던히도 놀렸습니다. 그때 나는 한창 호기심 많은 나이여서, '하다 멈춰' 스님의 그 하다가 멈추는 동작이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흉내도 많이 냈습니다.
‘하다 멈춰’ 스님은 어떤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전기가 나간 기계처럼 그 동작을 멈추곤 했습니다. 입속으로 숟가락이 들어가는 찰나에 갑자기 뚝, 동작을 멈춘 채 숟가락은 물고 있는가 하면, 걸레를 들고 방을 닦다가도 갑자기 팔을 내뻗은 채 정지 상태로 있고, 걸어가다가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식이었습니다.
마치 정지된 화면 같은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맨 장난이라도 치는가 싶어 "밥 먹어요, 밥 먹어" 하며 흔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언제 저 숟가락이 입에서 빠져나오나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땐 화산 폭발로 멸망해버린 도시 폼페이를 떠올리기도 했지요. 들이닥친 용암에 덮여 모든 사람이 하던 동작 그대로 굳어 버린 폼페이의 최후. 마지막 순간을 폼페이에서 맞았던 사람들처럼 '하다 멈춰' 스님 또한 완전히 멈춘 상태로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고장 난 기계처럼 서 있곤 했습니다.
하던 동작을 멈추면 그 스님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눈을 내리뜨면 그때부터 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지요. 몸뚱이가 있는 이쪽 세계에선 정지 상태이고, 의식이 가 있는 저편의 세계에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번도 그런 사람을 만난 경험이 없었던 나는 ‘하다 멈춰’ 스님의 그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자꾸 장난을 걸었지요. 정신이 돌아오면 그 스님은 흉내 내는 내가 귀엽다는 듯 빙긋이 웃곤 했습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이던 나와 서른 초반의 '하다 멈춰' 스님은 그러면서 서로 가까워졌지요.
그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군인들을 상대로 법회를 하기 위해 전방부대를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군인들과 함께 찬불가를 부르고 싶었지만, 피아노를 살 수 없어 돈을 모아 기타를 하나 샀지요. 은사스님이 알면 중이 무슨 기타냐며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법당 뒤에 기타를 숨겨두고 몰래몰래 연습했습니다.
기타를 가져가야 할 때는 빈손으로 은사스님께 인사만 드리고 밖으로 나가면 법당 뒤에 숨어 있던 ‘하다 멈춰’ 스님이 담 너머로 기타를 넘겨주었습니다. 거기서부터는 대학생 하나가 군 법당까지 기타를 들어다 주곤 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승려가 기타를 들고 다니는 것은 곱게 봐줄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기타 솜씨가 늘자 조금씩 간이 커진 나는 은사스님이 외출한 틈을 타서 아예 방으로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불가뿐 아니라 나중엔 가요와 동요. 가곡까지 불렀습니다.
하루는 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불리던 <친구>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며 익히고 있는데, '하다 멈춰' 스님이 다가와 말하더군요. 정목스님, 왜 그렇게 슬픈 노래만 불러? 스님한테 어울리지도 않아. 밝고 재미있는 노래 좀 해봐.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던 '하다 멈춰' 스님을 향해 나는 깔깔 웃으며 말했지요. 레코드가 제자리에서 맴도는 거야, 스님. 레코드 바늘이 스님처럼 돌아가다 멈추었나 봐.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눈이 예뻤던 그 스님은 피부도 하얗고 얼굴도 아름다웠습니다.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왔던 그 스님은 하던 동작을 멈추는 것 외에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지요. 어느 누구와도 다투는 일이 없었고, 소리 높여 말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야 할 때는 소리 없이 도왔고, 온종일 걸레를 들고 다니며 방을 닦거나 청소하는 등 주어진 일에 충실했습니다.
바가지를 들고 물을 뜨다가 갑자기 멈춘 채 삼매에 빠져 있던 '하다 멈춰' 스님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어디서 무슨 행동을 하다가 멈추고 있는지, 철없던 그때는 몰랐지만, 그 스님 또한 마음속에서 울려 나오는 종소리를 듣고 코끝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관찰하며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빠르게 달려가기만 하고 멈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하다 멈춰' 스님을 떠올리며 나 또한 하던 일 놓아두고 멈춰 섭니다. 마음의 스위치를 내리고 그냥 그대로 불 꺼진 방안에 서 있어 봅니다.
깨어 있기 위해 우린 가끔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멈춰서 자신을 살피며 습관적인 욕망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배를 채우고 나면 맹수도 더 먹지를 않습니다. 썩어서 넘쳐날지언정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욕심내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멈춰 서서 왜 그렇게 바삐 가려 하는지. 왜 자꾸 가지기만 하고 놓으려 하지 않는지, 자신의 삶을 한 번쯤 돌아보십시오.
"왜 그렇게 슬픈 노래만 불러?" 하고 묻던 '하다 멈춰' 스님의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 슬픔에 빠진 사람이라면 멈춰보십시오. 멈춰 서서 그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 슬픔을 만드는 자가 누구인지 지켜보기만 해도 그 슬픔에 서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들어오는 호흡과 나가는 호흡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분주하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글출처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정목스님, 감영사)
외국의 한 스님이 이끄는 수행처에선 종소리가 나면 모든 사람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코끝에 정신을 집중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는 위파사나 위빠사나(Vipassanā)는 불교 용어로, '꿰뚫어 봄', '통찰'을 의미하는 명상 수행법입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며, 무상, 고(孤), 무아와 같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수행에 뿌리를 둔 그런 수행법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 현대인에겐 상당히 요긴한 수행법이 되겠지요. 종소리가 나면 하던 일을 멈춘다는 이야기 끝에 떠오르는 스님이 있습니다. 종소리가 나지 않아도 그 스님은 자주 하던 일을 멈추었지요. 그런 스님이 재미있어 나는 스님에게 '하다 멈춰'란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얼굴에 내리는 비, 구르는 천둥, 달리는 사슴, 동쪽에서 온 사람, 상처 입은 가슴……, 하나같이 자연스럽고 가슴에 와닿는 북미 원주민식 이름이 연상되는 그 '하다 멈춰'라는 별명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보따리 하나를 안고 나타났습니다. '하다 멈춰' 스님에겐 유일한 재산인 그 보따리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절에 사는 동안 스님이 하던 일은 대부분 청소 같은 허드렛일이었지요. 허드렛일이라고 해도 물론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비질, 걸레질, 설거지, 빨래……, 끝도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다 해내기에 그 스님은 당연히 역부족이었습니다. 일하는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지요. 스님과 친해지자 나는 그런 스님을 정말 무던히도 놀렸습니다. 그때 나는 한창 호기심 많은 나이여서, '하다 멈춰' 스님의 그 하다가 멈추는 동작이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흉내도 많이 냈습니다.
‘하다 멈춰’ 스님은 어떤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전기가 나간 기계처럼 그 동작을 멈추곤 했습니다. 입속으로 숟가락이 들어가는 찰나에 갑자기 뚝, 동작을 멈춘 채 숟가락은 물고 있는가 하면, 걸레를 들고 방을 닦다가도 갑자기 팔을 내뻗은 채 정지 상태로 있고, 걸어가다가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식이었습니다.
마치 정지된 화면 같은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맨 장난이라도 치는가 싶어 "밥 먹어요, 밥 먹어" 하며 흔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언제 저 숟가락이 입에서 빠져나오나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땐 화산 폭발로 멸망해버린 도시 폼페이를 떠올리기도 했지요. 들이닥친 용암에 덮여 모든 사람이 하던 동작 그대로 굳어 버린 폼페이의 최후. 마지막 순간을 폼페이에서 맞았던 사람들처럼 '하다 멈춰' 스님 또한 완전히 멈춘 상태로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고장 난 기계처럼 서 있곤 했습니다.
하던 동작을 멈추면 그 스님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눈을 내리뜨면 그때부터 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지요. 몸뚱이가 있는 이쪽 세계에선 정지 상태이고, 의식이 가 있는 저편의 세계에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번도 그런 사람을 만난 경험이 없었던 나는 ‘하다 멈춰’ 스님의 그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자꾸 장난을 걸었지요. 정신이 돌아오면 그 스님은 흉내 내는 내가 귀엽다는 듯 빙긋이 웃곤 했습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이던 나와 서른 초반의 '하다 멈춰' 스님은 그러면서 서로 가까워졌지요.
그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군인들을 상대로 법회를 하기 위해 전방부대를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군인들과 함께 찬불가를 부르고 싶었지만, 피아노를 살 수 없어 돈을 모아 기타를 하나 샀지요. 은사스님이 알면 중이 무슨 기타냐며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법당 뒤에 기타를 숨겨두고 몰래몰래 연습했습니다.
기타를 가져가야 할 때는 빈손으로 은사스님께 인사만 드리고 밖으로 나가면 법당 뒤에 숨어 있던 ‘하다 멈춰’ 스님이 담 너머로 기타를 넘겨주었습니다. 거기서부터는 대학생 하나가 군 법당까지 기타를 들어다 주곤 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승려가 기타를 들고 다니는 것은 곱게 봐줄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기타 솜씨가 늘자 조금씩 간이 커진 나는 은사스님이 외출한 틈을 타서 아예 방으로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불가뿐 아니라 나중엔 가요와 동요. 가곡까지 불렀습니다.
하루는 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불리던 <친구>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며 익히고 있는데, '하다 멈춰' 스님이 다가와 말하더군요. 정목스님, 왜 그렇게 슬픈 노래만 불러? 스님한테 어울리지도 않아. 밝고 재미있는 노래 좀 해봐.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던 '하다 멈춰' 스님을 향해 나는 깔깔 웃으며 말했지요. 레코드가 제자리에서 맴도는 거야, 스님. 레코드 바늘이 스님처럼 돌아가다 멈추었나 봐.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눈이 예뻤던 그 스님은 피부도 하얗고 얼굴도 아름다웠습니다.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왔던 그 스님은 하던 동작을 멈추는 것 외에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지요. 어느 누구와도 다투는 일이 없었고, 소리 높여 말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야 할 때는 소리 없이 도왔고, 온종일 걸레를 들고 다니며 방을 닦거나 청소하는 등 주어진 일에 충실했습니다.
바가지를 들고 물을 뜨다가 갑자기 멈춘 채 삼매에 빠져 있던 '하다 멈춰' 스님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어디서 무슨 행동을 하다가 멈추고 있는지, 철없던 그때는 몰랐지만, 그 스님 또한 마음속에서 울려 나오는 종소리를 듣고 코끝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관찰하며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빠르게 달려가기만 하고 멈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하다 멈춰' 스님을 떠올리며 나 또한 하던 일 놓아두고 멈춰 섭니다. 마음의 스위치를 내리고 그냥 그대로 불 꺼진 방안에 서 있어 봅니다.
깨어 있기 위해 우린 가끔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멈춰서 자신을 살피며 습관적인 욕망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배를 채우고 나면 맹수도 더 먹지를 않습니다. 썩어서 넘쳐날지언정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욕심내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멈춰 서서 왜 그렇게 바삐 가려 하는지. 왜 자꾸 가지기만 하고 놓으려 하지 않는지, 자신의 삶을 한 번쯤 돌아보십시오.
"왜 그렇게 슬픈 노래만 불러?" 하고 묻던 '하다 멈춰' 스님의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 슬픔에 빠진 사람이라면 멈춰보십시오. 멈춰 서서 그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 슬픔을 만드는 자가 누구인지 지켜보기만 해도 그 슬픔에 서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들어오는 호흡과 나가는 호흡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분주하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글출처 :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옵니다(정목스님, 감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