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삶에 한 주걱 맑은 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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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던 날

오작교 1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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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속에 가진 깊이와 넓이만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도를 가진 이 보고 크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기 잣대로만 세상을 재기 때문이지요. 어리석음 앞에서 어리석다고 꾸짖는 일은 그다지 실속이 없는 일이지요. 오히려 무위로써 껴안아야 합니다. 자비로우니 능히 용감하고 검소하니 능히 넓게 아우를 수 있습니다.

    집 가까이에서 뻐꾹새 웁니다. 모심은 논에 백로가 어 있지요. 물은 거울처럼 쨍쨍하게 빛을 토해냅니다. 청산은 녹수로 울창해지고 물빛은 고요한 중에 빛납니다. 문 닫아걸고 노자(老子)를 읽다가 나와 마당을 일없이 서성입니다. 이마에 닿는 햇볕이 데일 듯 뜨겁네요.

    며칠째 꽃봉오리가 둥글고 단단해지더니 마침내 모란꽃이 활짝 폈습니다. 불에 타는 듯한 붉음과 수려한 자태 위로 금즙의 햇빛이 쏟아져 내려 눈이 부시지요. 내가 선홍의 모란꽃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한 까닭은 눈이 부셔서가 아닙니다. 꽃이 식물의 성기(性器)라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저 활짝 피어 벌어진 모란꽃 잎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농익은 여인의 몸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붉은 맨드라미 대음순(大陰脣)과 소음순(小陰脣)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망함은 접어놓더라도 혼자 사는 이에게 솟구치는 음심(淫心)은 대책 없는 재앙인 까닭이지요.

    그렇다고 저 절정에 이르러 토해내는 모란꽃의 자태와 빛깔을 끝끝내 외면하지는 못합니다. 모란을 심고 가꾼 자가 누려야 할 안복(眼福)이지요. 모란은 가히 꽃의 제왕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창산녹수가 다 모란꽃의 빛으로 말미암아 수려해집니다. 청산녹수를 배경으로 피어난 모란꽃아, 밥 끓이는 일마저 잊은 채 사흘쯤 바라보며 서 있고 싶습니다. 모란이 왕이 되고 작약이 재상이 되는 건 군신(君臣)의 예라고 일렀지요. 마당의 가시나무가 형제가 분가한다는 말을 듣고 말랐다가는 분가하지 않는단 말을 듣고 살아난 것은 형제의 예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은 연꽃에게서 부부의 예를 찾고 난초에게서 붕우(朋友)의 예를 찾았습니다. 짐승도 인륜(人倫)을 알고 초목도 인륜을 지켜 따릅니다. 짐승과 초목의 인륜이 저렇듯 곧고 뚜렷한데, 내가 따를 인륜은 무엇일까요?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겠다는 건 내 소년의 꿈이었지요. 그런데 나 어느덧 오십입니다. 봄 모란꽃 피듯 가을 매 날아오르듯 살고 싶었지요. 발랄하고 싶었지요. 휘몰아치고 싶었지요. 깊은 향기를 배고 싶었지요. 신출귀몰은 못되더라도 쾌활한 성정으로 거침없이 삶의 경영에서 내닫고 싶었지요. 그러나 힘듭니다. 글 시작한 지 꽉 찬 서른 해. 의술에 정지했다면 진맥하지 않고도 몸의 병들을 꿰뚫어보고 천문에 몰두했더라면 별빛의 밝음만으로도 세상의 길흉화복을 내다볼 수 있었겠지요. 천하의 책들을 두루 구해다 읽고 또 쉬지 않고 썼으나 조잡한 문장 두어 개 썼을 따름이지요. 청결한 도덕도, 뼛속까지 더워지는 덕도, 미물을 감복시킬 만한 학문도 닦지 못했습니다. 글을 엮어 쓰는 재주를 익혔으나 그건 길가 흙에 박혀 반짝이는 사금파리처럼 범상한 재주에 지나지 않지요. 매양 쓰는 일은 처음인 듯 낯설고 무서우며 처세와 경영은 그보다 더 힘들고 고통은 나날이 두터워집니다.

    올해 불청객처럼 경미하게 오십견 기미가 왔습니다. 허옇게 비듬 내려앉은 어깨가 쑤시고 얕은 재주로 글 쓰느라 머리털 빠져 더욱 성글어진 머리가 빠개져 뇌수가 흘러나오는 듯합니다. 유독 올봄을 넘기가 가시 삼킨 듯 아프고 의욕 부진으로 어깨가 처지는 건 내 굼뜬 재주의 한계를 속속들이 알아버린 탓일까요? 그렇다고 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지요. 이게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자의 업보이자 인륜일까요? 고금에 지극한 문장은 모두 피눈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옛 사람의 꺼끌꺼끌한 말을 가슴속에서 가만히 궁글려봅니다.

글 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글 : 뿌리와 이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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