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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처럼 푸근하게

오작교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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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텅 빈 충만
    추석 연휴 동안 멀리서 찾아온 친지들과 함께 앞산 위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뜰에서 지냈다. 이번 추석을 전후하여 연일 맑게 갠 날씨 덕에 어디서나 밝은 달을 대할 수 있었다. 마치 까맣게 잊어버린 옛 친구라도 만난 듯이 그렇게 마주 대했었다.

    세상살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보니 밤하늘을 쳐다볼 여유도 관심도 없이 지내왔다. 일에 쫓기고 시간에 밀리면서 지내는 사이 우리들의 감성은 얼마나 메말라졌는가. 표정을 잃고 굳어가기만 하는 오늘 우리들의 얼굴을 보면 우리가 하루하루 치르는 삶의 형태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추석 연휴에도 예년처럼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외국인들은 이런 우리네의 생활감정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의 결사적으로 현장을 탈출,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물결을 남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고생과 보상을 치른다 할지라도, 우리 겨레 정서순화의 처지에서 볼 때 실로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가족과 일가친척이며 친지들의 유대가 날이 갈수록 빛이 바래져가는 현대사회에서 재결합을 위한 그런 열기는 바로 우리 겨레의 활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빛 아래서 친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도 달빛처럼 은은하고 포근해진다. 달빛 아래서 정치나 경제에 대한 논의는 그 분위기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햇빛은 눈부시고 번쩍거려 그 아래서 갖는 생각도 반들거리고 건조해지기 쉬운데, 달빛은 은은하고 포근해서 우리들의 생각을 그윽하게 이끌어준다. 햇빛이 번적거리는 유리창이라면, 달빛은 은은한 창호지일 것이다. 밝은 낮이 차디찬 이성이라면 달밤은 포근한 감성일 것이다.

    요 며칠 동안 정치권의 소식을 안 들으니 속이 편했는데, 오늘부터 다시 뉴스에 출마선언이니 후보단일화의 실패니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 다시 심란해진다. 국민의 뜻과 여망을 내세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후보단일화만은 꼭 이루겠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다짐다짐 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동상이몽의 본심을 드러내는가 싶으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물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견디기 어려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험난한 길을 헤쳐 왔기 때문에 대권을 앞에 둔 이 마당에 선뜻 양보하기도, 물러서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둘레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어온 동지들의 뜻도 물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국민 앞에 누차 발설한 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지도자를 국민이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현실정치의 비정함과 냉혹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온 국민이 날마다 콧물과 눈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해가며 그토록 열망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들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주장을 들을 때, 국민의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짝이 없다. 요즘의 정치인들에게는 그 누구를 가릴 것 없이 겸양의 덕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경륜과 역량을 지녔다면 겸양의 덕도 함께 갖추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가 자기선전과 자기 과시의 시대인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사양이나 겸양의 덕이 전혀 없는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후보자마다 아무리 자기선전과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린다 할지라도 최후의 선택은 유권자인 국민 전체의 손에 달렸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의 정치 감각이나 의식수준이 이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정치인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니 국민에게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남발하거나 실망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

    평생을 두고 오로지 이 나라의 민주화 실현을 위해 분골쇄신 투쟁해 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기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만 그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실 정치란 아름다움보다 추한 면이 훨씬 많다. 전 국민의 신뢰와 여망을 한 몸에 지닌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자는 대통령보다도 더욱 귀한 존재다.

    포기나 양보는 희생이 아니라, 거룩한 투자임을 알아야 한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기꺼이 단념하는 일은 ㄴ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포기나 양보를 약자나 패자의 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상도동계니 동교동계니 하는 말에 염증이 날만큼 났다. 두 사람이 맞설 때, 누가 득을 볼 것인지 헤아려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 수많은 세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진정한 ‘선거혁명’을 이루려면 양 김씨에게 걸고 있는 국민의 여망과 기대를 두 김시는 절대로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두 분은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걸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신앙생활의 체험을 통해 터득한바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크게 버리는 자만이 크게 얻을 수 잇다는 신앙적인 교훈을 거듭 상기하기 바란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말이 생각난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에 대해서 계산하지만, 현명한 정치가는 이다음에 올 시대의 일을 생각한다.’

    아, 달빛처럼 은은하고 푸근한 정치가 이 땅에 펼쳐졌으면 좋겠다. 햇빛같이 눈부시거나 번쩍거리는 정치 말고, 달빛처럼 은은하고 푸근하게 우리들을 감싸주는 그런 정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87 . 10. 13>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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