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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에서

오작교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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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불일암에 살 때는 따로 산책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었다. 아무 때고 마음 내키면 숲으로 뚫린 길을 따라 나서면 되고, 멀리 펼쳐진 시야를 즐기고 싶으면 뒷산이나 앞산의 봉우리에 오르면 되었다. 혼자서 터덕터덕 숲길을 거닐거나 봉우리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있으면, 마른 바람이 옆구리께를 스치고 지나가긴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어떤 충만감이 마음 한구석에 고이는 것 같았다.

    여럿 속에 섞여 사는 지난봄부터는 일부러 산택의 시간을 정해놓고 일과삼아 거닐고 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법당 예불을 드리고 방에 돌아와 좌선, 다섯 시에 방선(放禪)을 한다. 방선이란 좌선에서 일어난다는 뜻. 여섯 시 아침공양 시간까지는 자칫하면 두벌잠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털고 일어나 거닐기로 한 것이다.

    습관이란 제2의 천성이란 말이 있듯이 길들이기 탓. 하루하루 잘못 익히다보면 마침내는 자기 자신으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타성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혼자서 살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여럿 속에 섞이더라도 준엄한 자기 질서가 있어야 한다.

    출가 수행자는 여럿이서 살더라도 원천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다. ‘사문(沙門)의 길은 홀로 가는 길’이라고 경전에서도 지적했듯이, 단독자로서 절대고독의 한가운데 우뚝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지와 기상이 없으면 이내 무디어지고 만다. 무디어진다는 것은 의식이 잠들어 있다는 말이고 심성에 녹이 슬었다는 소리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갈고 닦아 눈과 귀와 의식을 밝게 갖고 투명하게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리 속에 섞이다보면 자칫 무디어지기 쉬운 위험이 따른다. 한마디로 너무 편하기 때문. 먹을 걱정, 땔감 걱정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해결되고, 어떤 일이든지 여럿이 나누어 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

    손수 끓여서 먹는다는 것, 그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거기에 따르는 잡다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이 해 주는 음식을 받을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양을 마련해 준 후원 대중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으로 공양을 받았다. 그런데 서너 달이 지나고 난 이제, 그 고마워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당연히 받아먹을 것을 먹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내 의식이 그만큼 무디어진 것인가. 부끄러운 일이다.

붓꽃    오늘 아침에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숲길을 밀짚모자를 덮어쓰고 한 오리쯤 걸었다. 길섶에는 짙은 보랏빛 붓꽃이 한창이었다. 수창포(水菖蒲)라고도 부르는 이 붓꽃에는 내게 사연이 있다. 불일에서 살 때 아랫절로 내려가는 길 중간쯤에 해마다 6월 중순이면 이 붓꽃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그 길을 오가며 지켜 볼 때마다 자생하여 피어나는 들꽃의 천연스런 모습에 적잖이 감동을 했었다.

    화단에서 가꾸는 꽃은 아무래도 사람의 손이 자주 가기 때문에 천연스런 맛이 덜하다. 그러나 풀섶에서 자생하는 들꽃은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으므로 그 모습이나 개화(開花)가 보다 의젓하고 건강하다. 그 꽃이 지니고 있는 천성을 그대로 꽃피우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꽃을 보고 좋아한 몇몇 친구들은 붓꽃이 피면 알려달라고 했다. 꽃대가 부풀어 오르는 걸 보고 사연을 띄운 다음날이었다. 무슨 일로 아랫절에 내려가다가 그 꽃자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멈추어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제 낮까지도 무수히 꽃대가 부풀어 오르던 붓꽃이 자취도 없이 다 베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랫절로 뛰어 내려가 여기저기 알아보았었다. 농막에 있는 절 일꾼의 소행이었다. 얼마 전에 들어온 나이 많은 일꾼이 소 먹일 풀로 베었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소는 그런 풀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설사 소가 먹는 풀이라 할지라도 갓 꽃대가 올라오는 꽃을 어떻게 자취도 없이 깡그리 베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대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느라고 속으로 끙끙 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 그 일로 인해 나는 꽃이 필 무렵이면 농막을 찾아가 미리 당부를 하는 새로운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비에 젖은 붓꽃을 보면서 문득 그 ‘학살의 여름’이 생각나 나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어리석은 소행에 대해서 그 꽃들에게 사죄의 듯을 전했다.

    비가 갠 후면 꾀꼬리의 목청이 한결 맑게 들려온다. 같은 새지만, 꾀꼬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고, 두견새는 운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울어도 그저 울지 않고 피를 토하리만큼 애타게 애타게 운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한 자리에서 우는 두견새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무슨 한이 모질게 맺혔기로 저리도 애타게 우는가 싶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듯 한 꾀꼬리의 그 맑은 목청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몇 해 전에 겪은 일인데, 뒷 숲에서 ‘꾀액 꾀액’ 아주 듣기 거북한 소리로 우는 새가 있어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지금 막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니는 어린 꾀꼬리였다. 며칠을 두고 거친 목소리로 발성 연습을 하더니, 어느 날 마침내 맑은 목청이 틔어 매끄럽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새의 목청도 처음부터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구나 싶었다.

    새벽 다섯 시 무렵의 숲은 온통 새들의 노래로 찬란한 꽃밭이다. 공기 그 차제가 새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안개와 이슬에 젖은 나무들의 새벽잠을 깨우려는 듯,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온갖 새들이 목청껏 노래를 한다. 그들은 살아 있는 기쁨을 온몸과 마음으로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시각 인간의 도시도 서서히 깨어날 것이다. 시골에서 밤새껏 싣고 간 꽃이나 과일이나 채소를 장바닥에 내려놓기가 바쁘게 도시의 부지런한 사람들이 먼저 반길 것이다. 첫 버스를 타고 시장으로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른 아침 길을 쓸고 있는 청소부들은 비록 생계는 어렵지만 모두가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농촌 출신이므로 일찍 일어나는 데 길이 들었다. 늦잠 자는 사람들을 위해 일찍부터 움직여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간으로써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남이 잠든 시각에도 일어나 움직여야 굶지 않고 헐벗지 않는다.

    그러한 이웃들에게 나는 이 새벽, 길섶에 피어 있는 붓꽃이나 나리꽃을 한 아름씩 안겨드리고 싶다. 어려운 생계를 위로하면서 희망의 마을 전하고 싶다. 사람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한, 바캉스가 뭔지도 모르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살아가는 한, 언젠가는 복된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83. 8)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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