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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침묵(沈默)을 익히는 계절

오작교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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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물소리 바람소리
    겨울은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그런 계절이다. 그동안에 걸쳤던 얼마쯤의 허영과 허세와 위선의 탈을 벗어 버리고, 자신의 분수와 속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다.

    며칠 전 밀어닥친 눈바람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잎새들이 죄다 지고 말았다. 나무들의 발치에 누워 있는 가랑잎은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가지에서 떠난 잎들은 조금씩 삭아가면서 새봄의 기운으로 변신할 것이다. 대아닌 눈보라에 후줄근하게 서 있던 파초를 베어내고 흙을 두둑이 덮어 주었다. 이제 내 뜰에서는 여름의 자취와 가을의 향기가 사라지고 텅 빈 자리에 찬 그늘이 내리고 있다. 말끔히 비질한 뜰에 찬 그늘이 내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문득문득 계절의 무상감이 떠오른다.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무들은 빈 가지인 채로 서 있다. 떨쳐버릴 것을 모두 떨쳐버리고 덤덤하게 서 있는 나무들. 그것은 마치 세월에 부대끼고 풍상에 시달린 우리 모두의 주름진 얼굴만 같다.

    겨울의 문턱에 서니 저절로 지나온 자취가 뒤돌아 보인다.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은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적잖은 상처들을 입게 되었다. 우리들의 의식은 그동안 우리가 겪은 충격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얼룩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던 운동경기 중계 소리로 인해 소음의 찌꺼기가 덕지덕지 끼어 있을 것이다.

    이제는 침묵에 귀를 기울일 때다. 소리에 지든 우리들의 의식을, 소리의 뒤안길을 거닐게 함으로써 오염에서 헤어나게 해야 한다. 저 수목들의 빈 가지처럼, 허공에 귀를 열어 소리 없는 소리를 듣도록 해야 한다. 겨울의 빈 들녘처럼 우리들의 의식을 청 비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드러난 현상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 일 배후에 숨은 의미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참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마다 머리에 수건들을 질끈질끈 동여매고 혹은 어깨에 띠를 두르고, 광장에 모여 궐기하고 규탄하면서 울분을 토해낸다.

    그리고 이런 ‘행사’로써 그 사건을 이겨내려고 한다. 그러고는 흥분이 가라앉자 이내 까맣게 잊어버린다. 다행히 우리에게 망각의 기능이 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에 오는 충격을 감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들뜬 흥분을 안으로 삭이면서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를. 사전에 막을 수는 없었던가를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슨 일이건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결코 없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일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를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도 그 의미를 알고 당한다면 참고 견디면서 능히 극복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모르면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좌절하고 만다. 다시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저 아웅산 묘소의 참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라의 아까운 인재들을 어처구니없이 하루 사이에 잃어버리고 빈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주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때의 그 참사로 인해 슬픔과 통분도 컸지만 얻은 교훈도 적지 않았다. 엊그제 한 친구를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지만, 어쩌면 그때 가신 분들은 이 겨레를 위한 속죄양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족 사이에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 수백만의 목숨과 막대한 재산의 피해를 미리 막기 위해 겨레를 대신하여 기꺼이 가신지도 모를 일이다.

    참사를 당하기 직전 묘소 앞에서 도열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착잡한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 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저마다 무엇인가 어떤 예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울분케 한 그런 일에 어찌 예감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 분들의 죽음은 이 겨레를 위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안으로 새겨 담아야 한다.

    그대 많은 사람들은 울분에 떨면서 외쳤다. 항상 우리는 당하고만 말 것인가. 말로만 응징응징하고 말 것인가라고. 그러나 참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주적인 질서의 차원에서 볼 때 공격하는 쪽보다는 당ㅎ사는 쪽이 덜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대린 놈을 다리를 못 뻗고 자지만, 맞은 사람은 다리를 벋고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원한을 가져올 뿐. 원한을 버릴 때에만 화해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똑같이 ‘코리언’으로 불린다. 어느 한쪽의 망신이나 불행은 절대로 고소한 일이 못 되고 곧 다른 한쪽의 망신과 불행으로 이어진다. 분단되어 있을지라도 같은 민족은 원천적으로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이나 국가를 물을 것 없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폭력이란 남에게 해를 가하는 일만이 아니다. 분노와 증오와 가시 돋친 말도 일종의 폭력이다. 폭력은 맑은 이성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들 자신을 타락시킨다. 폭력은 내 자신을 파괴하고 나라를 파괴하며 마침내는 세계까지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이 지구의 여기저기에 잇따라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세계 도처에서 무자비한 테러와 암살이 자행되고, 분쟁과 침공이 그치지 않고 있는 그 메아리인 것이다.

    나라 안이나 밖을 가릴 것 없이 그럴 듯한 구실을 내세워 불의의 폭력이 정의를 짓밟은 작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가의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빌 것도 없이 폭력은 약자의 무기이지만 비폭력은 참는 자의 무기이다. 오늘의 세계가 비폭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류는 스스로 멸망하고 말리라는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말이 많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사느라고 제 정신을 가눌 수 없는 우리들은 하루 한때라도 침묵에 기댈 수 있어야 한다. 침묵에 기댐으로써 겹겹으로 닫힌 우리들 자신이 조금씩 열릴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무거운 침묵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음악은 침묵 속에서 찾아낸 가락이고, 뛰어난 조각 또한 침묵의 돌덩이에서 쪼아낸 형상이다.

    침묵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땅 속에서 삭는 씨앗의 침묵이 따라야 한다. 지금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삶인가는 우리들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온 것이다.

    겨울은 밖으로 딴눈 팔지 않고 안으로 귀 기울이면서 여무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멀지 않아 우리들에게 육신의 나이가 하나씩 더 보태질 때 정신의 나이도 하나씩 보태질 수 있도록…….
(83. 11. 24)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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