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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

오작교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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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산방한담
    겨울바람에 잎이랑 열매랑 훨훨 떨쳐버리고 빈 가지만 남은 잡목숲. 가랑잎을 밟으며 석양에 이런 숲길을 거닐면, 문득 나는 내 몫의 삶을 이끌고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가를 헤아리게 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그 세월을 제대로 살아왔는가를 돌이켜볼 때 나는 우울하다.

    가랑잎 밟기가 조금은 조심스럽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누워 있는 가랑잎 하나에도 존재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넘어다볼 수 없는 그들만의 질서와 세계가 있을 법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 때문에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지난 가을 말빚을 갚느라고 거의 산거(山居)를 비우다시피 하면서 여기저기 시정(市井)을 동분서주했었다. 일을 마치고 산으로 돌아오자 그사이 잎이 물들었다가 벌써 낙엽이 지고 있었다.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밤바람소리에 한동안 잊고 지내던 내 속뜰이 되살아났다. 평화와 정적이 깃든 그 내면의 여로(旅路).

    산에서 듣는 발마소리는 귓전만을 스치는 것이 아니다. 저 뼛속에 묻은 먼지까지도, 핏줄에 섞인 티끌까지도 맑게 씻어주는 것 같다. 산바람소리는 갓 비질을 하고 난 뜰처럼 우리들 마음속을 차분하고 정결하게 가라앉혀 준다. 인간의 도시에서 묻은 온갖 오염을 씻어준다. 아무런 잡념도 없는 무심(無心)을 열어준다.

    바람, 눈에 보이지도 붙잡을 수도 없는 나그네. 보이지도 붙잡히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히 살아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 손길이 닿는 것마다 생기를 돌게 한다. 이 세상에 만약 바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살아 있는 것은 시들시들 질식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빛이 바래져 재가 되고 말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보이는 것이 있게 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의지해서 들리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인도의 구루(종교적인 교사)인 라즈니쉬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한 방울 물을 잘못 엎지를 때
우주 전체가 목마를 것이다
한 송이 꽃을 꺾는다면
그것은 우주의 한 부분을 꺾는 일
한 송의 꽃을 피운다면
그것은 수만 개의 별을 반짝이게 함이어라
아,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처럼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졌느니.
흔히 겪는 일인데, 산을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마루에 걸터앉아 앞산을 내다보기가 바쁘게 ‘왜 이렇게 조용하지요?’라든가 ‘너무 고요해 안 되겠는데요’라고 하면서 무엇에 쫓기듯 안절부절 불안해하는 부류들이 있다. 물론 그들은 도시에 사는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들. 말하자면 도시형 관념적인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도시의 혼잡과 소음에 잔뜩 중독된 나머지 본래적인 질서와 고요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엔가 기대지 않고는 홀로 설 수가 없다.

    그래서 자연 그대로의 고요를 감내할 수 없어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묻히도록, 맑고 투명한 새소리가 무색하도록 트랜지스터를 틀어대거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어떻게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하게 정말 이상야릇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다.

    왜 오늘날 우리들은 ‘있음’에만 의존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현상에만 매달리려는 것일까. 침묵이 없이 어떻게 인간의언어가 발음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하나 허(虛)를 배경삼지 않은 실(實)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 그러니 제상(諸相)과 비상(非想), 즉 현상과 본질을 함께 볼 수 있다면 비로소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게 될 거라는 뜻이다. 표현을 달리 한다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바로 인식하려면 드러난 단면만 보지 말고 그 배후까지도 함께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

    우리 불일암 둘레의 숲속에는 산토끼와 꿩들이 살고 있다.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나를 믿어서인지, 나를 보고는 놀라 달아나는 일이 없다. 눈이 많이 내려 쌓일 때면 가끔 콩 같은 걸 뿌려주는데 그런 때는 가까이 다가와 마음 놓고 주워 먹는다. 이런 걸 지켜보고 있으면 가슴에 훈훈한 물기가 도는 것 같다. 그러나 낯선 사람을 보고는 이내 달아나버린다. 어쩌다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 뜰에서 어정거리는 꿩이나 토끼를 보면 그들은 반색을 한다. 식탁의 요릿감으로만 보여 잡아먹을 궁리나 하지 짐승이 같은 생물인 사람을 믿고 따르는 이웃의 정은 기르려고 하지 않는다. 순박한 짐승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묘리를 직감적으로 터득하고 있는 모양이다.

    12월 초순이 요즘도 대숲머리에 있는 두 그루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강추위가 오기까지는 얼마 동안 더 달려 있을 것이다. 더러는 꿩과 새들이 쪼아 반쯤 허물어진 것도 있지만, 나머지는 말짱한 그대로다. 벌써부터 보는 사람마다 오ㅙ 따지 않느냐고 입맛을 다시곤 했지만, 나는 과일을 입으로만 먹지 않고 눈으로도 먹을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다. 실은, 내 뜰에 놀러온 새들에게 따로 대접할 게 없으니 감이나 먹고 가라고 남겨둔 것이지만, 나는 나대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초겨울 하늘 아래 빨갛게 매달려 있는 감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앞산에 눈이라도 하얗게 내려 쌓이는 날, 빈 가지 끝에 매달린 저 감의 빛깔을 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그 기막힌 빛의 조화를. 큰절 문수전에 살던 혜담 스님은 한해 겨울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신비로운 감의 빛깔을 보기 위해 비탈길을 미끄러져 가면서 일부러 올라오곤 했었으니까. 겨울철 빛깔의 조화치고는 일품이 아닐 수 없다. 입으로만 먹고 말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감 맛을 볼 수 있었겠는가. 예이츠의 시에선가,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더니, 아름다움 또한 눈으로 드는 것일레라.

    겨울 숲은 부질없는 가식을 모조리 떨쳐버리고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약된 나무들의 본래 면목. 숲은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침묵을 딛고 일어선다. 봄날 움을 틔워 초록빛 물감을 풀어 수줍게 설레다가,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을 받아 서늘한 그늘을 대지에 드리운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익히면서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울긋불긋 서로 손짓하다가 마침내 미련 없이 낙하(落下). 머리와 팔을 허공에 치켜든 채 이제는 말없이 묵상에 잠겨 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 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1982. 1)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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